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

겨울, 봄, 여름, 가을

by 다재

2024년 초 부산으로 이사 오며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새로운 직장, 새로운 집. 새로운 사람들. 첫인상이 중요하다고 하는 데 유독 처음 마주치는 모든 내용이 한없이 냉정하게 느껴졌다. 집을 구하는 과정부터 직장에 적응하는 과정까지 무엇 하나 쉽게 대할 일이 없었다. 모든 것이 낯설고 차갑게 느껴지는 2월이었다.


고독한 2월을 겨우 목구멍 밑으로 넘기며 지난해의 결심을 되새겼다. 적지않은 시간 동안 쌓아 올린 나의 아늑한 작은 모래성을 부수고 새로운 사람이 되어보기 위해 부산으로 이사를 선택하게 되었다. 이슬비에 조금씩 젖어가듯이 차츰차츰 일상에 익숙해져 매너리즘에 빠져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점점 도태되어 가는 나의 모습을 바꾸어 보고 싶었다. 그렇게 선택한 차가운 2월이었다. 소리 없는 아우성처럼 작지만 큰 나의 결심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겨울의 파도처럼 덮쳐오는 쌀쌀한 것들을 꿋꿋하게 견뎌내야 했다. 지금 와서 지난 2024년을 돌아보면 낯선 것들을 주도하지 못하고 정신없이 끌려가며 지냈다. 한 고비를 겨우 넘기나 하면 다른 고비들이 대기표를 들고 나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시간이었다. 처음엔 거칠었던 돌멩이도 파도에 부딪히며 반들반들해지듯이 다행히 어느 순간부터 이런 나날이 반들반들해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조금씩 주변 풍경에 익숙해지며 곁을 살필 여유가 생기게 될 즈음 12월이 되었다.


지난 한 해 동안 달라진 게 있다면 배구에 푹 빠져 지내다 대회에도 진출해본 것. 비치발리볼 대회에도 나가본 것. (전부 예선 탈락했지만...) 그리고 부수적으로 가지가 뻗어나가듯 새로운 모임과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인연들로 가득해진 것. 그중 제일 좋았던 건 지역이 달라 멀어졌던 부산 친구들과 다시 가까워진 것이었다. 힘든 시간을 견딜 수 있게 해준 가장 고마운 존재들이다.



180도 바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한해였다. 그럼에도 2월의 결심을 이루었다고 말하기에는 한없이 부족했다. 바뀐 것 중에 주도해서 개인적인 성장을 이룬 것들은 얼마나 있을까? 손가락으로 세기에도 민망해 금방 주머니에 손을 넣어버리고 말았다.


따뜻했던 봄의 바람이 어느새 이렇게 한없이 차가워졌을까? 차가운 바람이 내 곁을 스쳐갈 때마다 성과 없이 마무리했던 2024년을 일깨워주었다. 전의 모습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구나... 하지만 마냥 주저앉아 있을 수 없다. 낙엽이 다 지고 앙상해진 겨울나무 가지 끝에 달린 겨울눈을 보며 생각했다. 겨울눈도 이 추운 겨울에서 따뜻한 봄을 생각하며 살고 있겠구나. 봄이 오면 꽃이 만개하여 한없이 화려해질 순간을 떠올리며 이 추운 겨울을 버티고 있다. 어쩌면 2024년은 버티는 기간이었을지도 모른다. 군대에 복무하던 시절, 새벽 4시에 투입되는 야간 초소 경계 근무를 제일 좋아했다. 일출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태양이 떠오르기 전부터 칠흑같이

어두웠던 주변이 조금씩 밝아지는 모습이 신기했다. 한번 떠오르면 태양은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올라왔었다. 태양을 망원경으로 눈이 시리도록 보는 재미가 있었다. 태양이 완전한 형태로 모습을 보이면 눈을 감고 기도하곤 했다. 그렇게 희망을 품으며 하루를 시작하는 게 좋았었다. 뒤늦게 알았지만 해가 떠오를 무렵을 여명이라고 한다. 그래서 ‘여명’이라는 단어를 참 좋아하게 되었다.


달이 기울었다고 해서 언젠가 만월이 될 것을 의심하지 않듯이, 추운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올 것을 믿고 있다. 2024년은 나에게 겨울이었다. 어쩌면 겨울은 계절의 끝이 아닐지도 모른다. 겨울을 계절의 처음으로 옮겨 다음 해의 봄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여겨본다.


KakaoTalk_20250905_114222382.jpg 타국 하늘 위에서 바라보는 일출이다. 이 때는 무슨 소원을 빌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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