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만남 그리고 생각

by 김혜진




가끔 보면, 하늘은 해맑은 장난꾸러기 같습니다. 요 며칠 날씨가 맑기에 문제없으리라 믿었건만, 태풍으로 비행 편이 모두 취소라고 합니다. 해외 국내 고민 끝에 여름 휴가지로 정한 제주였건만 올 해는 아니었나 봅니다.



일 년이 지났고 다시 여름이 왔습니다. 제주행 비행 편을 두 명 예약하였고 매일같이 날씨예보를 예의 주시하고 있는 중입니다. 6월, 그 어느 때보다도 초록빛이 진해지고 새하얀 뭉게구름 품은 하늘마저 사랑스러운 계절이지 말입니다. 우리가 떠나려는 날이 다가옵니다. 제주섬 동서남북 곳곳을 둘러보며 묵을 곳과 그곳만의 먹거리 정보도 여럿 찾아두었습니다. 제주에서 살고 있는 일본유학 시절 알콩달콩 함께 살았던 룸메이트도 찾아가 볼 생각입니다. 두근두근 기대치가 작년의 기억과 맞물려 배가 되었는지 혼자 있든 둘이 있든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옵니다.



웃다 보니, 어느새 김포입니다. 자그마한 캐리어 하나에 온갖 짐 모두 넣고 나니, 두 팔 자유로워 신랑의 오른쪽 팔을 두 손으로 끌어안듯 맞잡고선 팔짱을 낀 채 걸어봅니다. 맞습니다, 오늘 우리는 떠납니다. 투 스텝이 절로 나올 것만 같더니 결국 서너 번 점프점프 해 가며 투스텝을 밟아보았습니다. 몹시 부끄럽지만 기분이 좋아 어쩔 수가 없네요.



제주하늘이 살짝 어둡지만 비는 내리지 않음에 '뭐 이 정도면 괜찮지'하고 자동차 렌트 중인 남편 옆에서 머리 위를 바라다보는 순간. 뚝. 뚝. 뚝. 비가, 우리를 맞이해 주려고 내려오기 시작합니다. 아.... 비가... 내립니다. 헛웃음 두 번 나오고 이 정도 수준이면 뭐... 하며 선곡해 온 음악을 켜고 네비를 켰습니다. 도로가 숲이 울창해서인지, 운전석 남자의 옆모습이 훈훈하고도 든든해서 인지 비 내리는 제주가 그저 낭만적으로 다가옵니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맑든 흐리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는 지금 제주에 있고 우리는 한 공간에 함께하고 있는데,라는 스침의 생각이 흘러갑니다.



운치 가득한 제주길을 달려 도착한 곳. 얼마만의 만남인지 손가락을 접어가며 과거를 세어봅니다. 아르바이트로 지쳐가던 유학생활이 끝나고 직장인 명함을 얻게 된 곳에서 만난 한국인 동생, 과일을 밥보다도 좋아하던 제주토박이라던 세 살 아래 동생이자 친구를 십여년 만에 만났습니다. 프로그래머라는 타이틀을 뒤로하고, 인도 여행 이후 마당이 있는 이 층집 게스트하우스의 사장이 되었지요. 사장님이 직접 운영하는 이곳은 돌밭 옆 꽃길을 시작으로 피아노가 놓여있는 1층 카페 그리고 자그마한 로비까지 손길이 안 닿은 곳이 없더군요. 사장친구의 노고가 자랑스럽다를 넘어 뿌듯함이 밀려옵니다.



같이 한 잠깐의 시간들 속 즐거운 에피소드는 물론 옥신각신 이견을 보였던 일들도 떠오릅니다. 별 것 아닌 것들은 그저 별 것 아닌 것으로 잊힙니다. 한참을 옛이야기에 웃고 장난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술잔을 기울이며 옅어진 추억들을 소환해 이 밤 안주삼아 봅니다. 한국사람 서넛, 국적이 제각각인 캐나다 학생들까지 모두 함께 잔을 들어 위하여! 를 소리 높여 외치니 근심걱정 그것이 무엇이더라 싶어 지네요. 게스트하우스의 매력에 푹 빠져들지 말입니다.



퀘벡에서부터 시작한 배낭여행은 중국을 거쳐 한국에 다다랐다 말하는 캐나다 학생들. 중국교표 한 명, 한국교포 한 명, 캐나다 출신 한 명까지 세 명의 고등학교 친구들이 내년 대학입학을 앞두고 자신의 부모님 나라들을 둘러보고 있다 합니다. 18살의 나이입니다. 우와, 하는 탄성이 저절로 나왔네요. 각자의 특기를 살려 피아노를 연주하고, 즉석에서 시를 한편 짓고 기타를 치며 노래까지 하는 청년들입니다. 참 바르게 잘 컸다 싶으면서 '내 아들이 생긴다면 반드시 이렇게 키워보리라'하는 다짐 아닌 다짐을 하게 만드는 인상적인 모습이 오랫동안 기억 될 것만 같지 말입니다.



제주의 아침. 친구가 내려주는 은은한 향의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앞에 두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통창을 때리는 거센 빗줄기를 눈으로 감상하니 그저 멋져 보이고 이대로 쭉 머물고 싶어 집니다. 기다란 테이블 위에 제주섬 지도를 활짝 펼쳐 들고, 다음 목적지를 표시한 후 들릴만한 곳들에 커다랗게 동그라미를 하고 있는 남자가 보입니다. 커피를 살짝 입에 갖다 대더니 고개를 끄덕끄덕, 만족스러운 동선이 만들어졌나 봅니다. 이내 옆에 앉아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는 여자에게 말을 거네요.





"이십 분 즘 후에 출발할까?"


"비 내리는 모습이 예쁘지 않아?"


"오늘 계속 비 내리려나 봐."


"그래? ….비 내리는 날 커피 마시니깐 진짜 좋다. 그치?"


"(웃음) 그러게. 좋네..."





언제 그칠 줄 모르게 내리고 있는 비를 바라보며 따뜻한 커피잔을 들어 홀짝홀짝 마셔봅니다. 비가 온다 한들 여행객들은 아침부터 빠르게 움직입니다. 인형 같은 남매를 둔 프랑스 가족도 떠나고, 어젯밤 신나게 놀았던 퀘벡 친구들도 각자 커다란 배낭을 가벼이 메고 두 손 높이 흔들며 떠나갑니다. 모두를 배웅하고서야 달콤 쌉싸름 추억의 실체와도 같은 오랜 친구이자 게스트하우스의 젊은 사장님과 진한 포옹을 끝으로 차에 올라탔습니다.



네비에 다음 갈 곳을 입력하고, 음악을 켜고 운전하는 남자를 바라봅니다. 제주에 비가 옵니다, 내리는 이 비를 아무래도 오래도록 기억하고 간직할 것만 같습니다. 어쩌면 이미 짜인 운명과도 같은 이 순간을 행복이라 부르렵니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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