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향’이라는 말을 보면서
오늘 아침, 휴대폰으로 경제 기사를 읽다가 멈칫했습니다.
‘한국 강관 생산의 27%가 미국향수출인 가운데...’라는 대목이었습니다.(첨부 사진 참조)
휴대폰으로 보는 기사는 문장 줄 길이가 PC보다 짧습니다. 줄이 잦게 바뀌기에, 띄어쓰기가 제대로 표현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기사에 등장하는 ‘미국향수출’도 그랬습니다. 기자가 ‘미국향’‘과 ’수출‘을 띄어 썼는데 줄이 바뀌면서 띄어쓰기가 표현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미국향’과 ‘수출’이 복합어이기에, 띄어쓰기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인지조차 모르겠더군요.
문맥을 살피니 ‘미국으로 향하는 수출’이라는 뜻으로 보였습니다. 인터넷에서 ‘미국향’을 검색해 보니 몇 해 전부터 경제 기사를 중심으로 ‘~로 향(向)하는 수출’이라는 뜻으로 ‘향’을 썼더군요.
우선 드는 느낌. ‘내가 경제 기사를 그간 잘 안 읽었구나.’ 내 탓입니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은.
그럼에도 드는 안타까움. 이게 과연 ‘어법’에 맞나?
‘향’이라는 단어는 한자어입니다. 뭐, 중국어로 보실 분은 그렇게 보시고요. 그럼 애초 한자 조어 방식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물론 한자어도 우리 말 전통에 녹아 있는 것이니, 한글 조어 방식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고요.
최소한 제가 알기로, ‘전치사 역할’을 하는 한자어는 한자 조어든 한글 조어든 명사 앞에 옵니다.
예를 들어 ‘언제부터 언제까지’를 뜻하는 自(자) 至(지)는 시기 앞에 씁니다. 주 책임자와 부 책임자를 이르는 正(정)과 副(부) 역시 사람 이름 앞에 쓰지요.
한데 ‘미국으로 수출’이라는 뜻을 표현하면서 ‘미국향’이라고 쓴 겁니다. 마치, ‘대미(對美) 수출’이라고 쓰지 않고, ‘미대(美對) 수출’이라고 쓴 것이나 다름없지요. ‘대(對)정부질의’라고 하지, ‘정부대(對)질의’라고 하지는 않잖습니까?
챗지피티에 물으니 ‘언론이나 경제 리포트 등에서 향이라는 단어를 자주 쓴다’고 하더군요. 중국에서 만든 딥식은 ‘일본에서 최근 수입한 조어 방식이며, 한자식 조어로는 옳다고 볼 수 없다’고 지적했고요.
뭐, 한자식(중국식) 조어뿐이겠습니다. 한글 조어로도 적절해 보이지 않습니다. 그냥 ‘미국으로 수출’이라고 우리말로 풀든, 아니면 우리가 그간 써왔던 ‘대미 수출’이라고 하면 되지 않나요? 왜 굳이 한글이나 한자식 조어 방식에도 맞지 않는 ‘마데 인 재팬(made in Japan)’ 조어 방식을 따랐는지.
잠깐 화가 났지만, 이내 삭혔습니다.
니가 꼰대라서 그런 겨.
하긴, 이런 경우가 어디 한 둘인가요. 최근 언론에서는 편입의 반대 의미로 ‘편출’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코스피 200에서 편출됐다’ 식으로 씁니다.
‘편출’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 정말로 절망했습니다.
편입할 때 編(편)은 ‘엮거나 땋아서 한 묶음에 속하게 하다’라는 의미가 내포된 단어입니다. 때문에 ‘몰아내다, 쫓아내다’라는 뜻을 쓸 때, 編을 써서는 안 됩니다. 편입생은 있어도, 편출생은 없는 것이지요. 퇴학생 자퇴생은 있어도.
한데 뭐 어쩌겠습니까? 언중(言衆)이 사용하겠다는데. 언어란 결국 사회적 약속인데. 많은 이가 그리 약속하겠다는데, 니가 뭔 상관이여!
하긴, 雨雷나 朔月貰도 발음하기 편하게 우레나 사글세로 표준어 표기가 바뀐 지 오래입니다.
편출이니 미국향이니, 뭐가 중할까요. 사람들에게 통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 그게 언어의 본질인 것을.
내일모레 이순을 바라보는 이로, 진작부터 꼰대가 돼버린 나의 잘못일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