잃어버린 줄 알았던 '삶의 통제감'
육아 첫 1년 동안 우리는 늘 반응하느라 바빴다.
그래서 제주도 한달살이는 정말 오랜만에 우리가 먼저 선택한 일이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다시 살아나는 느낌이 있었다.
매일 같은 육아 루틴 속에서 우리는 늘 비슷한 고민을 반복했다.
오늘은 왜 이유식을 100ml밖에 안 먹지?
지금쯤 낮잠 재우러 들어가면 되나? 이제 깨워야 하나
문화센터는 하나쯤 다녀야 하는데.
애착 형성은 잘 되고 있는 건가?
왜 울지?
하루에도 몇 번씩 문제를 해결하고, 무너졌다가 다시 일어서고, 그렇게 정신없이 보내다 보니 어느새 1년이 지났다.
처음 1년은 정말 ‘쳐내는 육아’였다. 흘러가는 대로 해야 할 일들을 맞닥뜨리고 하나씩 배우고 하나씩 쳐냈다. 우리 부부도 크게 싸우는 일 없이 전우애로 서로를 다독였다. 이어 남편도 6개월 휴직을 쓰면서 공동 육아를 시작했고, 덕분에 아주 조금, 정말 조금, 여유가 생겼다. 그제야 비로소 우리 상태를 들여다볼 틈이 생겼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우리는 점점 더 무기력해졌다. 새벽 수유하느라 잠이 부족하던 신생아 시기보다 지금이 오히려 더 힘들었다. 아기는 통잠을 자고 우리도 육아에 익숙해졌을 시점인데, 부딪히는 일은 더 많아졌다.
많은 대화를 거쳐 우리가 내린 결론은 단순했다.
우리는 삶의 통제권을 잃었다고 느꼈다.
그리고 앞으로 몇 년은 출산 이전의 삶이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불안감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육아를 나누고 각자의 시간을 확보하려 해도, 아이가 생기기 전처럼 온전히 한 사람의 시간이 되지는 않았다. 한 사람이 집중하는 시간만큼 다른 사람이 감당해야 하고, 아이라는 새로운 존재는 우리가 갖던 100의 에너지를 자연스럽게 분산시켰다. 이런 생각들이 쌓이면서 우리는 점점 침울해졌다.
그때 제주도 한달살기가 돌파구처럼 다가왔다. 뭔가 대단한 여행이 될 거라기보다, 통제권을 잃어버린 육아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우리 손으로 우리의 삶을 다시 만져보는 일처럼 느껴졌다.
예전 둘이 다니던 여행처럼 원하는 만큼 걷고 쉬고 경험할 수는 없다는 걸 너무 잘 알았다. 오히려 육아까지 더해져 더 힘든 여정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결정에 의미를 부여한 건, 아이를 낳고 처음으로 “우리가 선택한 일”임을 느꼈기 때문이다.
최근 읽은 뇌과학 책에서도 ‘삶의 통제감’은 우울감과 스트레스에 치명적인 요소로 등장한다.
<우울할 땐 뇌과학>은 “결정한다는 행위 자체가 우울감을 완화한다”고 말하고,
윌리엄 스틱스러드의 <놓아주는 엄마, 주도하는 아이>는 통제감을 잃은 아이들이 불안과 무력감을 겪는 사례를 소개한다.
사실 우리가 통제권을 정말로 잃은 건 아니었다. 여느 부모처럼 아이를 낳고 첫 1년은 끌려다니면서 지냈지만, 또 여느 부모들처럼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삶의 모양에 적응해 갈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과정에서 우울함의 하강곡선을 타며 '통제감을 잃었다'는 느낌에 압도돼 있었다.
그래서 한달살기를 선택했을 때, 우리는 단순히 제주도로 떠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방향은 우리가 선택한다는 사실을 또렷하게 인지한 순간이었다. 그 작은 ‘결정하기’라는 행위 하나가 빠르게 마음을 다시 고요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이런 이유로, 매일 사소하게 부딪치던 우리 부부가 제주도에서는 거의 싸우지 않았던 게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