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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 Nov 17. 2024

케이트 선생님

- 나의 첫사랑 앤

 난 용서가 너무 쉬워서 그런가. 화가 잘 안 난다. 화를 잘 못 낸다. 내게 상처 준 사람이 완전 악인이 아니란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더 그렇다. 순간 나오는 악함을 받아줄 수 있다. 그게 본인의 감정 기복 때문이든, 아니면 정말 내가 싫어졌든 간에. 나는 그게 편하다. 한 번의 다정함이 짙으면 열 번의 못 박음 정도야 견딜 수 있는 거다.


 케이트 선생님은 내 첫사랑이다. 중학교 2학년이 되는 겨울, 영어학원에서 처음 만났다. 내가 진로가 바뀌었단 핑계로 학원을 그만두기까지 총 육 년을 함께 보냈다. 선생님의 첫 인상은 흐릿하고 현 인상은 사근하다. 첫 인상과 현 인상 사이의 기간 동안은 다정했다. 선생님처럼 소녀 감성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없을 거다. 나도 꽃을 참 좋아하지만 선생님은 더 했다. 선생님의 최애 애니메이션은 빨간 머리 앤이랬다. 그래서 손거울에도, 노트북 덮개에도, 심지어 피부 미스트에도 빨간 머리 앤 스티커를 붙이고 다녔다. 옷도 꼭 본인 같은 것만, 치렁치렁하고 샤랄라한 것만 입고 다녔다. 그때 내 성격에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욕을 했을 게 뻔하다. 나잇값 못한다며 속으로 욕을 씹었을 거다. 그런데 케이트 선생님이었기에, 그 여자에 그 성격이었기에 모든 게 이해됐다. 선생님은 내게 엄마 같은 존재였다. 실제로 내 엄마가 됐으면 했다. 선생님이 제 엄마였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말한 적도 있다. 우리가 알고 지낸지 사 년쯤 됐을 때였다.

 그 반에서 내가 선생님이랑 제일 친했다. 오래 보기도 했고 내가 워낙 선생님을 잘 따랐다. 학원에 공부를 하러 간 게 아니라 선생님과 친목 질을 하러 갔다. 다리 꼬고 간식만 먹다 온 날도 있었고, 화장하다가 혼난 날도 있었다. 내 장이 약한 걸 알고 매일 알로에를 사가지고 와줬고, 처음으로 가정사를 고백한 날 무시도 받았다. 그 많고 많은 일화들을 다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상처는 다정함에 의해 옅어졌다. 선생님에 대한 기억을 좋게 남기고 싶다면, 내가 받은 상처는 다 지워야만 했다. 그래야 케이트는 내게 선인이다. 내 첫사랑으로 남을 수 있다. 내가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다고 느낀 건, 그 사람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 첫사랑은 짝사랑으로 끝난 듯하다. 내 마음이 더 컸다. 선생과 제자라면 당연히 학생의 마음이 더 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학교가 아니라 학원이라면, 당신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사람이니깐.


 가장 설렜던 건, 어느 날 새벽에 걸려온 답신 전화였다. 불면증 때문에 뒤척이고 있었다. 하릴 없이 휴대폰 연락처나 들쑤시고 있었는데 하필 잘못 누른 게 선생님 번호였다. 나는 놀라서 전화를 바로 끊었다. 그리고 잘못 건 전화라고, 밤늦게 죄송하다고, 어떤 변명을 해야될 지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그런데 선생님한테서 바로 카톡이 왔다. 혹시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이 새벽에 걱정돼서. 나는 미리보기로 뜬 선생님의 연락을 보고도 답하지 못했다. 내가 정말 듣고 싶었던 말인데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혹시 무슨 일 있니? 그 말이 참 듣고 싶었다. 내가 먼저 내 상태를 호소하거나 변명하기 전에 누가 날 걱정해주길 바랐다. 간만에 들어보는 다정함과 걱정이었다. 잘못 눌렀어요, 죄송해요. 울고 있는 이모티콘 여러 개를 같이 붙여서 보냈다. 선생님은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전화하라고 말했다. 말하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말하지 못했다. 별 일 없다는 게 최선이었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선생님이 다음 날 밤에 전화가 왔다. 울 것 같았다.


 우리의 애정 전선이 같은 신호로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숨겼던 진심을 처음으로 토로했다. 선생님이 나 보고 늘 생글생글 웃는다고, 조금의 빈정이 섞인 칭찬을 했기 때문이다. 딴 애들은 눈이 다 퀭한데, 너만 너무 산뜻하다. 그날따라 유난히 그 말이 거슬렸다. 아마 전 날 엄마한테 욕을 먹었을 거다. 그래서 나름 연기하고 있던 건데 거기 비수를 꽂아버렸다. 전화로는 말하지 못했던 진심을 그때 처음 얘기했다. 영어가 어려워요 같은 찡찡거림 말고, 정말 삶이 어려워요 고백했다. 그런데 내 상처가 너무 과소평가됐다. 내가 예민한 거라는 답이 돌아왔다. 빙빙 돌리지 말고 직설적으로 말할 걸 그랬다. 몸에 든 멍이라도 보여줬어야 됐나. 풀이 죽어서 다신 입을 열지 않았다. 그게 내 첫사랑의 끝이다.


 나는 선생님의 본명도 모른다. 선생님이 알려준 적도 없고, 내가 물어본 적도 없다. 카톡 이름도 Kate 라고 저장돼 있다. 내가 수시 떨어진 걸 알고 케이트는 바로 연락을 했다. 내게 도움이 될 만한 문제집과 공부 방법을 마구 퍼부었다. 나는 건성으로 네네, 대답했다. 공부할 마음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마음에 주워 담은 건 선생님이 준 위로나 걱정뿐이었다. 선생님이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게 좋았다. 이건 나만 받은 특급 다정함이다. 머리 잘랐다고 자랑하면 결이 좋은 내 머리카락을 계속 만져댔다. 염색약을 같이 고민해줬고, 졸업 사진 컨셉도 추천해줬다. 선생님은 나를 보면 왠지 마틸다가 생각난다고 했다. 하얗고 말랐는데 단발이어서. 보이는 외모가 그렇다는 게 다였다. 나는 선생님의 외모와 성격, 취향, 모든 걸 고려해서 앤을 떠올린 건데. 아직도 앤을 보면 선생님의 말투가 생각난다. 내 사랑도 참 지독하다. 아저씨가 편하다지만 나는 늘 아줌마한테 마음을 기대고 있다. 내 외사랑이 언제 끝날 진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내가 엄마라고 부르고 싶은 사람은 케이트 선생님뿐이란 거다. 카톡에 사랑해요를 남발했었는데, 그 말들이 진심이었단 걸 믿어줬으면 좋겠다. 나는 언제나 선생님을 용서할 준비가 돼 있으니깐.



그래도 선생님에겐 늘 예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대가리 꽃밭이라도 해도 뭐 어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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