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0년, 신문기자가 한창 좋았던 시절의 연봉
1990년 2월 말, 기독교방송 기자로 입사했다. 민주화 열풍이 한창이던 시절, 당시 기자 인기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사회 변혁의 선봉에 설 수 있다는 만족감 때문에, 당시 서울대 인문대나 사회대에서 기자 인기는 최고 수준이었다. 인문대나 사회대에서 졸업을 앞둔 이들이나, 기 졸업자들이 내남없이 기자 준비를 하던 때였다. 방송국 PD? 배운 사람이 딴따라를 하느냐고 면박을 받기도 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1990년 초, 기독교방송 초임 연봉은 1000만 원이 약간 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일반 회사 초임 연봉이 600만 원을 넘지 않던 시절이었다. 필자의 초임 연봉을 이야기하니 건설사에서 10년 차 정도였던 어느 직장인이 “기독교방송 같은 데서 초임 연봉이 1000만 원을 줄 리가 없다”고 의심하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필자는 기독교방송 기자를 3개월 만에 그만두었다. 어느 날, 서울 남부지검에서 취재를 하고 있었는데 먼 일가쯤 될 법한 검사 하나가 “왜 기독교방송에 들어갔느냐”고 물었다. 자존심이 상했다. 일도 너무 힘들었고. 당시 기독교방송 기자들이 수습 기자인 나를 훈련시키며 들려준 이야기는 “조간과 함께 자서, 석간과 함께 일어난다”였다.
조간 신문의 최종 마감 시간은 당시 밤 12시 정도였다. 그러니 밤에도 취재를 열심히 해야 한다. 석간 신문의 최종 마감 시간은 오전 11시 30분. 그러니 석간 기자들은 새벽부터 현장에 나가서 취재를 할 수밖에. ‘조간과 함께 자서, 석간과 함께 일어난다’는 뜻은 결국 새벽 4시 30분부터 취재를 시작해서 밤 11시쯤에 취재를 마치라는 뜻이었다.
사세(事勢)도 약하고 일도 너무 힘들고. 다시 공부해서 들어간 것은 조선일보였다. 1990년 12월 1일 입사. 서울 아파트의 경우, ‘한 집 걸러 조선일보를 본다’던 때. 당시 조선일보 초임 연봉은 2000만 원 정도였다. 조선일보 입사 직후, 기자 교육을 받던 나에게 특별상여금으로 50만 원을 주었다. 입사 1개월도 안 됐는데.
당시 삼성전자 초임 과장 연봉이 1500만 원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니 조선일보에 입사하면 ‘힘도 있고, 월급도 많이 받는다’며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다. 하긴, 조선일보도 아니고 ‘대(大) 조선일보’로 불렸던 시절이었으니.
당시 2000만 원은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었을까? 당시 서울 택시 기본요금은 800원이었다.(서울시 자료). 자장면은 1000~1200원. 서울 아파트가격은 강남구의 경우 대략 평당 500만 원 정도였다.
택시 기본요금이나 자장면 가격은 서울 기준으로 6배 정도 올랐다. 아파트 가격은 10배가 훨씬 넘는 수준이고. 조선일보 초임 연봉은 지금으로 치면 최소한 1억 2000만 원은 넘는다는 뜻이다.
요즘 조선일보 초임 기자 연봉은 과연 얼마일까? 기자, 특히 신문사 기자 인기가 시든 것은 어쩔 수 없는 산업의 흐름이다. 주변을 둘러보라. 조선일보가 아니라, 신문을 구독하는 가구가 몇이나 되는지.
◆ 바둑 기사와 프로 게이머의 연봉 차이
한국 바둑의 최전성기는 1990년대라고 생각한다. 서울의 경우, 동네마다 ‘바둑 교실’이라는 일종의 어린이 바둑 학원이 있었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기원이 동네마다 있었고.
한국 바둑의 붐을 일으킨 것은 누가 뭐래도 이창호였다. 1975년생 이창호는 1988년, 13세 나이로 KBS 바둑왕전에서 우승한 이후, 세계 바둑계를 평정했다.
1980년대까지 한국 바둑은 일본 바둑의 아류로 취급됐다. 초대 국수로 불리는 조남철 선생이나, 그의 뒤를 이은 일인자 김인, 김인의 뒤를 이은 불세출의 영웅 조훈현 모두 일본 바둑 유학생 출신이었다. 세계 바둑대회가 없던 1980년대 중반, 세계 최고수를 가리는 바둑 대회는 ‘중-일 슈퍼 대항전’이었다. 한국인은 참가 자격조차 없었다.
1989년 조훈현이 응씨배를 우승한 이후, 한국 바둑이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다는 분위기가 형성됐는데, 이를 육화시킨 이가 조훈현의 제자 이창호였다.
이창호는 ‘벌이’로도 이를 증명했다. 그의 최전성기는 20대 초중반이었는데, 그는 대국료와 상금으로 1995년 6억4천400만 원, 97년 9억3천500만 원, 98년 6억100만 원, 99년 8억1천600만 원을 벌었고, 2001년에는 10억 원을 넘어섰다.
https://v.daum.net/v/M0HjqbfICD
당시, 국내 스포츠나 연예 분야 그 어느 스타도 이 정도 돈을 버는 이는 거의 없었다. (밤무대를 ‘마구 뛰는’ 탑 급 연예인이나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박찬호 제외.)
20여 년 이상이 흐른 지금, 바둑 기사의 수입은 어떨까?
부동의 세계 1위로 평가받는 신진서가 2022년 14억 4495만 원을 벌었다는 게 한국기원의 통계이다. 22년 기준, 프로기사 419명 중 1억 원 이상 대국료와 상금을 번 사람은 13명이고.
바둑에 엘리트가 모일 수 없는 이유는 벌이에 있다. 세계 1인자 연봉이 15억 정도인 분야에 인재가 모일 수 있을까? 연예계나 스포츠 분야는, 일인자가 아니더라도, 탑 급의 연 수입은 몇십억이 기본이다.
이 장면에서, 프로 게이머를 보자. 1990년대에는 프로 게이머라는 직업 자체가 없었다. 오락실 게임은 공부 못 하고, 미래에는 관심도 없는 청소년들이 하는 것으로 보았다. 지금은?
언론 보도에 따르면, 롤 게임의 영웅 페이커 이상혁 연봉이 70억 원이며, 카나비 서진혁은 40억, 쵸비 정지훈 30억 정도라고 한다. 10대 청소년들에게 “너 바둑 기사 할래, 프로 게이머 할래”라고 물었을 때 누가 바둑 기사를 하겠다고 말하겠는가.
이는 한국 바둑기사 랭킹에서도 드러난다.
바둑은 고도의 수학적 연산과 육체적 집중력을 바탕으로 하는 경기. 때문에 20대 중반이 최전성기가 되며, 그 이후 실력은 ‘상대적으로 쇠퇴’한다. 때문에 한국 랭킹 10위 안에 20대 기사가 얼마냐 많으냐가 한국 바둑의 힘을 나타낸다.
한국기원은 2005년 8월 이후 바둑 기사의 랭킹을 매달 공개하고 있다. 정확히 18년 전인 05년 12월, 한국 바둑 기사 랭킹을 보자.
1위는 이세돌로 당시 22세였다. 2위 이창호 30세, 3위 최철한 20세, 4위 조한승 21세, 5위 박영훈 20세, 6위 조훈현 52세, 7위 박정상 21세, 8위 원성진 20세, 9위 유창혁 39세, 10위 안조영 26세.
이세돌 이하 6명이 모두 20대 최초반이었다. 이들은 모두 이창호를 통해 바둑의 꿈을 키운 ‘이창호 키즈’였다.
23년 11월 랭킹은 어떨까?
1위 신진서 23세, 2위 박정환 30세, 3위 변상일 26세, 4위 신민준 24세, 5위 김명훈 26세, 6위 강동윤 34세, 7위 안성준 32세, 8위 김지석 34세, 9위 원성진 38세, 10위 홍성지 36세.
20대 전반은 2명뿐이고, 30대가 6명이다. 30대 기사는 죄다 이창호 키즈이다. 즉, 1990년대 바둑 인기가 한창 좋았던 시절에 바둑에 입문한 이들이 한국 바둑을 여전히 지키고 있다는 뜻이다. 한국 바둑이 늙어간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표이다. (이는 일본도 마찬가지. 한국보다 뒤늦은 중국도 앞으로 이를 따라갈 것이다.)
◆ 2016년 이후, 컴퓨터공학(인공지능 관련) 학과의 부상
아해는 15학번이다. 이과생이던 아해 정시를 진두지휘했기에 당시 학과 커트라인을 꽤나 정확히 기억한다고 자부한다. 당시 컴퓨터공학과 커트라인은 절대로 높지 않았다. 공대에서 전화기(전자전기 화공 기계공학)가 최고였다.
16년 초, 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 대결로 판세가 뒤집혔다. 17학번부터 컴퓨터공학 혹은 인공지능 관련 학과 커트라인은 급상승했다. 이유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 우리는 모두 자본주의의 자녀이다
아무리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신)자유주의를 비난해도, 우리는 자유주의 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 아래서 살고 있다. 설령 좌파여도 돈 싫어하는 이를 본 적이 있는가?
필자는 어원을 무척이나 중시한다. 어원에는 해당 단어의 본질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과연 무엇일까? 위키피디아 영어판의 자본주의 항목에 등장하는 자본주의의 어원을 인용하자.
Etymology
The term "capitalist", meaning an owner of capital, appears earlier than the term "capitalism" and dates to the mid-17th century. "Capitalism" is derived from capital, which evolved from capitale, a late Latin word based on caput, meaning "head"—which is also the origin of "chattel" and "cattle" in the sense of movable property (only much later to refer only to livestock). Capitale emerged in the 12th to 13th centuries to refer to funds, stock of merchandise, sum of money or money carrying interest. By 1283, it was used in the sense of the capital assets of a trading firm and was often interchanged with other words—wealth, money, funds, goods, assets, property and so on.
자본주의는 결국 ‘돈’에 좌우된다는 뜻이다.
◆ 의대생 증원 영향은?
문과는 망한 지 오래이니 언급할 필요조차 없지만, 서울대 공대 자연대 출신 586조차 자기 자식이 공부 잘 하면 의대 진학을 권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긴, 서울 법대 출신이자 서울 법대 교수였던 조국 전 법무부 장관조차 자기 딸을 의대에 보내려다가 ‘망신’을 당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여전히 의대인가?
간서치에 불과한 사람이니, 내가 미래를 제대로 읽는다고 이야기하지는 못하겠다. 다만, 보수로만 본다면, 의대생 ‘급증’으로 의사의 상대적 지위는 지금보다는 낮아질 것으로 본다. 그럼에도 의사가 ‘평균적으로 볼 때’ 컴퓨터공학이나 인공지능 전공자보다 못 벌까? ‘평균’으로 볼 때 말이다.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필자가 고 3이던 1983년, 인문지리 시간에 배운 한국인 ‘기대 수명’(당시는 ‘평균 수명’으로 불렀다)은 65세 정도였다. 남자는 63세, 여자는 66세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통계청이 23년 12월 1일 발표한 22년 기준 기대 수명은 남자 79.9세, 여자 85.6세란다.
‘평생 직장’의 신념을 안고 살던 1980년대는 남자의 경우, 퇴직(사기업은 대개 60세였고, 교사가 65세였다.) 뒤 채 몇 년 못 살고 죽는다는 뜻이었다. ‘은퇴 후의 삶’이라는 개념은 존재할 수가 없었다. 자격증을 갖고 살지 않는 한 평생 직장이 존재하지 않는 요즘, 은퇴 뒤에 최소한 20년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뜻이다.
의사나 변호사가 여전히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몸만 건강하다면 사실상 ‘정년’이 없는 직업이므로. A.I.로 바뀔 수 있지 않겠느냐고? 그게 의사나 변호사에게만 해당하겠는가.
빙충뱅이 주제에 한마디 한다면... 제발 경제나 산업의 흐름을 읽는 훈련을 10대들이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한다. 미적분을 잘 푸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신문기자 인기가 한창 좋았던 19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 그 좋다던 신문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친구들은 2000년대 들어 기업 홍보담당 파트로 이직하기 시작했다. 당시 딴따라로 불렸던 방송국 PD로 시작한 이들은, 방송연예 산업이 급성장하면서 몸값이 달라졌고.
대학과 학과 선택을 앞둔 이들에게 틀딱이 건넬 수 있는 조언은 이 정도일 것이다.
모두 굿 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