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의 훈장
본가가 멀어 자주 들리지 않지만 본가에 들릴 때마다 확인하는 일은 방에 걸려 있는 메달을 보는 것이다. 초등학생 시절 육상대회에서 획득한 메달인데 은메달 1개, 동메달 2개 총 3개의 메달이 있으며 은메달은 1,500m 달리기에서 획득한 메달, 동메달은 각각 멀리 뛰기, 400m 계주에서 획득한 메달이다. 다른 사람이 보기엔 단순히 알루미늄에 라카칠을 해둔 금전적 가치 없는 무거운 목걸이에 불과할 수 있으나 그걸 보고 있으면 내가 대단한 사람이었던 것만 같아 괜한 뿌듯한 마음이 든다. 계산해보면 1년 중 10일 ~ 20일 남짓하게 머물다 가기에 비어있는 날이 더 많은 내 방이지만 어머니는 내 방을 나의 자랑스러운 흔적들로 채워놓고 먼지가 쌓이지 않게 청소하시고 관리해주신다. 그중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메달을 걸어두시는데 아마 내가 방에 들어오면 이런 마음을 가질 거라 예상하셨나 보다.
초등학생 시절 대부분의 기억은 흐릿하지만, 육상부 시절의 기억만큼은 선명하게 남아있다. 체육 선생님께서 달리기 잘하는 친구를 선발한다고 교실에 들어오셔서 나를 지목하셨던 순간부터 육상대회 당일 얇고 노출이 큰 유니폼을 입어 옷 사이로 느껴지는 바람이 꽤 쌀쌀하고 낯설었던 순간까지 매 순간이 나의 기억 속에 차곡차곡 저장되어 있다.
그중 가장 자랑스러웠던 기억은 1,500m 달리기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날이다. 육상대회 한 달 전부터 점심시간과 방과후에 훈련을 했었는데 항상 마지막 훈련은 1,500m 달리기 훈련이었다. 지금도 1km를 훌쩍 넘는 거리를 쉬지 않고 달리기는 생각만 해도 숨찬 일인데 그 당시에는 그 거리를 남들보다 짧은 시간에 달려야 하니 하루하루가 시련이었다. 훈련 전이면 긴장하는 마음 때문인지 소변이 마려워 꼭 화장실에 들렀다 왔는데 옆에서 볼일을 보는 그 당시 1, 2위를 다투던 라이벌과 서로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며 애써 느껴지는 경쟁의식을 감추고는 어색하게 다시 트랙으로 돌아왔고 트랙 위에 섰을 때 너무나 많은 긴장감에 벌써 다리에 힘이 풀려버리곤 했다. 트랙을 돌 때마다 지금 포기할지 더 달릴지의 고민의 반복을 하기도 하고 옆에서 달리는 친구가 나가떨어지기를 희망하기도 하며 가까스로 완주하고 나면 헐떡이는 숨을 다독이며 이런 과정을 매일 해야 한다는 생각에 육상부에 들어온 걸 후회한 적도 있었다.
그런 고행 끝에 획득한 은메달이기에 그동안의 고생이 헛된 게 아니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고 그 감정은 꽤 오래갔던 걸로 기억한다. 중학생이 되고부터는 학업에 몰두한다고 육상부를 그만두었고 이후로는 다른 대회에 나갈 일도 없어 메달이나 트로피처럼 상징적인 무언가를 받을 일이 없어졌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매년 1,500m 경주를 하는 기분이다.
중학교 2학년 시절 나름의 이유로 영어 문장 1,000개를 외워보겠다고 여름 방학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에 누워 다리를 벽에 올리고 계속 영어 문장을 중얼거렸던 적이 있고, 대학교 2학년 2학기 초, 과 분위기가 좋지 않았으나 얽히고설킨 이유로 인해 강제로 2학기 과대를 맡게 되었던 적도 있다. 자의도 있었고 타의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나에게는 모양과 성질이 다른 새로운 1,500m 트랙이 놓여있었다. 중간에 포기하고 싶었던 적도 많았고 성공적이지 않았던 적도 있었으나 그 모든 나날의 공통점은 결국 끝까지 했다는 것이다. ‘그 힘든 순간들도 견뎌냈는데 이 정도 쯤이야?’하는 마음이었을지 아니면 오기였을지 모르겠다. 멈춰버리면 경주에서 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결과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결승점까지 완주할 수 있었던 힘은 그 은메달을 따냈다는 성취감에서 출발한 거라 여겨진다.
올해는 그동안 했던 일과 다른 도전을 해보기로 했다. 그 분야는 바로 글쓰기이다. 언젠가 한 번 책을 써보고 싶다고 생각했었고, 우연한 기회와 더 늦기 전에 도전해보자는 마음이 겹쳐 글쓰기 수업에 참여할 수 있었다. 직접 겪어보며 느꼈던 건 글쓰기를 너무 가볍게 생각했었고 글쓰기는 생각보다 더 어렵다는 것이었다. 더 정확히는 글을 잘 쓰는 건 정말 어려웠다. 그냥 책을 읽을 때는 몰랐던 한 문장 한 음절의 차이가 나려면 생각보다 많은 경험과 많은 문학적 감성을 담아야 했었다. 단순히 몇 번 메모장에 끄적여본 게 다인 내가 감히 주변의 다른 글을 쓰는 사람과 근처에 있다고 여겼었는데 지금에서야 그들 사이에 놓인 셀 수 없는 수많은 계단이 보이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기대와 다른 현실과 스스로 느껴지는 한계에 부끄러운 적도 있고 그만두고 싶다는 충동이 든 적도 몇 번 있었지만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나름 성실하게 매 모임에 참여해왔다고 생각한다. 이번 주말이면 마냥 길다고 느꼈던 글쓰기 모임도 끝이 난다. 마지막의 근처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시원함 혹은 아쉬움의 감정을 시작으로 성취감으로 마무리되어 간다. 다른 사람의 생각과 상관없이 이번 모임도 은메달로 시작하는 나의 마음속 트로피 전시장에 새로운 훈장으로 담아두려고 한다.
이와 같은 마음속 생활 양식은 다른 사람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그것이 메달처럼 특별한 게 아닐 수 있겠지만 저마다 겪은 무언가의 경험이 훈장이 되어 그들의 삶의 정체성을 밝혀주고 길을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등대 같은 역할을 해주는 게 아닐까? 그리고 그 정체성은 각각 다르겠지만 그 메달이 있기에 더 성장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거로 생각한다. 메달은 나에게 어려운 일일수록 해냈을 때의 성취감은 더 강하다는 것을 알려주었고, 주어진 길을 돌아가지 않고 정면 돌파하는 자존심을 세워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