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인표오빠에게 2

나의 첫 스타에게

by 하늘샘

2025년 9월 30일 화요일.

나는 평생 이 날을 기억할 것이다.



구청의 숙직은 몇 개월에 한 번씩 돌아온다.

저녁 6시부터 다음날 오전 9시까지, 3인 1조로 숙직근무를 한다. 몇 달 전, 함께 숙직근무를 한 A주무관과 이번에도 같이 근무하게 되었다.

그녀는 차인표가 쓴 소설을 읽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차인표 오빠의 책을 읽고 있는 모습에 내 인생 첫 스타는 차인표였다고 고백했다.

1994년 <사랑을 그대 품 안에>를 아느냐고 12살 소녀처럼 들떠서 눈을 반짝였다. 언니는 나에게 구청프로그램 중 작가를 초대하는 초청강연에 차인표가 온다고 알려주었다. 나는 행여나 까먹을까 봐 핸드폰 달력에 표시를 하고, 알람까지 맞춰놓고, 강연신청을 했다.




토요일마다 하는 글쓰기 수업에도 차인표 작가가 우리 구청에 강연하러 온다는 소식을 전했다. 선생님은 장난처럼, 내가 브런치에 쓴 글을 그에게 보내보라고 했다. 그래볼까요.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 한 마디가 한 달이나 마음속에 거스러미로 남았다. 날짜가 다가올수록 마음이 이랬다 저랬다 했다. 수많은 팬 중에 한 명일 뿐이고, 그 시절 ‘사랑을 그대 품 안에’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조용히 강연만 들어야지, 30년 만에 드디어 실물영접이라니 그것만으로 충분해.

그리고 대망의 강연 전 날. 그날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다. 긴 추석연휴를 앞두고 업무가 많아, 너무 바쁜 나머지 이성을 잃었던 게 분명했다. 내 브런치에 올린 ‘차인표오빠에게’ 글의 링크를 달아 인스타 디엠을 보냈다. 진주처럼 백화점이 되고 싶었지만, 공무원이 되었고 작가의 꿈도 현재 진행형이며, 내일 열심히 강연을 듣겠다는 내용이었다.

그 밤 이불 킥을 하며 혼자 부끄러워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디엠을 보낼 것인가, 그러니 나의 디엠은 백사장 모래알처럼 묻힐 것이다. 겨우 그 정도로 마음을 정리하고 잠이 들었다.



강연 날, 나는 제2차 민생 회복 쿠폰 업무를 지원하느라, 구청 대신 동 주민센터로 출근했다. 정신없이 업무를 배우고 신청접수를 받았다. 오전 9시 30분쯤 겨우 짬이 생겨 핸드폰을 확인했다. A주무관의 메시지가 있었다. 전화 달라는 메시지에, 업무상 무슨 일 생겼다고 생각했다.

- 언니, 무슨 일 있어요?

- 하늘 씨, 차인표 아나?

- 알죠.

- 차인표도 하늘 씨를 아나?

- 차인표가 저를 어떻게 알아요.

- 차인표도 모르는데, 차인표 매니저 전화번호 아나?

- 제가 차인표 매니저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겠어요.

- 그런데 왜 차인표 매니저가 하늘 씨를 찾지?

- 네…? 그게 무슨….

- 아니, 차인표 매니저가 전화 와서 우리 구청에 S이라는 직원이 있냐고 물어보던데.

무슨 디엠이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아, 디엠. 디엠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깨닫자, 늦여름에 한기가 돋았다.


- 아… 그게 제가 어제 뭘 좀 보냈는데, 설마 그걸 읽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고….


심장이 쿵쾅거리고 머릿속이 뒤죽박죽 되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인스타 디엠에 내 이름은 안 밝혔는데, 브런치 글에도 내 이름은 없는데, 근데 어떻게 내 이름을 알지. 의문은 곧 풀렸다. 내 인스타는 페이스북과 연동되어 있었다.

나는 A주무관에게 조용히 강연만 듣겠으니, 혹여 강연 중에 내 이름을 밝히지 말아 달라는 헛소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내 글이 알려지는 게 두려웠다. 그러나 나는 이 영화 같은 일을 곧 글쓰기 단톡방에 올렸다. 모두 흥분하며 축하해 주었다. 하루 종일 정신없는 와중에도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후회했다. 나라고 밝히고 사인이라도 받을 걸 그랬나. 내가 왜 밝히지 말아 달라고 했지, 지금이라도 말을 바꿀까, 그러나 용기가 나지 않았다.



강연 시작은 저녁 7시. 구청에 도착하자마자 목욕재계하는 마음으로 양치를 했다. 나의 우주 대스타 차인표 오빠를 만나는데 입 냄새를 풍길 수는 없었다. 립스틱도 바르고 얼굴에 분도 두드리고, 머리도 빗었는데도 하루 종일 일에 찌든 내 모양새가 썩 좋지 않았다.

구청 1층 대강당에 15분 일찍 도착했다. 주관부서 직원이 가져온 책을 데스크에 맡기면 작가님의 사인을 받아서 강연이 끝나면 돌려준다고 했다. 번호표를 받고 책을 맡긴 후 자리에 앉았다. 앞줄은 이미 다 차서, 거의 뒤쪽에 겨우 구겨져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자꾸 심장이 쿵쿵 뛰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려 애를 썼다. 청장님 인사말씀, 의장님 인사말씀, 인사말씀, 인사말씀 끝에 드디어, 우주, 대, 스타, 차인표 오빠가 핑크와이셔츠를 입고 등장했다.

그를 알게 된 지 30년. 30년 전 나는 실물영접을 하게 될 줄 알았을까. 나는 도리 없이 12살 소녀가 되어 있었다. 나의 차인표 오빠는 여전히 멋있었다. 강연도 잘했다. 소설도 잘 쓰고, 강연도 잘하고, 잘생겼고, 그를 추앙한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나의 첫 스타 차인표 오빠가 어떻게 미국에 가게 되었는지, 미국에서 돌아와 어떻게 배우의 길에 들어섰는지. 나는 이미 다 알고 있지만, 그의 음성으로는 처음 들었다. 그리고 ‘사랑을 그대 품 안에’ 주연을 맡기까지의 이야기. 그러다 차인표 오빠는 대중문화는 그저 소비하고 흘러가면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제 오후에 한통의 디엠을 받고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고 했다. 설마 내 이야기인가. 무릎에 얹은 손등이 벌벌 떨렸다. 나는 대책 없이 심장이 떨리며 눈물이 났다. 지난하게 살던 12살 소녀가 드라마로 힘을 얻었다는 이야기, 비록 백화점 직원이 되지 못했지만 작가의 꿈을 꾸고 있다는, 어른이 된 그 소녀에게 전할 말이 있다며, 1분만 시간을 달라고 했다, 나는 어느새 12살 때 살던 마당에 서있었다.

S님. 님의 진솔한 글로 인간은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며 살아갈 힘을 주고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새삼 떠올리게 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작가의 꿈을 꾸고 계시다고 했는데, S님의 글을 읽어보니까 꿈을 반드시 이루시게 될 거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보다 훨씬 더 글을 잘 쓰십니다. 자신의 상황과 내면의 감정을 군더더기 없이 표현하는 실력도 훌륭하시고, 글을 통해서 타인의 마음을 움직이는 특별한 재능을 갖고 계세요. 이런 재능을 그냥 묻어두는 것은 낭비이자 죄입니다. 반드시 출판 작가가 되시기를 권유하면서,

저도 지켜보겠습니다. 님이 출판하시면, 첫 추천사는 꼭 제가 쓰도록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계절은 바뀌었고, 드라마도 끝났다. 아빠는 여전히 부재중. 늦은 밤, 어디선가 드라마 주제곡이 들렸다. 어디서 들리는 거지. 나는 희미한 소리를 따라 마당으로 나왔다. 보름달이 밝았다. 마당이 훤했다. 나는 마당에 서서 소머즈처럼 귀를 기울었다. 건너편 이층 양옥집에 사는 고등학생 오빠의 방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아빠친구 아들인 그 오빠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드라마 메인테마곡인 ‘사랑을 그대 품 안에’ 최진영이 노래했다. 종영한 드라마는 다시 보기 힘들었다. 지금처럼 OTT서비스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지역유선방송에서 재방송을 해주지 않는 이상은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기약이 없었다. 시골장터는 5일에 한 번씩 열리는데, 용돈을 알뜰히 모아야 드라마 OST가 담긴 카세트테이프를 오일장에서 살 수 있었다. 아직 돈을 다 모으지 못한 12살은 새까만 마당에 서서 은은한 달빛을 타고 흐르는 사랑 노래를 들었다.

이제야 비로소 안길 곳을 찾았으니, 너에게 내 사랑 바칠 거야.

너에게 모든 걸. 내 모든 걸 그대 품 안에.

온 세상 향해서 말할 거야. 그 어떤 시련들도 우리의 시간 막을 수 없다고.

자, 이제 일어나. 바로 지금.


진주와 강풍호 이사님은 행복하게 잘 살고 있겠지. 서울에 사는 차인표 오빠도 잘 살고 있겠지. 얼른 어른이 되어서 서울에 가야지. 그래서 차인표 오빠를 만나야지. 그러니 오늘 하루도 잘 버티고, 내일도 잘 버티고, 아빠가 늦게 들어와도 잘 버티고, 아빠가 며칠씩 집을 비워도 무서워하지 말고 잘 버텨야지. 그래야지. 그래야지. 그 밤, 나는 세상을 다 덮을 것처럼 커다란 달 아래 서 있었다.

내 옆에 차인표 오빠가 있는 것 같았고, 지금 내 눈앞에 그가 있었다. 구청 1층 대강당 뒷자리에서 나는 주체할 수없이 엉엉 울어버렸다. 잘 살아내었다. 죽지 않고 살아 있어서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잘 살아내었다. 잘 살아내었다. 차인표 오빠가 그렇게 말해 주었다.



강연이 끝나면, 나는 조용히 책을 찾아서 돌아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데스크에 맡겨진 내 책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퇴장 때, 한꺼번에 입구 쪽에 몰린 사람들로 천천히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던 나의 잘못인가. 그새 누군가 책을 가져가 버린 것이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강당을 서성거렸다.

책을 도둑맞았다는 걸 아는 직원이 나를 차인표 오빠에게 데려다주었다. 기차시간이 임박해서, 정신없는 와중에도 그는 사인을 해주었다. 강연 홍보 전단지에 내 이름을 받아 적던 오빠가 문득 나를 쳐다보았다.

-아 S○○씨, 책에 적어놓았는데….

- 책을 누가 가져갔어요. 정말 제 책이 나오면 추천사….


헛소리 그만해. 마음의 소리에 다급히 입을 막았다. 지금 꼴이 말이 아닌데. 기름에 찌든 앞머리며, 코 옆에 난 여드름이며, 이런 모습으로 만나고 싶지 않았는데, 나는 황급히 몸을 돌렸다.

그런데 갑자기 옆에 있던 어떤 남성분이,


- 아, 그 S 양이시군요. 혹시 책 출간 계획이 있어요?

- 네, 아니. 저 그러니까. 저는 그런 생각을….


내가 횡설수설하는 동안 오빠의 매니저는 명함을 건넸다. 자신에게 연락하면 바로 연결이 될 거라고.

나는 사무실로 돌아와 멍하게 차인표 오빠가 해준 이야기를 떠올렸다.

죽지 않고 살아내길 잘했다. 잘했다. 정말 그랬다.


to. 차인표 오빠에게

그날은 너무 떨려서 눈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지만, 나의 첫 스타. 강풍호 이사님이었던 차인표 오빠, 언젠가 우리가 같은 별을 바라보며, 그들의 하루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더 푸르고 깊은 바다로 나가 인어의 풀피리 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많은 소설을 기다릴게요. 백화점 직원을 꿈꾸던 12살 소녀는 이제 더 이상 외롭지 않습니다.

저의 12살을 따뜻한 기억으로 만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from. 오랜 팬 S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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