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25년 7월 14일) 존경하는 옛 회사 선배와 거나하게 술 한잔 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특종 기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특종이라.
삼류 기자였지만, 저 역시 특종에 목매고 일했습니다. 특종을 보도한 바로 그 날, 해당 기사와 관련한 정책이나 사건으로 기자 설명회를 관계 부처에서 할 때 타사 기자들에게 짐짓 미안한 표정으로 회견장에 들어서지만, 속내는 쾌감 그 자체였지요. 어쩌면 그 맛에 기자를 했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덕분에 조선일보를 퇴사할 때 ‘역대 조선일보 기자 중 사내 특종상을 많이 수상한 10인’ 안에 포함됐습니다.
한데, 기자를 하면서 ‘특종’에 대한 생각이 조금씩 바뀌더군요. 특종이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특종 기사의 본질이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 같은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지요.
총리나 각 부처 장관이 누가 되느냐를 놓고 각 언론사는 치열한 기사 경쟁을 합니다. 많이 맞힌 언론사는 영향력이 높다는 평가를 받지요.
하지만 그 기사가 갖는 진정한 영향력은 뭘까요? 총리나 장관이 누가 되는가를 다른 언론사에 비해 몇 시간, 혹은 며칠 앞서서 보도하는 게 과연 본질적으로 이 나라를 바꾸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 걸까요?
제 경우, ‘어떤 문화재가 국보로 승격된다’는 기사로 특종상을 받은 적도 있습니다. 한데 그 보도가 갖는 진정한 의미는 과연 무엇이었을지. 단 몇 시간 며칠 뒤면 보도자료로 나올 것인데.
그에 비해, 이 기사 한 번 보십시오.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0/01/17/2000011770388.html
조선일보 앱이 깔려있지 않아서 기사를 못 보실 분도 있으실 터이니, 짧게 설명하자면, 한국영화사의 한 획을 맡았던 국도극장이 소리소문없이 헐렸다는 기사입니다. 2000년 1월 18일, 김명환 기자가 보도했습니다.
기사는, 서울시의 승인을 받아 국도극장 철거가 진행 중이던 1999년 10월, 역시 서울시가 “국도극장을 비롯해 서울의 유서 깊은 근대건축물을 문화재로 보호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면서 이 나라의 ‘근본 없는 문화행정’을 질타합니다.
이 기사 이후, 근대건축물 보존에 대한 관심이 본격적으로 커졌고, 결국 다음 해인 2001년 근현대 건축물을 보존할 수 있도록 하는 국가등록문화재 제도가 생겼습니다. 김명환 기자의 이 기사는, 국가 정책을 바꾼, 아니 최소한 근현대 건축물 보존을 위한 정책 수립을 앞당긴 기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기사, 제가 알기로는 조선일보에서 특종상커녕 특종상 아래 단계에 해당하는 발행인상도 받지 못했습니다. 조선일보 포상위원회가 기사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것이지요.
이 기사로, 저는 특종에 대한 인식을 바꿨습니다. 총리나 장관이 누가 되느냐, 금관이 어디서 발굴됐다는 기사를 다른 언론사보다 먼저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국가 정책이나 사회적 인식을 바꾼 기사가 특종상 수상 여부와는 상관없이 진정한 특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기자의 제 1 덕목은 ‘정책 감시와 제도 개선’에 있다고 지금도 생각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