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가 별 겁니까
꾹.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시원섭섭이라는 단어 조합은 어디의 누가 만들어낸 것인지, 지금 상황에 더도 덜도 말고 딱 들어맞는 기분입니다. 섭섭함보다는 시원함이 앞서는, 그렇지만 그저 시원하기만 한 것은 아닌 그런 느낌 말입니다.
공부를 해서 대학을 가는 최종 목적이 취직인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회사원이 되었고 한국과 수많은 국가를 오가며 커리어라는 프라이드를 쌓아가며 일이라는 것을 하였지요. 주어진 일은 그저 일이건만 그 일이 나를 대변한다 생각했었습니다. 한순간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어 졌습니다. 고민이라는 것은 역시나 답을 품고 있나 봅니다. 밤을 지새우며 했던 고민에 마침표를 찍고 나니 별거 아니었다, 아무것도 아니었다 싶어 집니다.
4.7g - 인쇄기를 통해 나오는 A4 용지 한 장의 무게라지요. 이렇게나 가볍건만, 하는 생각에 그간의 날 새우던 시간들이 무색해지기까지 합니다. 바르게 인쇄된 사직서를 바라보다 맨 아래 밑줄란에 또박또박 이름 석자를 쓰고 사인도 마쳤습니다. 한참 바라보았습니다. 오롯이 한 길만 있는 줄 알았던 희로애락의 지난날들이 스칩니다. 그렇게 짧고도 길었던 십칠 년의 회사생활은 끝이 났습니다. 그만둠은 생각보다 간단했습니다.
일을 그만둔 가장 큰 이유. 내 아이, 우리의 아이를 갖고 싶었습니다. 마흔이 훌쩍 넘었다 하여도 건강하기에 자연스레 생겨날 줄 알았던 아기 소식이 몇 년째 조용합니다. 노산이라는 나이를 인정해야만 했습니다. 난임병원을 찾았고, 해외출장에 대한 스트레스 없이 시험관 시술에 임하고 싶었기에 하던 일도 미련 없이 그만두었습니다. 물론 어려운 현실 안에서 얼마든지 시술을 해 내는 분들도 많건만, 최대한 내 몸에 미래의 내 아기에게 집중하고 싶어 졌습니다. 선택은 내 몫임을 알기에 회사와 아이, 그 모두를 욕심내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간 쉼 없이 회사를 다니며 내 생애 가장 많은 급여를 받던 때였기에 꼬박꼬박 월급통장에 찍히던 숫자가 사라짐은 내가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반면에, 꿈에 그리던 하얀천사 '백수'가 되었지 말입니다.
갑작스레 생겨난 시간들. 스케줄에 따라 병원을 다니며 매일같이 운동하고, 백화점 문화센터 강좌도 등록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시간이 넘칩니다. 틈 없던 시간들에 여유가 생겨나니 사실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 그저, 당분간은 사모님 모드로 하루 일상을 보내보려고 합니다. 어려울 것도 복잡할 것도 없이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