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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소라수경 Aug 10. 2024

귀한 귀양살이

"en la Ciudad de México"

 -1 -   

내 나이 23세, 우리나라를 떠나 머나먼 곳으로 갔던 경험이 있다. 우리나라로 가려면 비행기를 타고 11시간이 넘는 시간을 날아가야 하는 거리. 집으로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다. 그 먼 타국에서 ‘나는 누구인가?’를 처음으로 깊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 시절 나는 반백수였다. 아버지가 하는 일은 초등학교 이후 내내 내리막길을 달리고 있었다. 집안 살림이 점점 쪼그라들던 터라 내가 성적이 좋지 않은 것을 핑계 대기도 참 쉬웠다. 친구들이 대학에 입학하여 열심히 즐기며 다닐 때 나는 아르바이트 자리를 전전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는 나를 사촌 언니가 공부하고 있는 멕시코로 보내자고 부모님을 설득했다. 그때 당시 사촌 언니는 멕시코에 있는 대학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있었고 아파트를 임대하여 살고 있어, 가기만 하면 숙식이 해결되는 상황이었다. 나의 멕시코행은 빠르게 진행되어 말이 나오고 세 달도 채 되지 않은 어느 날 나는 미국행 비행기에 올라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간 멕시코 별세계였다. 미국과 스페인의 문화가 스며들어 경쾌하기도 하고 화려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매우 유했으며 급한 것은 대한민국밖에 없는 것처럼 여유로웠다. 멕시코 도착하여 시차 적응도 되지 않았는데 언니는 나를 “UNAM Universidad”로 데리고 갔다. UNAM 대학은 우리나라로 말하자면 ‘서울대학교’에 해당하는 국립종합대학이며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유서 깊고 전통 있는 대학교이다. 학교 투어를 온전히 하려면 버스를 타고 다녀야 할 정도로 넓었지만 우리는 걸어서 학교를 둘러봤고 사촌언니는 UNAM 대학교의 명물 건물을 보여주었는데 벽면에 화려한 벽화가 매우 독특하고 멋진 건물로 마치 박물관처럼 느껴졌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건물은 디에고 리베라가 그린 벽화로 장식된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건물이었다.     

 

                                                       

{출처:네이버지식백과[ National Autonomous University of Mexico ] 멕시코국립자치대학교(UNAM) ]

 [ National Autonomous University of Mexico ] 멕시코국립자치대학교(UNAM)는 멕시코 수도 멕시코시티에 위치한 국립 연구중심 종합대학교이다.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대학이며, 메인 캠퍼스는 여의도(2.9 km2)의 약 2.5배 크기인 7.3km 2로 세계에서 가장 큰 캠퍼스 중 하나이다. 이 대학교의 메인 캠퍼스는 20세기 멕시코의 유명한 건축가들이 설계했으며, 200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이 대학교는 멕시코 최고의 명문대학교로 국내외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2023년 QS 세계대학순위에서 세계 104위, 라틴아메리카 7위, 멕시코 1위를 차지했다.

 메인 캠퍼스는 20세기 멕시코의 유명한 건축가들이 설계했으며, 200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메인 캠퍼스의 벽화는 디에고 리베라와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 등 멕시코 역사에서 가장 인정받는 화가들이 그렸다.



  나를 멕시코에 배달하기 위해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도 함께 오셔서 두 분이 계시는 한 달은 멕시코에 있는 피라미드, 박물관 등 명소를 다니며 분주하게 여행 온 듯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 그렇게 분주하고 흥미로운 일상이 지나가고 큰아버지와 큰어머니 두 분도 서울로 가시고 나니 나 혼자 덩그러니 놓인 느낌이 들었다. 조금씩 그리움과 외로움이 몰려왔다. ‘난 지금 왜 여기 있지?’하는 원론적인 생각에 부딪히기 시작했다.     

  새로운 일상이 시작되었다.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어학원에 갈 준비를 했다. 6시 기상하여 씻고 주방으로 가서 프라이팬에 식빵을 앞 뒤로 돌려가며 노릇노릇하게 구웠다. 따뜻한 식방에 버터를 바르고 달걀 하나를 꺼내 계란프라이를 부쳐서 식방 사이에 넣고 케첩을 살짝 바르고 사과도 껍질째 한쪽 잘라 빵과 함께 야무지게 먹고 집을 나왔다. 7시가 조금 넘어 버스를 타면 8시도 되지 않아 학교에 도착했다. 멕시코에서는 길가에서 검지와 중지 손가락을 내어 위, 아래로 흔들면 마을버스가 멈춰 섰다. 참 재미있는 시스템이었다. 아침 시간에는 대부분 좌석에 여유가 있어서 앉아서 이 생각 저 생각하고 있자면 어느새 학교에 도착해 있었다. 어학원 정문을 지나면  정원이 나오는데 그 길을 가로질러 대학교로 통하는 문으로 들어가면 대학 교정의 넓은 잔디가 눈에 들어왔다. 대학교 교정에 있는 카페는 문을 일찍 열어서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대학교로 넘어가 커피 한 잔 마시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내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도 그 호사를 누리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향 좋은 커피를 마시고 있노라면 ‘내가 왜 이곳에 와 있나?’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하늘 위를 통과하는 비행기라도 보게 되면 외로움이 더 짙어졌다. 어느 날, 나는 시원한 바람이 부는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내 모든 기억을 하나씩 떠올려 보았다. 아주 어린 시절, 세 살 때쯤의 집 안 구조가 생각나기도 했다. 막 TV가 나올 때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갈색 나무로 된, 장 같이 보이는 가구의 문을 열면 그 안에 TV가 들어 있었다. 나는 안방 아버지 옆에 앉아 있었는데, 아버지가 TV 채널을 7번으로 돌리라고 하셨던 것 같다. 내가 무릎으로 기어가 작은 손으로 채널을 돌리려고 애쓰고 있었는데 제대로 돌리지 못하니 아버지가 내 손을 "탁!" 치며 "이렇게 해야지!... 이것도 못 해?"라고 하셨던 기억이 난다. 그때 어린 나는 그 말이 굉장히 수치스러워했던 것 같다. 그 이후에 나는 부모님 포함해서 누군가 나에게 무엇인가 주문하면 꽤나 긴장했던 것 같다. '내가 실수하는 것을 들키기 싫어 발표도 하지 않고 레크리에이션에도 참여하지 않는 이유가 아마도 이런 기억 때문일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을 한 것도 멕시코에서 아침 티 타임 때였다. 그 순간이 나를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이 되었다. 청소년학을 전공하면서 ‘에릭슨의 심리사회적 이론 중 <자율성 대 수치심> 단계에서 말하는 미해결 된 문제가 바로 이것이었나?’ 나에게 접목해 보기 시작했다. ‘내가 학창 시절 소심한 성향을 보였던 것도 이런 영향이 아니었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의 ‘촌지 사건’을 겪으면서, 본래 내가 가진 성향과는 정반대의 아이로 성장하게 되었다는 것도 깨달을 수 있었다. 내 기억에서 친구들이 사라지고 선생님들이 잊히며, 학교에서의 에피소드들이 조각조각 깨져지다시피 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공부를 하면서 깨달은 바이지만 결국 나는 매우 민간함 아이였고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아닐 일에 반응하고 방어기제를 사용하고 있었다.      

  성찰을 했다고 해서 상황이 즉시 변한 것은 아니었다. 그 당시에는 내 삶을 바꿀 능력이 없었고, 그저 내가 자라온 시간과 삶을 돌아볼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 오십이 된 나이에 그때를 돌아보면, 성찰의 시간, 다양한 경험은 나의 세계관을 형성하고 현대의 문화를 이해하며 다양성을 이해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주었으며 오늘의 내가 존재하게 된 핵심이 되는 사건이 되었다.      

  나는 은혜를 입은 사람이다. 나를 먼 곳까지 데려가신 큰아버지와 큰어머니의 사랑에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반백수로 살아가는 조카딸을 잠시 외면하지 않고, 굳이 타지까지 데려가서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게 하신 그 통찰과 사랑에 감동한다. 내가 받은 문화적 충격과 멕시코 사람들의 열정, 여유, 끊이지 않는 파티, 마야와 아즈텍의 문화와 문명은 내 가슴을 뛰게 하기에 충분했다. 귀한 귀양살이는 나를 근본적으로 발견하게 해 준 잊을 수 없는 경험의 시간이 되었다.           

- 2 -          

  영어도 못 하는 내가 스페인어를 할 리가 만무했다. “bueno dias!”가 “good morning!”이라는 것도 모르고 전날 언니가 알려주는 몇 단어, 몇 문장을 달달 외워서 어학원에 갔다. 문제는 그 말 이외에 할 줄 아는 말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누가 말이라도 시키면 어쩌지?’하는 생각으로 첫날은 나를 클래스에 밀어 넣은 사촌 언니가 그렇게 밉게 느껴졌다.      

  아침 일찍 가서 아무 자리에 앉아한 명, 두 명씩 들어오는 학생들을 살펴보았다. 하얀 피부를 가진 사람들, 아시아계, 유럽인들 다양한 사람들이 들어왔다. 한국 사람들도 꽤 있었다. 나는 쉬는 시간에도 그들과 인사를 나누지 못할 정도로 소심했다. 선생님은 “Maria Elena” 선생님으로 포근한 외모를 가진 분이셨다. 선생님은 한국어와 한국에 큰 관심을 가지고 계셔서 그랬는지 한국 학생들에게 매우 호의적이셨다. 스페인어에는 악센트가 있다. 이것을 생략하면 안 된다. Level 0 단계에서 받아쓰기 시험을 봤는데 ‘acento(아센또)’를 빼먹어서 점수가 형편없었다. 시험지를 받고 점수를 확인하는 순간 갑자기 눈물이 터져 나왔다. 다 맞았다고 생각했는데 거의 다 틀린 것이다. 마리 엘레나 선생님께 찾아가서 재시험을 보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한국 학생들은 “다음에 잘 보면 되지, 재시험을 볼 필요는 없다”라고 했고, 선생님 역시 괜찮다고 하며 다음에 잘 보라고 하셨지만, 박박 우겨 나는 결국 재시험을 봤다. 백 점 맞은 시험지를 들고 가는 발걸음은 가볍기 그지없었고 나는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교실을 나왔다. 집에 가서 복습을 하면서도 동글동글 동그라미가 그려진 시험지를 보며 나 스스로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른다. 그 경험은 ‘열심히 공부하면 잘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을 갖게 하기 충분했다. 못하는 스페인어로 어떻게든 선생님을 설득한 결과 재시험에 성공했고 그 결과 만족할 만한 성적을 낼 수 있었다. 이 사건은 ‘부끄러움은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때 느끼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준, 작지만 의미 있는 경험이 되었다. 자신감이 뒷받침되어 그랬는지 그날 이후 학교에서 보는 레벨 테스트에서 좋은 성적은 아니었지만 낙제하지 않고 통과할 수 있었다. 나와 함께 어학당을 다닌 학생들은 모두 스페인어 전공자였는데, 비전공자인 내가 그들과 같은 코스를 밟으면서 낙제하지 않았다는 것에 큰 자부심을 느꼈다. 이러한 성공 경험은 한국으로 돌아와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도 동일하게 작용했다. 최선을 다하는 자세를 유지하며, 결과에 관계없이 쉽게 주눅 들지 않게 되었다.

  외딴곳에서의 새로운 경험은 나를 조금씩 단단하게 만들었다. 남들에게 잘 못하는 것을 들키기 싫어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내가, 두려움을 극복하고 실수하더라도 도전하는 용기를 내기 시작했다. 마치 귀향 가듯 비행기를 타고 간 먼 타국에서 “잘 못해도 괜찮아”, “다시 한번 해 보자”라고 나를 다독이며, 더듬더듬 스페인어를 배워가면서 느낀 성취감과 성공 경험은 실수로부터 뻔뻔해지거나 용감해지는 방법을 터득하게 한 것 같다. 실수를 허용하고 실패를 인정하며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힘을 갖게 해 주었다.

 돌아보니 나는 귀한 귀향을 했고 그 ‘떠나보냄’ 속에 가족의 사랑과 통찰이 있었음을 다시금 깨닫는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어떤 어른으로 살아갈 것인가?’ 깊이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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