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sylviatis
Sep 04. 2024
문은 무보다 강하다
피 안 내고 찌르는 재미에 맛들다.
나는 고등학교 1학년을 마치고 2학년 때에 딱 1년을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보내고 왔다. 그래서 친구들 고3으로 올라갈 때 나는 고2로 복학을 했다. 1년을 미국에서 놀다가 와서 바로 고3 수험생활을 해낼 자신도 없었고, 재수를 한다 손치더라도, 학원이나 다른 사설 기관에서 하느니 그냥 학교를 1년 더 다니는 게 낫겠다 싶어 고2로 복학하는 것에 별다른 거부 반응이 없었다.
3월에 학기 시작하기 전에 공립학교에서는 봄방학 기간 동안 특별 보충수업을 했다. 아직 고2로 올라가기 전 마지막으로 몇 주가 남았어서 내가 미국으로 가기 전에 1학년이었을 때 1반이었다고, 다시 돌아갔을 때도 1반으로 들어갔다. 동급생이 된 후배들이 있는 1반은 원래 분위기가 그렇게 쎄했던 것인지, 아니면 나의 등장으로 인해 찬물이 껹어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옆에 앉은 짝꿍이랑 내 뒤에 앉았던 친구 둘 빼고는 나한테 와서 말 거는 애가 하나도 없었다. 으레 복학생이라고 하면 다들 사고 쳐서 온 줄 알기 때문에 같이 어울리기 싫었을 것도 이해도 됐지만, 미국에 1년 갔다 오느라 그리 됐다는 설명에도 딱히 마음을 열고 싶진 않았는지, 내 옆과 뒤로 앉은 친구들을 제외하면 나는 투명인간이었다. 새로 반편성이 되어 2학년으로 올라가면 괜찮아질 것 같았고, 또 한 살 어린 친구들이랑 굳이 나도 친구 먹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그 상태도 나쁘지는 않았다.
봄방학 기간 동안의 수업 진행은 정규 수업 진도를 모두 빼놓은 상태였기에 선생님 재량으로 수업을 짜서 진행이 됐다. 진도에 대한 압박감이 없어서 보통 다소 널럴한 분위기도 있었지만 수능이나 이후 교과 과정과 연결이 된 것들로 모든 과목 선생님들이 창의적으로 진행을 해주셨는데, 유독 한 선생님만 아주 그 시간을 특이하게 메꾸셨다.
영어를 가리켰던 김은희 선생님.
당신 신혼여행 홈 비디오 찍은 것을 교실 앞 티비에 틀어주며 "김은희, 미모를 좀 보십시오! 김희선 뺨치지 않나?" 하며 보여주지 않나, 아무도 묻지 않은 본인 첫사랑 이야기를 해주지 않나... 정상은 아닌듯했다. 적응하기는 어려웠지만, 반 애들은 이미 익숙한 듯해 보였고, 또 몇 주만 참으면 3월에 개학하고 새로운 반으로 올라갈 테니 빨리 시간이 가기 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내둥 모든 게 본인 위주로 돌아가시던 양반이, 어느 순간 그제사 뉴페이스가 있다는 걸 감지하고 갑자기 나를 불러일으켜 세워 호구조사를 시작했고 내가 미국에서 일 년 살다 왔고, 버지니아 주에 있다가 왔다는 걸 알게 되셨다.
그 후, 선생님은 나를 "버지니아~!" 라며 비아냥대는 말투로 불러 세워서 본문을 읽고 해석하라고 했다. 의역을 하면 직역하라고 꼬투리를 잡고, 직역을 하면 "이런 건 미국에서 못 배워 왔나 봐?"라며 비아냥거렸다. 미국에서 1년 산 것이 나의 전부가 아니라, 사실 유년기 대부분을 미국에서 보냈기 때문에 나는 발음이 좋은 것이었는데, 선생님은 내가 마치 일부러 굴리기라도 한다는 듯이, 공개적으로 비웃으며 망신을 주셨다. 사실 나도 발음 때문에 그동안 늘 영어 수업시간에는 되도록이면 나대지 않고, 영어 선생님들께서 뭐라고 하시든 토를 달지 않았다. 그리고 공부를 못하더라도, 선생님들에게 예쁨을 받는 학생인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내가 미국에서 살았던 것으로 인해 선생님들의 권위나 가르킴에 반하는 짓은 안 하려고 하고, 더 겸손한 자세로 임했다. 선생님들께서도 그 점을 참 예뻐하셨고, 특출 난 우등생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는 늘 모범생이었다. 그랬던 나였는데, 이렇게 선생님으로부터 미운털이 박혀 놀림을 당하고 있는 게 견디기 힘들었다. 그래서 선생님이 비아냥 거려도 헤죽거리고 "아, 제가 틀렸네요~"하고 싹싹하게 굴었고, 선생님이 시키면 군말 없이 일어나서 시키는 대로 굴렀다. 그러면 선생님이 언젠가는 좀 누그러질 것이라 생각을 했기 때문에... 그런데, 선생님은 날로 더해지면 더했지, 나아지는 기미가 안 보였다.
복학생 언니로서 한 살 어린애들이랑 살아가야 하는 나의 남은 고등학교 생활도 있는데, 그놈의 '버지니아'랑 결부되어 지어진 내 별명은 (나는 유년기를 메릴랜드에서 보내서, 메릴랜드면 모를까 버지니아라니...!) 다른 애들에게 나에 대한 위화감만 너무 조성하는 듯했고, 정말 불편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수업 끝나고 앞 문으로 나가시는 선생님에게 쫓아갔다. 그리고 "선생님, 저 아무래도 같은 반 아이들이 저를 더 불편해할 것 같아서 그런데요, 저도 다른 애들처럼 제 이름 불러주세요. 저만 선생님께서 애칭으로 불러주시니까 애들이 좀 질투하는 것 같아요." 하고 말씀을 드렸더니, 바로, "어, 그래 알겠다~"라며 의외로 너무 쉽게 이해를 해주셨다.
그런 줄 알았다.
그 다음 시간에 선생님이 들어오셨을 때는 뭔가 달라졌을 것을 기대했었는데, 선생님은 어김없이 나를 "버지니아~"하고 불러 세웠고, 반 애들 앞에서 말씀하셨다. "버지니아가 아무래도 미국에서 1년 살다 와서 한국에서의 예의를 까먹었나 본데, 나더러 '버지니아' 그만 불르라대? 내가 '버지니아'라고 부르는 거에 너네 질투심 드니?"라고 반 아이들이게 물었고, 반 아이들 앞에서 사회적으로 매장시켜버렸다.
3월이 되어 드디어 2학년으로 올라가고, 새로운 반 편성으로 그나마 학교 생활이 수월해졌다. 더 다행스러운 건 김은희 선생님은 고2 영어를 담당하지 않아 더 이상 마주칠 일이 없었다. 언니가 돼서 한 살 어린 친구들 앞에서 공부 못하는 꼴 보이기도 그렇고, 또 정신 차리고 공부해야 서울로 대학을 갈 수 있기에 공부도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해 시에서 열리는 영어 에세이 쓰기 대회가 있었는데 이미 전교에 영어로 소문이 나있던 차라 나도 얼떨결에 참가 신청을 하게 됐다.
에세이 대회는 외국어 고등학교에서 열렸는데, 시내의 고등학생들이랑 모르는 교실에서 4절지 크기의 갱지에 에세이를 손으로 적어내는 방식이었다. 진행하시는 담당 선생님께서 들어오셔서 칠판에 몇몇 개의 주제를 적어주고 가셨고, 그 중 한 가지를 선택해서 에세이를 써내는 방식이었다. 24년이나 지난 기억이라 지금은 어떤 주제가 나왔었는지 다 기억은 안 나지만,
"좋은 선생님이 되기 위한 요건에 대해 서술하시오."가 딱 눈에 들어왔다.
'이거다.'
미국식 에세이 쓰기 훈련은 지난 해에 미국에서 많이 되어있어서, 주제를 잡고 난 이후에는, 여는 글, 그리고 그 주제를 뒷받침 하는 근거 셋을 각 문단으로 하나씩 쓰고, 닫는 문단을 쓰도록 틀을 짰다. 좋은 선생님이 되기 위한 요건에 대한 가장 첫 번째로 생각나는 아주 나쁜 예시가 있지 아니한가!
"좋은 선생님이 되기 위해서는 학생의 인성을 존중해주어야 한다."로 시작하고 그에 대한 나쁜 예시로 김은희 선생님이 한 짓들을 적었다. 선생님으로서 한 아이를 골탕 먹여 자진해서 왕따를 시키지 않아야 하며, 굳이 학생이 원하지 않는 별명을 지어, 째질 듯한 고음으로 "버지니아~"하고 불러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적었다. 술술술 풀어나갔고, 대회에 참가한 긴장감보다는 무언가 풀어냈다는 시원함으로 에세이를 제출하고 대회장을 나왔다.
당선.
참으로 감사하게 나의 에세이가 당선이 되었고, 대학 갈 때 한 줄 쓸 수 있겠다는 성취감도 잠깐, 그렇게 고등학교 2학년이 지나고, 나에게도 고3이라는 시간이 다가왔다.
눈이 나빠서 교실 맨 앞 줄, 창가 옆 자리는 내 지정석이 되었다. 복학생 언니로서의 특권이 이런 것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나? 점심시간이 지나고 쉬는 시간에 창밖을 멍하니 내다보고 있었는데, 앞 문에서 누가 나를 불렀다. 한문 선생님.
고 3은 한문을 더 이상 배우지 않아서 선생님께서 나를 찾아오실 이유가 전혀 없는데 왜 나를 찾아오셨는지 궁금도 하고, 내가 뭘 잘못했나 덜컥 겁이 난 상태로 선생님을 따라 교무실로 갔다. 선생님께서 나를 부르신 이유는 다름 아니라 작년에 내가 영어 에세이 대회에 나가서 수상을 한 에세이를 교지에 싣고 싶으시다고, 빈 하드 디스크를 하나 주시며 쓰라고 하셨다. 그래서 선생님께, 그것은 이미 수기로 작성해서 제출하여 원본이 없다고 말씀드리니, 기억을 되짚어 다시 써서 달라고 하셨다. 길이길이 남을 교지에 나의 에세이가 실린다는 영광은 있지만, 에세이를 다시 적어서 내야 하는 귀찮음도 있어 다소 고민은 됐지만, 결국 써서 드렸다.
교지가 언제 발행하는지도 사실 관심 없고, 그저 내 코가 석자인 고3 수험생활을 하루하루 반복하며 지내던 어느 날 갑자기 앞문으로 김은희가 나타났다. 우리 학년은 담당하지 않아 더 이상 볼 일이 없을 줄만 알았던 그 김은희 선생님 말이다. 나더러 교무실로 오라고 했다. 영문도 모른 체 교무실까지 따라갔고, 선생님은 손수 접이 의자도 펼쳐주며 자기 옆에 앉아보라고 했다. 선생님은 본인 책상 앞에 있는 교지를 들고 나의 에세이가 적혀있는 부분을 펼쳐 보이며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교지가 나와서 보다가, 영어 에세이가 있어서 너무 반가워서 읽던 도중에 내 이야기가 있는 것 같아서 너무 놀랐어. 나는 좋은 선생님이 되기 위해 늘 고민을 하고, 목사님께도 자문을 구하고 다방면으로 노력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너의 글을 보고는, 내가 '하이톤으로 비아냥대듯' 너를 불렀다고..." 라며 손이 파르르 떨리고 울먹이셨다.
그 후, 변명인지 사과인지 모를 말을 한참 하시기에 조용히 듣다가,
"저 화장실 청소 당번이라 가봐야 하는데요.. 말씀 끝나셨으면 저 이만 일어나도 될까요?"라고 했고, 그렇게 교무실을 빠져나왔다.
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
글 쓰는 재미를 언제 느꼈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이 긴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서 설명을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