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엄마에 대하여

다만 이제 내곁에 오래 머물러 주기를.

by 하늘샘

나는 엄마에 대해 잘 모른다.

그녀도 나에 대해 잘 모른다. 우리가 고작 한 집에서 산 세월은 구 년이 전부이다. 우리가 다시 만난 것은 열세 살 겨울이었다. 재회는 느닷없었고 어색했다.


사 년 만에 만난 엄마는 손님 같았다. 그녀가 다시 우리 곁을 떠나지 않도록 나는 잘 보이고 싶었다.

사랑받는 딸이 되고 싶었다.

그 이후로 매년 방학이면 엄마를 만났다. 그사이에 부모님은 법적이혼을 했다.

그리고 얼마 후 엄마의 연락이 사라졌다.




연락이 끊긴 엄마를 찾기 위해 막내 이모가 하는 미용실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내 나이 열여섯 살이었다. 이모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나를 맞이했다. 이모에게도 정확한 설명을 듣지 못했다. 엄마는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라 정도의 얘기만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곤 앞치마를 뒤적이며 만원 열 장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구걸하러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돈을 받아야 할지 잠시 고민했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 돈을 뿌리치고 나올 자신이 없었다.


나는 가난했다. 그 돈이면 한동안 교통비를 걱정하지 않을 것이고, 그 돈이면 한동안 스타킹을 열흘 동안 신고 버려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게 돈을 받아 들고, 이모의 미용실을 나왔다. 한겨울의 매서운 추위보다 내 자신이 너무 초라해 보여서 해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버스를 기다렸다. 그때의 내 모습이 이렇게 오랫동안 마음속에 각인될 줄 알았다면 아마도 그 돈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엄마는 그렇게 우리를 두 번째 버렸다.




다시 엄마에게 연락이 왔을 때는 열여덟 살의 여름이었다. 왜 그동안 연락을 하지 않았냐고 묻지 않았다. 그런 물음이 엄마를 불편하게 만들 것 같았다.

나는 여전히 사랑받는 딸이 되고 싶었다.

남동생과 함께 엄마를 만나기 위해 진주로 가는 고속버스를 타고 이모 집으로 향했다. 이모 집에서 만난 엄마는 어제 만난 사람처럼 아무렇지도 않았다.

우리 사이에 이 년의 공백은 없었다. 그날 나는 알았다. 엄마가 재혼을 했고, 그래서 이 년 동안 우리에게 연락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 사실을 듣던 순간에도 나는 내가 받을 상처보다 나보다 어린 동생이 받을 상처가 더 걱정이 되었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술에 취한 이모가 남동생을 붙잡고 울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 밤 동생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그때도 엄마에게 어떻게 우리한테 이렇게 할 수 있냐고 화를 내지 못했다. 사랑받고 싶었다. 또다시 버림받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착한 딸로 엄마와의 관계를 계속 유지했다.



대학교 4학년이 되었을 때 엄마의 두 번째 결혼은 끝이 났다. 고부갈등을 이기지 못하고 엄마는 끝끝내 이혼을 결정했다. 그 사이에 아빠는 죽었다. 이제 남은 가족이라곤 엄마와 남동생뿐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각자의 집에서 따로 살았다.


나는 뒤늦은 사춘기를 겪으며 엄마를 괴롭혔다. 이제는 버려져도 무섭지 않을 나이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더 이상 결혼은 하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하지만 엄마는 몇 년 후 세 번째 결혼을 했다.

이번에도 나는 뒤늦게 이모를 통해 알게 되었다.

이젠 내가 엄마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당신만 나를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 사이에 나는 첫 딸을 낳았다.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곁에서 보다 못한 남편이 엄마에게 연락을 했다.

아이를 낳았다는 말을 들은 엄마가 아주 오래 울었다고 전해주었다. 그 말에 약해져서일까 아니면, 엄마가 그리워서일까.

우린 다시 만났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아직까지 엄마는 세 번째 결혼을 잘 유지하고 있다.

그리곤 표면적으로 평범한 모녀처럼 잘 지내고 있다.




자기 자신밖에 모르던 엄마가 변한 것은 내가 암에 걸리고 나서부터였다. 갑상선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안 이후로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아마도 엄마는 내가 자신보다 먼저 죽을 수 있다는 공포를 또다시 느꼈을 것이다. 나에게 오빠인 엄마의 첫 번째 아이는 교통사고로 두살의 나이로 죽었다. 아빠가 일하던 벽돌공장에서 덤프트럭에 치여 죽었다. 아이가 낮잠을 자던 사이 엄마는 빨래를 하러 나갔다. 잠에서 깬 오빠가 엄마를 찾으러 나갔다가 사고가 났고, 엄마는 평생 자식을 죽인 여자가 되어버렸다.

한 번도 우리에게 오빠의 이야기를 한 적은 없었다. 엄마에게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었고, 그걸 들추어내는 건 결국 우리 가족의 비극을 상기시키는 것이니까.




얼마 전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냐고.

엄마는 아빠와 오빠와 함께 서울에서 살던 이 년이 엄마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라고 말했다.

한 직장에 오래 다니지 못하는 아빠가 친구의 꼬드김에 넘어가, 서울로 가자고 했지만, 직장을 소개해주겠다는 아빠의 친구는 그곳에 없었다. 갖은 고생 끝에 서울 변두리 벽돌공장에 취직을 하게 되었다고.

일명 보루코라 불리는 벽돌을 지게차에 실어주는 일을 했는데, 몸은 힘들었지만 사택이 제공되고, 근처에 사람도 많이 살지 않아 아빠가 좋아하는 술을 먹을 곳도 술친구도 없었다고. 아빠는 다른 곳으로 가자고 엄마를 졸랐지만, 엄마는 그곳이 좋았다고 했다.

몸은 고되지만 제공되는 집에서 따뜻하게 잘 수 있었고, 아빠가 술을 먹지 않으니 돈이 모였다고.

오로지 그곳에서 아빠, 엄마, 오빠 밖에 없었기에 남들 눈치 보지 않아서 좋았다고.


엄마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그 시절을 엄마는 환한 눈밭으로 기억했다. 경남 고성출신인 엄마가 펑펑 내리는 눈을 처음 본 곳이었고. 하얀 눈밭에서 깔깔거리며 아이와 놀아본 것도 처음이라고 했다.

하얀 눈밭에 발자국이라곤 엄마와 아빠와 오빠밖에 없었다고 담담히 이야기하는 엄마를 바라보며 나는 여전히 엄마에 대해서 모르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소원이 평범한 전업주부가 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엄마, 다음 생애는 우리에게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엄마, 아직까지 자기 인생에서 가장 잘못한 일은 우리를 두고 집을 나간 거라고 사과하는 엄마 그런 그녀가 더 이상 많이 밉지 않다.

다만 부디 오래오래 내 곁에 머물러 주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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