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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lviatis Sep 12. 2024

이민 간 딸

홍수와 가뭄의 교차

엄마가 갔다.

새벽에 기차를 타고 JFK까지 혼자 찾아가시겠다고 우겨서 어쩔수 없이 기차표를 예매해 드렸다. 다행히 기차역에서 비행장까지 가는 경로를 다 파악하시고 해보신 적이 있어서 걱정은 안됐지만, 그래도 보내드리는 마음이 영 좋지 않았다. 내가 싱글일 때는 엄마랑 같이 3시간 운전해서 내려가는 동안 같이 지낸 몇 개월간의 시간을 되돌아보며 마음의 정리를 할 시간이 주어져서 공항에 도착하면 다음을 기약하며 담담하게 보내드렸었다. 근데 이제는 애가 있으니, 애를 달고 가자니 그것도 힘들고, 떼 놓고 가는 것도 어려운 상황이 되어 차로 바래다 드린다고 더 고집 부릴 수 없었다.


기차역까지라내가 바래다 드리고 싶었는데, 짐이 무거워 이번에는 남편이 가는 바람에 20분이라도 마음의 정리를 할 수 있는 시간 조차 없이 집 앞에서 배웅을 해드렸다. 약간 눈시울을 붉히는 엄마에게 아무렇지 않은 척, 놀렸다. "엄마, 울어??" 하고...

 

코너를 돌아 떠나는 차를 보고 집에 들어와서, 눈물이 쏟아 질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괜찮았다. 딸 아이도 아직은 잠든 새벽시간이라, 이렇게 혼자서 집에서 나만의 시간이 생겨 휴~ 하고 여유가 생겼다. 이것 저것 정리를 하고, 멍하니 앉아 있는데 집은 참 조용했다.


올 해 초 새 집을 사서 이사를 오게 됐는데, 이사 전부터 엄마가 와 셔 큰 도움을 주셨다. 짐도 싸라고 싸라고 잔소리를 하신 덕분에 이삿날 수월하게 이사를 할 수 있었고, 또 와서 정리를 해야할 때도, 주중에는 출근을 하고 주말에는 애 스케줄 따라 다녀 바빠서 제대로 아무것도 되지 않는 상황에서 아빠가 으쌰으쌰 힘써주신 덕분에 차곡차곡 박스들이 사라져갔다. 고마우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건데 엄마 아빠가 해준 것에 대한 민망함에 괜히 내가 머릿속으로 생각했던 곳에 물건들이 놓여있지 않았다는 이유로 철딱서니 없게 짜증도 냈다. 짜증을 좀 내면 다음 번에 도와주고 싶다가도 안 하실려나 싶은 괴짜같은 마음도 있었지만, 어른 넷이서 지내던 집은 서로가 돌아가며 아이도 보고, 돌아가며 집안일이며 밖에 정원일도 하며 '우리의 집'으로 자리가 다져졌다.

 

한국에서는 두분이만 계시기에 집에서 식사를 안 하셔도 되어 부엌일을 안하던 엄마가 여기 와서는 이 많은 입들 퇴근하고 돌아오면 먹을 수 있게 저녁을 도맡으셨고, 애 봐줄 사람 있을 때 운동이며 친구들 만나고 오라고 해주셔서 편하게 나다녔었다. 그렇지만 또 우리 집에 와 보고 싶어하는 친구들이 있음에도 엄마 아빠가 계시니 불편할 수 있어 부르고 싶은 만큼 못 부르기도 했고, 가족간의 시간도 보내야 하기에, 어떤 모임은 취소해야하기도 했다. 차를 타고 어디 놀러가고 싶어도, 차 여행이 싫은 엄마, 다른 집에서 하룻밤 자기 싫은 아빠, 햇빛에 타는게 싫은 엄마, 일을 해야하는 남편 등등 뭐 아다리 딱 맞아 합심하여 뭘 하러 가기도 어려웠다. 새 집이라 할 것도 많아 주말이면 밀린 집안 일을 하느라 모두 바빴는데, 각자가 생각하고 있는 당장 해결해야하는 시급한 일의 우선순위가 달라 삐그덕 삐그덕댔다.


남편의 의식흐름이 우리 집안의 의식흐름과는 많이 달라서 "쟤는 왜 저러지?" 하고 엄마 아빠의 머리 속에 물음표와 느낌표를 번갈아 가며 주었고, 둘 다가 이해가 가는 나는 중간에서 난감했던 경우도 많았다. 돌다리도 두둘겨 보고 걷는 우리 남편에 비해 장대높이뛰기로 훌쩍 훌쩍 건너 다니는 우리 식구들. 아래를 보느라 공중으로 건너뛰는 걸 보지 못하는 우리 남편도 엄마 아빠를 바라보며 머리 속에 물음표와 느낌표 투성이었겠고...


여튼, 이제는 내 집에서 내 마음대로, 내 주도하에 아무의 이야기 듣지 않고 왕 노릇할 수 있다는거에 휴~ 싶었다.

그렇게 성당 갈 채비를 하고, 미사를 보고, 성당 행사도 다 참석하고, 밥도 얻어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난 자리에 서운해할 딸한테, 가시기 며칠 전 부터, "할머니 할아버지 가시고 나면,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 방 티비에서 팝콘 먹으며 영화보자!"하고 기대할 거리를 만들어줬기에, 딸은 영화를 틀어주고, 그 옆에서 나는 낮잠을 한 숨 잤다. 영화가 끝나서 일어나서 남편을 찾으니, 남편도 안방에서 낮잠을 잔 모양이다. 천천히 일어나서 이제 저녁을 준비하려고 1층으로 내려갔다.


그 전 날 노느라고 엉망이 된 집은 여전히 그 상태로 있었고, 치워야 하는 시간에 밥도 해야하고, 밥해야 하는 시간에 딸이 놀아달라고 하여 갑자기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남편에게 정리를 부탁하고, 나는 저녁 준비를 하는데 갑자기 휑해진 집이 어색해졌는지 딸이 자꾸 놀아달라고 칭얼댔다. 얼려 놓은 밥을 해동하고 반찬거리 찾으려고 열은 냉동칸을 보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쓰다 남은 오뎅은 야무지게 고무줄로 묶여 보관 되있고, 엄마가 자주 쓰던 디포리도 그 아래에 놓여 있었다. 엄마 살림이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엄마가 사다 놓은 호박과 무가 있었고, 이 모든 것이 그냥 다 엄마 살림이었다.


지난 6개월간 일어나고 싶은 때에 일어나고, 자고 싶은 때 자고, 애가 놀아달라고 보채면 엄마나 아빠 누군가가 놀아주겠지 하고 은근슬쩍 떠넘겼고, 정말 편하게 늘어졌었다. 늦잠을 자고 있으면 일하러 가는 시간 늦겠다고 깨우러 들어오는 엄마가 있었고, 낮에 차 써야한다고 나를 직장으로 태워주던 아빠도 있었다. 갑자기 집에 뭐 두고 간게 있나 생각이 안 날 때면 엄마한테 호출하면 바로 엄마가 알려줬고, 딸 아이 아침에 준비시키고 그 전날 준비물 챙기는 것도 한 번 더 엄마가 짚어줬었는데...


내일부터 애 학교 갈 채비에, 나 직장 갈 채비에, 또 도시락까지 싸서 제대로 내가 다 할 수 있을까? 덜컥 겁도 났다. 엉엉 울고 있는 나를 보며 놀라 달려온 남편은 자기도 옆에서 많이 돕겠다고 위로를 해줬고,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딸래미는 갑자기 말을 잘 듣기 시작했다.


밥을 먹고, 정리를 남편에게 맡기고 딸 아이 씻기고 재운다고 올라오는데, 문득 늘 아빠가 서예 붓 글씨 연습하던 공간이 더 휑했고, 언제나 반듯하게 잘 정리돼있던 엄마 아빠 방 이불은 아까 딸이랑 내가 영화 보고 나온 그대로라 엉망이었다. 눈치 빠른 딸 덕분에 보통 같았으면 더 오래 걸렸을 씻기는 시간도 재우는 시간도 많이 단축이 되어 수월하게 월요일을 맞이할 수 있었다.


6시30분에 기상하여 도시락을 싸고, 아침을 만들며, 아이를 깨우고 준비를 했다.

스쿨버스를 보며 "신난다!"고 외치는 고마운 딸의 뒷모습을 보며 그 길로 나는 출근을 했고, 9시 10분, 평소 출근시간에 비해 다소 늦게 도착했지만, 그렇게 성공리에 아침을 맞이 한 것 같아 또 휴~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시 시작이다. 가뭄기다. 그 전에도 해왔었던 일상이었고, 다만 몇 개월간의 단맛으로 게을를 수 있었다. 다시 정신을 다져 잡고, 일도, 육아도, 일상으로 돌려놓는 중이다.


흘러 넘치던 홍수 기간 같았던 시간이 지나, 이제는 가뭄기가 왔다.


이민자와 그의 부모들은 중간 없이 늘 홍수 아니면 가뭄이다.


한국에 있었더라면 부모님은 부모님대로의 생활을 유지하며, 매일이든, 주에 몇 회이든, 종종 우리 생활에 도움 주고 치고 빠질 수 있을텐데, 딸이 이민을 가서 손녀를 보려면 한국에서의 모든 삶을 다 내려놓고 장기간 씩 오셔야한다. 이렇게라도 해주실 수 있는 상황에 감사하고 또 뒷받침 되는 건강이 있어 또 감사하지만 이렇게 서로 못 보는 기간이 너무 길어질 때면 이민 생활에 대한 후회가 오곤 한다.


앞으로 획기적인 이동 수단이 발달이 되어 지구 반대편을 장대높이뛰기 하듯 훌쩍훌쩍 건너 다니면 좋겠지만, 그 때까지는 다음에 만날 홍수 기간을 기다리며 열심히 이 시기를 견디는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엄마, 아빠, 지난 몇 개월간 고생 많으셨어요!


내년 여름에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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