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다빈치 코드’와 그 후속 편이 ‘천사와 악마’를 다시 보면서 중세 기사단에 대해 궁금해졌다.
아니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서 인터넷 검색을 해봤다.
로도스를 여행하다 보면 중세 기사단의 숨결이 그대로 살아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영화로만 느낀 기사단의 향수를 따라가면 그 끝은 로도스에 도착한다. 그리고 몰타로 향한다.
템플 기사단
‘신전 기사단’이라고 불리기도 했던 ‘템플 기사단’이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템플 기사단은’ 1119년 예루살렘의 왕이었던 보드앵 2세가
순례자를 보호하기 기사단을 만들자고 프랑스 왕에게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1128년 수도회로서 교황의 공인을 받았다.
예루살렘의 솔로몬 신전 터를 본거지로 삼아 시리아·팔레스타인 각지에 성을 쌓고
성지 방어의 주력으로 활약했다.
기부로 받은 토지가 많았으며, 금융업으로 거액의 부를 축적했다.
‘템플 기사단’은 적십자가 있는 독특한 흰색 망토로 유명했으며 가난, 순결, 순종을 서약했다.
템플 기사단은 숙련된 기사였으며 십자군 전쟁 동안 가장 위력적인 기사단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이러한 강력한 군사력은 오히려 독이 됐다.
템플 기사단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왕권을 강화가 필요했던
프랑스 필리프 4세는 1307년 그들을 체포했다.
그리고 이단, 부패 및 기타 범죄 혐의로 기소했다.
많은 기사단 사람들이 고문을 당하고 처형당했으며, 기사단은 1312년 교황에 의해 공식적으로 해산됐다.
성 요한 기사단
‘로도스 기사단’, ‘몰타 기사단’이라고도 불리는 ‘성 요한 기사단’은 말 그대로
여전히 그리스 로도스와 몰타에서는 살아 있는 기사단이다.
템플 기사단, 튜튼기사단과 함께 중세 유럽의 3대 기사단이다.
‘구호 기사단’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십자군 전쟁 이전에는
수도회 형태로 의료 진료소를 세워서 사람들에게 봉사했기 때문이다.
상황과 지역에 따라 탄력적으로 기사단을 운영해서 여러 이름이 있다.
제1차 십자군부터 병든 이들을 간호했으면, 이에 교황 파스칼 2세는
1113년 2월 15일 칙령을 내려 예루살렘 부근에 병원을 세울 수 있도록 허가했다.
나환자 치료까지 가능한 시설을 운영하기도 했다.
동시에 요한기사단은 교황이 독자적인 수도회(修道會)로 공인했다.
요한기사단은 십자군 전쟁 시기를 거치면서 군사적 색채를 띠게 되었고
12세기 중엽 템플기사단의 전례에 따라 전투가 가능한 종교기사단으로 변화했다.
동로마 멸망 후 키프로스섬·로도스섬으로 후퇴해 오스만튀르크 해군과 끝까지 싸운 것으로 유명하다.
시오노 나나미의 책 ‘로도스섬 공방전’에 요한 기사단에 대해 자세히 묘사돼 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성 요한 기사단’은 각기 다양한 이름으로 인도주의 활동을 하고 있다.
성 요한 기사단은 흑백의 독특한 제복과 기사단의 역사와 가치를 상징하는 몰타 십자가로도 유명하다.
십자가에는 충성, 경건, 관용, 용감, 영광, 명예, 규율, 겸손 등 교단의 미덕을 나타내는
여덟 가지 요소가 있다.
독일기사단
‘독일기사단’은 ‘튜튼기사단’이라고 더 많이 알려졌다. 멋진 이름 때문에???
이 게르만 기사단은 예루살렘에 있는 독일 성모 마리아 가문의 형제 기사단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12세기 십자군 전쟁 중에 창설됐다.
처음에는 성지로 여행하는 기독교 순례자들에게 의료 및 보호를 제공하기 위해 설립되었지만,
곧 발트해 지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강력한 군사 조직으로 발전했다.
12세기 말, ‘튜튼 기사단’은 현재 폴란드 북부에 해당하는
이교도 부족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폴란드 공작 마조비아의 콘라드의 초청을 받았다.
‘튜튼 기사단’ 성공적으로 방어에 성공했고 그들의 토대가 마련됐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정복과 확장에 더 중점을 두었고
폴란드, 리투아니아, 러시아를 포함한 주변 국가와 영토 전쟁을 벌였다.
‘튜튼 기사단’의 힘과 영향력은 15세기에 쇠퇴하기 시작했고
결국 1410년 그룬발트 전투에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연합군에게 패배했다.
흑십자 휘장을 붙인 백색 망토를 입었던 이들은 의료 외에 이교도와 싸우는 임무까지 맡아
독일 황제·제후로부터 광대한 영토를 기증받았고, 검우기사단과 통합됨으로써 기반이 확고해졌다.
1809년까지 잔존한 기사단도 교회 재산 국유화로 영지가 몰수되면서 소멸되었다.
중세 독일문화의 독자적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독일을 여행하다 보면 심심찮게 ‘튜튼 기사단’의 문장을 볼 수 있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