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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 Nov 18. 2024

편지

- 열일곱 때, 미대 입시하던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그마저도 향유하지 못해서 나는 한참을 울었습니다. 마음을 달래는 일이 글로써 충분하다고 생각했을 때, 난 당신의 모든 순간을 제 좁은 어휘력에 다 담아 내려 했습니다. 어느 날은 미소였는지, 또 어느 날은 눈물이었는지. 이제는 흐릿해져만 가는 제 단어와 문장들을 아직 기억하시나요. 뜨겁게 달아오르지 못한 저를 용서하세요. 미안합니다. 나를 다 내다바치기에 그대는 너무 미지근한 사람입니다. 냉점과 온점의 중간이 없어 항상 극도의 온도를 달리는 나는 당신 옆에만 가면 자꾸 식어 갔습니다. 뭐랄까. 자극이 없었달 까요. 당신보다 글이 좋아서 미안합니다. 책 냄새가 좋아서 죄송합니다. 누구를 옆에 끼워 붙여 봐도 혼자가 편한 건 유감입니다. 여럿을 눈에 담는 게 편한 저는 오늘도 고고히 누군가를 사랑할 준비를 한답니다.


  그리고 제 글을 사랑해주시는 당신들은 가여워질 준비를 하십시오. 제가 펜을 잡을 땐 무언가 허기가 져서 발악을 하는 거랍니다. 아무리 채워도 배가 계속 고파서 뭐라도 사랑할 준비를 하는 거랍니다. 나를 표현해내는 게 아니라 배출해내는 까닭입니다. 머리에 생각이 너무 많아서, 그걸 없애버릴 수단으로 글을, 방법으로 쓰는 걸 선택한 겁니다. 모두가 날 사랑해줬으면 하는 욕심과 아무도 날 몰랐으면 하는 바람에, 모순적인 온도와 역설적인 시샘에, 감정에 목을 매달고, 이명이 들릴 때까지 숨을 참고, 눈은 멀겋게 충혈되고, 칼질한 피부는 균열되고, 틈 사이로 손목은 피를 내뿜고, 죽고 죽이고, 하얀 안개가 불빛이 아닌 시체를 태우는 연기라는 걸 깨닫고. 그런 못된 생각들을 배출하려 오늘도 글을 씁니다. 펜의 잉크를 체온으로 다 달굴 때쯤, 눈 뜬 그 곳은 천국이길 바라며.


  뜨다 만 구름은 뭉게뭉게, 몽실몽실, 그런 시답잖은 표현 말고, 네 피부를 닮았어. 참 하얗고 예뻤는데 또 누구의 손에 어떻게 타락할까. 너랑 질릴 때까지 주고받은 편지는 내 유언장이 됐고, 이제 내 얘긴 전하지도 못해, 닿지도 못해, 쓰지도 못해, 새기지도 못해. 나 맞은 데가 너무 아파. 너 이러면 항상 와줬잖아. 내가 못되게 굴어도 어차피 계속 나 좋아할거잖아. 그랬잖아 예전엔.


  내가 사랑하는 말과 글이 널 너무 아프게 했다. 차라리 좋아하지나 말걸. 청춘의 푸를 청 자가 시들어갈 일만 남았는데.


  집 주소를 다 꿰뚫어도 닿지 못할 편지. 번호를 다 외워도 전송 못할 몇 백자. 사랑했어.






  도대체 어떤 사랑을 했던 거고,, 다시 쓰라 하면 못 쓸 것 같다

좀 오글거리긴 한데

난 여전히 그때의 우리가 아니라 그때의 나를 추억한다는 점에서 이기적인 사람임을 확신하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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