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배경화면

뿌연 필터

by 백목이

이 글을 쓰는 날 기준으로 어제와 오늘, 되게 알차게(?) 보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드디어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소모임에도 가입하게 되었고, 글을 쓰는 모임인 만큼 참 좋은, 내 심금을 울리는 글을 쓰는 사람도 발견한 하루였다.

이번 글의 주제는 ‘나 자신을 색깔로 비유한다면?’이었는데, 어떤 사람이 자신은 ‘유리색’이라고 표현한 글이 있었다. 그 글을 읽으면서, 나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글을 만났다. 나는 대개 글을 이과적으로(?) 설명한다. 생각을 표현할 때, 논리로 증명하는 식이다.

예를 들어 기쁨과 슬픔이 있다고 치자. 나의 기쁨은 ‘편안한 상태’에서 나온다. 그러면 편안한 상태가 아니라면 기쁘지 않은 상태다. 고로 나는 슬픈 상태다. 이런 식으로 증명하고 있다. 참 재미없지 않은가?

그런데 이 사람은 전혀 다르게,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어떤 표현 하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런 글이 참 좋았다.


나는 이병률 시인을 참 좋아한다. 처음 시인의 책을 읽기 시작한 이유는, 서점에서 눈에 띄는 시집 한 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이라는 시집이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걸 가장 먼저 읽은 건 아니다.

우선 나는 그 책을 사기 전에 ‘밀리의 서재’라는 앱에서 시집이 있는지 찾아봤다. 그런데 시집은 없고, 에세이 형식의 책이 몇 권 있었다. 그중에 나는 『그리고 행복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라는 책을 골라 읽었다. 시인의 여행기와 일상에서 느낀 것들을 적은 산문집이었는데, 표현들이 따뜻하고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들었다. 나도 그런 생각에 도달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하는 책이었다.

나는 좋은 책은 항상 종이책으로 소장하는 취미가 있다. 다시 읽는 책도 많지만, 대개는 잘 안 읽는다. 하지만 그 책의 표지를 보고 내용을 한 번 훑어볼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어떤 내용이었는지, 어떤 느낌이었는지 나를 스쳐간다. 그 느낌이 좋아서 아직도 종이책을 좋아한다.

그렇게 좋아하는 것을 채워 가면서, 나는 나를 채워 가고 있다고 믿었다. 좋아하는 것을 보고, 하나씩 소장하고, 느끼고, 감명받고. 하지만 항상 어딘가가 비어 있었다.


고등학교 친구들과 오랜만에 여행을 갔다. 친구 한 명이 미국에서 들어온 기념으로 다 같이 뭉쳤다. 술도 마시고 친구의 여자친구도 소개받고, 알차게 1박 2일을 보냈다. 그 순간만큼은 즐거웠고, 다 채워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었다. 그렇게 하루를 가득 채우는 날에도, 가끔은 공허했다. 쉴 틈 없이 놀고, 이야기하고, 술을 마셔도 어딘가는 비어 있었다. 신기하기도 했고, 두려웠다. ‘언제까지 이 공허한 느낌을 받아야 하지? 예전엔 이런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친구들이랑 놀면 정신없이 놀았는데, 빈 느낌 같은 건 받은 적이 없는데.’ 그런 생각을 했다.

결국 내 빈 느낌은, 그 사람이 나간 자리였다. 원래는 채워지지 않아도 내 스스로가 알아서 채우던, 의식하지도 않았던 공간. 그런데 어느 순간 누가 들어왔다 나가면서, 내가 그 공간을 스스로 채우는 법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아니, 잃어버렸다기보단, 그 작은 공간에 누가 들어왔다가 나가서, 그 공간이 커져버렸다고 말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그 공간은 예전처럼은 채워지지 않는다. 그런데 확실한 건, 그 시간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는 거다.

가끔은 그 줄어드는 게 무섭기도 하다. 후회하면 돌아온다던 그 사람이 언젠가 다시 돌아올 공간은 만들어놔야 하는데, 완전히 닫힐까 봐. 사실 그 공간이 좁아지고, 그 사람이 들어올 수조차 없게 되어야 내가 편해지는 건데. 난 내가 편해지는 그 감각이 무서웠다. 그래서 편해지기 싫은 것 같다.


편한 상태는 참 좋은 건데. 딱, 편해지고 싶은데. 편해지는 게 무서워서, 스스로가 편해지는 걸 거부하고 있는 것 같다. 지금 상태는 그게 맞는 것 같다. 편해지기 싫다.


나는 ‘행복 = 편안함’, ‘슬픔 = 괴로움’이라고 정의한다. 그래서 지금은 편해지는 걸 거부하니까, 나는 행복한 게 아니고, 결국 슬픈 거고, 괴로운 상태인 것 같다. 내 스스로 이렇게 사는 게 참 미련한 짓이라는 걸 아는데, 지금은 ‘편한 게 두려운 괴로움’이 되어버려서, 이도 저도 아닌 상태가 되어버린 것 같다.


나만의 ‘행복’과 ‘슬픔’의 정의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지금도, 나는 행복과 슬픔의 경계선에 서 있는 것 같다. 행복해지고 싶지만, 행복해지는 게 무서운 그런 상태.


아직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여러분들에게 털어놓을 수 있는, 그런 글인 것 같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아무렇지 않게 털어놓을 수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정제되지 않은 내 감정을 적는 것이 좋다. 진짜 나를 속이면 안 되니까. 속이고 속이다가 결국엔 글을 써서 토해낸다.


눈이 나쁜 게 싫었다. 남들처럼 안경 안 쓰고 살고 싶었다. 그런데 요즘은 눈 나쁜 게 나름 나쁘지 않다고 느낀다. 초점 없는 시야가 나쁘지 않다. 앞에 있는 피사체가 보일락 말락 하는 이 시야가, 나쁘지 않다.

사진도 나는 노이즈가 끼거나, 시야가 흐려진 사진을 좋아한다. 예전엔 선명한 사진을 좋아했던 것 같은데. 내가 흐려져서 그런가, 흐린 세상에 동화되고 싶다. 흐릿하게 살고 싶다. 기억도 흐릿하게, 삶도 흐릿하게. 사라질 듯 말 듯. 그렇게 사는 게 좋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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