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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리브나무 Feb 16. 2024

초보 백수 널어 말리기

  퇴직을 하고 집에서 쉬기 이십 여일.... 아침 7시면 생체 시계가 나를 바짝 흔들어 깨운다.

아, 나  백수지. 조금 더 자야지 하고 다시 꿀맛 같은 늦잠을 잔다. 

어쩌다 느긋하게 소파에 기대어 차라도 마실라치면, 뭔가 처리하지 못한 일감이 있을 것 같아 뭐지? 내가 뭘 처리하지 않은 거지? 왠지 모를 불안함이 스멀스멀 올라오곤 한다. 삼십육 년 동안 그리 살았으니 그러려니 한다. 


   그동안 번아웃에 시달려 엄두도 못 내던  지루한 치과 치료도 오전에 가서 받고 남들 근무시간에 카페에 가서 차도 마시고  강아지와 산책을 하거나 오수를 즐기거나 한다. 성질 급한 친구들이 어떤 계획을 세웠어? 같이 이거 배울까? 묻는다. 시끄러워~~ 석 달 열흘 잠만 잘 거야 나 시간 아주 많아~! 대답한다. 예전에 업무일지에, 탁상달력에, 컴퓨터 배경화면 달력에 적어놓아도 깜빡 놓치던 해야 할 일들이 요즘엔 아주 상큼하게 떠오르는 게 신기하다.


  오늘은 자동차검사를 받기로 예약한 날, 시간에 맞춰 자동차검사소로 향한다. 

종합검사 라인에 줄 서있는 내 차를 보더니 직원분이 

 "고객님  이쪽 라인으로 오세요!" "왜요?"

"거기는 종합검사하는 차들 줄 서는 라인이에요" "아 ~ 예!!" 

"고객님 차 키두고 내리시고 대기실에 잠시 앉아 계세요!" 

하는 말을 듣고 대기실을 찾아 접수실로 들어갔다 대기실이 어디지?.... 두리번거리다 모르겠다 여기 앉아 기다리지 하고 앉아있는데 직원분이 헐레벌떡 들어오며 

"제가 대기실에 가 기다리시라고 했잖아요 가운데 있다고!" 

"없던데요?" "가운데 어디요? 어라 여기 있었네"

"차 키도 가져가버리시니 자동차가 열리지도 않잖아요" " 아~ 죄송해요..."


  자동차검사를 한 두 번 받아본 것도 아니고... 나를 어떻게 볼까... 겉모습은 멀쩡해 보이는데... 할머니들께 잘해야겠다... 아니다.  친구들 중에 손주를 본 사람들도 있지 않은가... 쩝


     어젯밤 은행 금융인증서 비번이 생각나지 않아 결국 오전에 은행에 들렀다.

 "재발급 버튼 누르시면 되는 건데요"  "아~ 네!..."

어젯밤에는 절대 생각나지 않던... 한두 번 해본 것도 아닌 방법이 나의 얼굴을 벌겋게 달아오르게 한다.  

  

   집에 도착하니  지난번 신청했던 개인연금이 오류 처리되어 다시 신청해 달라는 전화를 받는다. 어느 페이지에서 스크롤을 내려 이름을 적고 확인 버튼 누르는 것을 생략하고 넘겼단다. 많은 분들이 그 페이지에서 실수하신단다.

친절한 상담원이 절대 말하지 않았을 '에혀~ 그것도 놓치고..' 음성이 핸드폰에서 들리는 듯하다. 통화를 끝내고 

아니, 왜 다른 페이지는 다 A4인데 그 페이지만 더 긴 거야~ 볼멘소리를 혼자서 구시렁거려 본들 무엇하리, 저장해 둔  준비 서류 파일 확인하고 이번에는 실수하지 말아야지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조심조심 넘겨가며 신청을 한다. 이게 뭐라고 바짝 긴장되어 닭이 모이를 쪼아 먹듯 조심조심 두 손가락으로 자판을 누른다.  대체불가 인력이라는 자존심 유지하려 무던히 노력하며 살았는데 이제는 버벅거리는 고물 컴퓨터가 되어 있다.  


   그동안 고생했어.... 그래 용썼다. 좀 닳아 해지고 색깔도 바랬지만 넌 여전히 소중해

조물조물 빨아서 볕 좋고 선선한 바람 통하는 곳에 널어 말리면 또다시 한동안 잘 쓸 수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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