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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형준 Oct 03. 2024

Damnatio memoriae-서양판 분서갱유焚書坑儒

-성남고 교가가 바뀐 것을 보면서

*** 1년 전쯤에 쓴 글인데 ‘사정상 지웠다가’ 다시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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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동작구 대방동 성남고등학교를 1984년 2월에 졸업했습니다.      


어제, 어느 부자(父子)를 만났습니다. 모두 성남고를 졸업한, 저의 후배들입니다. 반갑게 모교 이야기를 나누는데, 2022년에 교가가 바뀌었다는 겁니다. 이게 뭔 소리?     


‘학교를 세운 두 분이 친일파였는데, 그들이 교가에 언급되고, 교가 시작 부분도 일제의 욱일승천기를 연상시켜서 곡은 그대로 두고, 가사만 바꾸었다.’     


1981년 입학할 때 배운 교가는 이랬습니다.      


‘먼동이 트이니 온 누리 환하도다. 환한 이 강산에 원석 두 님 나셔서, 배움길 여시니 크신 공덕 가없네.(노래할 때는 ’가이없네‘로 불렀습니다.) 성남 성남 우리 모교, 무궁탄탄할지어다.’     


사실, 제가 교가를 배울 때도 ‘김일성 찬양가’ 같다는 농담을 하곤 했습니다. 교가에 등장하는 ‘원석 두 님’은 설립자인 원윤수(1887~1940)와 김석원(1893~1978)를 말합니다. 원윤수는 일제강점기, 광산업으로 큰돈을 번 뒤 일제를 지원하기도 했고, 김석원은 일본 육사 출신으로 1930년대부터 중국군과의 각종 전투로 공을 세웠던 이입니다.       


예, 두 사람 모두 친일파 맞습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만 따진다면, 일제 강점기를 살아남은 ‘거의 대부분’은 친일파일 수밖에 없습니다. 창씨개명 정도는 ‘소극적 친일’ 혹은 ‘눈 감아 줄 수 있는 친일’이라고요? 그들이 만약 경성제대 쯤 들어갈 뛰어난 성적이었다면, 그 이후의 삶이 어땠을까요? ‘이래서는 안 된다’는 민족적 자각의식을 바탕으로 죄다 상해 임정으로 향할 수 있었을까요? 태평양전쟁 당시, 일제의 군 소집 영장을 돌린 조선인 최하급 관리는요?     


김석원이, 일본 육사 출신이었지만 독립군에 투신한 지청천 장군의 가족을 물심양면 도왔다거나, 1944년 평양에서 학병으로 징집된 학생들이 무기고를 탈취했던 ‘평양 학병 의거’ 때 끝까지 재판정에 남았다가 유죄 판결이 나자 눈물을 쏟았다는 이야기는 당대를 살았던 숱한 사람이 증언하는 바입니다.      


‘수십 년 간의 강점기를 살아 남았다’는 것은 그 자체로 부역일 가능성이 너무도 농후합니다. 2차대전 때, 채 5년이 안 된 세월 동안 나치의 지배를 받은 프랑스가 전후, 친 나치를 처단한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소련으로부터의 자유화를 이룩한 뒤 체코슬로바키아의 초대 대통령에 오른 바츨라프 하벨은 “(지난 40여 년 간 이 땅을 지배한) 친소 분자를 숙청하자”는 주장에 대해 “그런 식으로 역사 청산 작업을 하겠다면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이는 푸줏간집 주인밖에 없다”고 이야기한 것이고요.      


기나긴 치욕의 세월일수록 ‘처단’보다는 ‘선양’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민족의 만 35년 엄혹한 지배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어가며 ‘숭고한 저항’을 한 분들을 선양하면 되는 것이지, 어떻게 처단을 합니까?      


이 글을 읽으시는 귀하의 친할아버지 친할머니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서울대 사범대의 전신인 경성사범 국어과를 나오신 뒤 일제 강점기, 교사를 하셨던 제 아부지인들 일제 말기, 조선어로 교육을 하셨을까요? 그래서 제 아부지 역시 친일파로 처단돼야 하나요?      


성남고 교가에 등장하는 ‘먼동이 트인다’는 표현에서 욱일승천기가 연상된다는 주장에는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아니, 실소라고 해야 할까요?     


해가 동에서 트지, 서에서 트나요? 민족정기를 노래하려면 “먼서가 트이니”라고 ‘사실과 달리’ 노래해야 하나요?     


그런 식이라면, 영조의 명으로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파견(1763~1764)됐다가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라는 기행 기록을 남긴 김인겸(1707~1772)은 친일 문학의 시조일 것입니다. ‘해가 뜨는 동쪽을 장대하게 유람한 기록’이라니. 이 얼마나 친일적입니까!     


함흥 귀경대에서 동해 일출의 장관을 예찬한 의유당 남씨의 ‘동명일기(東溟日記)’(1772년) 역시 친일의 냄새가 물씬 풍깁니다. ‘동쪽 바다’(東溟)에서 해 뜨는 것에 입이 마르도록 찬사를 보냈으니.  

   

‘Damnatio memoriae’라는 라틴어를 잘 아실 겁니다. 굳이 번역한다면, ‘기억(혹은 기록)의 삭제’ 정도가 될 겁니다.      


‘내가 인정하기 싫은 것, 내가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을 기억과 기록에서 제거하려는 행위’(Damnatio memoriae)의 역사는 기나깁니다. 서기전 3세기 말, 중국 진시황의 ‘분서갱유’만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이집트의 이크나톤(서기전 14세기)이 태양신(아텐)을 유일신으로 삼는 종교개혁을 하면서 당시 이집트인들이 ‘신중의 왕’ 정도로 생각하던 ‘아문’과 관련한 것을 말살하려 한 것도, 반대로 이크나톤의 사후 아텐과 관련한 것을 부순 것도 결국은 Damnatio memoriae입니다. 나와 다른 것, 나와 달리 생각하는 것을 제거하기.     


하긴 모든 생명체는 기본적으로 ‘나와 다른 남’을 배척하면서 존재합니다. 감기 균이 들어왔을 때 백혈구가 싸우는 것도 결국은 ‘나와 다른 것이 내 몸에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 때문입니다. 그래야 개별 생명체는 존재하니까. ‘타자’는 기본적으로 배척해야 하니까. 그러니 Damnatio memoriae에 대해 너무 슬퍼할 필요는 

없는 것인가요?      


아침부터 씁쓸해집니다.      


확실한 것은, 앞으로 고교 총동창회에 갈 일은 없을 것 같고, 가더라도 제가 ‘새 교가’를 부를 일은 없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저는 ‘먼동이 트이니 온 누리 환하도다, 환한 이 강산에 원석 두 님 나셔서...’로 시작되던 교가를 배운 사람이니까.     


#성남고 #교가 #친일청산 #체코슬로바키아 #바츨라프하벨 #하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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