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가까운 나의 닥터 페퍼 사랑이 드디어 결실을 맺었다. 닥터페퍼가부동의 펩시를 제치고 2위에 올라섰다. 내가 어렸을 때는 닥터페퍼가 국내에서 생산도 수입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미군부대에서 암시장으로 나오는 것밖에 없었다. 난 왠지 처음부터 닥터페퍼가 좋았다. 콜라나 사이다는 마시지 않았는데 닥터페퍼는 찾아서 마셨다. 그러나 좋아하는 인구가 많지 않았기에 한국에서 닥터페퍼를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남대문 시장 지하에 가야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귀하신 그리고 럭셔리한 페퍼 님을 영접할 수 있었다. 사실 1885년에 만들어진 음료가 140년 가까이 장수한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사라지지 않고 뒷심을 발휘해 2위를 쟁탈해 버렸다는 게 더 놀랍다. 그러고 보니 닥터 페퍼와 관련한 오래된 추억이 떠오른다.
직장을 다니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일이다.
성북동 대 저택에서의 나 홀로 일주일 그때 난 닥터페퍼를 무한 영접했다. 그 저택엔 닥스 훈트 강아지 한 마리도 있었다. 그리고 그 개가 내가 그 집에 거하는 이유였고 닥터페퍼가 그곳에 머문 이유였다.. 추석이 끼어 있었지만 집요하게 왜 시집 안 가냐고 물어보는 친척들도 피하고 내 평생에 한번 살아볼 수나 있을지 모르는 성북동 대 저택에서의 일주일은 치명적 매력이 있었다. 지금도 성북동은 기업 회장님 집으로 유명하지만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이제 갓 사회생활을 시작하던 그 시절엔 정말 어마 무시한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족히 천평이 될만한 넓은 땅에 잘 가꿔진 정원, 굳이 높은 담장이 필요 없는 완벽한 경비 시스템, 황홀하리만큼 아름다운 조깅로에 밤이면 펼쳐지는 언덕 위 저택에서 바라보는 화려한 불빛 풍경화, 자가용 없이 접근이 불리한 로케이션! 난 그곳에서 혼자만의 럭셔리를 즐겼다.
시작은 이랬다. 한 외국계 증권사의 사장 비서로 일하는 친구가 한 일주일 동안 사장 가족이 이태리 집에 다녀와야 하는데 키우는 개가 폐쇄공포증이 있어서 비행기를 못타 함께 못 가니 집에 있으면서 개 산책시키고 함께 있어줄 사람 찾는데 어디 없겠냐는 것이다. 내가 하겠다고 했다. 이것저것 따진 게 아니라 그때는 친척들 눈을 피하고 싶었다. 그렇게 난 수백 평 대저택에서 일주일간 개와 동거했다. 조건은 단 하나였다. 귀하신 닥스 훈트님의 원활한 대소변을 위해 하루 두 번 산책이 조건이었다. 냉장고 속 모든 식음료 다 먹어도 되고 두고 간 차 사용해도 되며잠을 자고 되고 그냥 왔다 갔다 해도 된다는 조건이었다. 사실 난 냉장고 가득한 닥터 페퍼와 와인에 더 행복했다. 대저택에서 낯에는 닥터 페퍼 밤에는 야경과 함께하는 와인 그거면 족했다.
사실 이리 변화 없는 지리멸렬한 매일의 삶에 끝은 있을까 싶을 때가 종종 있다. 날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뻔한 하루하루가 지친다. 물론 아주 작은 보람이라는 것도 있지만 어차피 한번 사는 인생 보란 듯이 멋진 집에도 한번 살아보고 멋진 차도 몰고 싶고 멋진 별장도 가지고 싶은 게 보통 사람들의 심정일 것이다. 그냥 길기만 긴 삶이 아니라 온 세상 스포트라이트가 한꺼번에 다 비추는듯한 찬란한 순간의 삶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난 닥터 페퍼의 선전이 찬란한 순간 없이 묵묵히 이 길고 긴 무료한 삶을 이어가는 모든 이들에게 응원이 되길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