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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크와팩트 - 후기

손쉬운 거짓의 시대를 건너는, 너무나 고단한 합리성의 윤리

by 비읍비읍

이번에도 추천으로 시작된 책이다.


제목과 표지부터 강렬했는데, 내용도 역시 강렬했다. 처음은 강렬하고, 갈수록 증거가 증착되기 시작한다. 담담하게 현상들을 꼬집으며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안하는 것도 감명 깊었지만, 이토록 세상에는 꼬여 있는 사실(팩트)과 거짓(페이크)이 난무했던가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아내와 함께 성수동의 한 북카페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곳에는 자유롭게 방명록처럼 글을 남길 수 있는 노트가 세 권 놓여 있었다. 그중 한 권은 읽은 책을 소개하고 추천하는 용도로 쓰이고 있었는데, 우연히 이 책의 제목을 발견했다. 『페이크와 팩트』. 어떤 이는 고등학생 필독서로 지정되어야 한다고까지 썼다. 아직 완독하지 못한 시점이었지만, 나 역시 그 말에 깊이 공감했다.


읽는 내내 머릿속이 핑핑 돌 만큼 번역투 문장과 개념어들이 난무했지만, 결국 완독했고, 기꺼이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책이 되었다. 사실 지금까지 읽은 책 중에서도 내용은 너무 좋은데, 뇌로 인지하기 어려웠던 책이 딱 두 권 있었다.


『웃는 남자』와 『정의란 무엇인가』.


순수 투입시간만 보면 페이지당 5분은 넘게 걸린 책들. 이 책은 그런 책들에 비견될 만큼 어려웠지만, 끝내 읽어냈다는 점에서 내겐 뿌듯한 도전이었다. (500페이지라고 했을때 거의 40시간이나 걸린것이다 ;;)


여하튼 어렵풋하게만 인지하고 있던 '페이크와 팩트'의 구분좌를, 사례들을 통해 명확히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기존의 것에 대한 신뢰를 지키기 위해 어떤 거짓말이 동원되는지, 음모론이 왜 더욱 강력해 보이면서 쉽게 지지를 얻게 되는지, 기계적 중립을 지킨다는 것이 어떤 병폐를 가져오는지, 무조건적인 통계적 접근이 얼마나 부정확한 정보를 주는지. 그것을 이 책은 각각의 장에서 풀어낸다.


각 장의 제목만 나열해봐도, 이 책을 읽으며 내가 받은 수많은 감명과 혜안을 손쉽게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그것들을 토대로 케이스 스터디를 진행해나간다면, 앞으로 우리가 가짜 뉴스를 판별하는 마음속 기준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아, 재밌네' 하고 지나치는 책이 아니다. 경각심을 가져야 하고, 그 경각심에 머무르지 않고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가짜인지 판별한 뒤, 그것을 사회에 환원하려는 실천이 이어져야 한다.


문장 하나하나가 복잡하고 즉각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지만, 전체적인 구성으로 보면 이렇게 기승전결이 명확한 책도 드물다. 용두사미가 아니라, 용두용미의 책이다. 끝까지 흔들리지 않고 말하고자 했던 바를 밀어붙인다.


소음과 신호라는 표현도 나온다. 울리기만 하는 것은 소음이고, 그 안에서 우연한 패턴을 찾아내는 건 페이크에 가깝다. 지금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적 사건들 또한 그 범주에 들어갈 것이다. 수시로 나오는 여론조사는 리얼미터, 한국갤럽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달고 있지만, 들여다보면 응답률이 10%도 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럼에도 표본추출의 과학성을 앞세우며 통계적 대표성, 편향성 등을 운운한다. 과연 적절한 통계치라고 할 수 있을까? 발표해서는 안 될 수준의 통계치를 가지고,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발표함으로써 그 결과에 맞게 사회 전체의 인식을 유도하고 있는 건 아닐까?






1. 사기꾼의 세상, 청소부의 세상


책을 덮고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요즘 뉴스에서 자주 마주하는 익숙한 장면이었다. 거짓말을 한 쪽은 당당하고, 그것을 바로잡으려는 쪽은 오히려 온갖 법과 규정을 정확하게 지킬 것을 요구당하고 있다. 『페이크와 팩트』는 정확히 그 어그러짐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책이다.


동일한 정보, 같은 말. 그러나 의도에 따라 그것은 완전히 다른 진실로 바뀐다. 누군가는 기계적 중립이라는 이름으로 손을 씻고, 누군가는 그 틈에 발을 담그고, 온 세상을 진흙탕으로 만든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망가진 것을 치우기 위해 조용히 무릎을 꿇는다.


그 무릎 꿇은 자들을 생각했다. 정의롭기 때문에 더 많은 절차를 지켜야 하고, 투명하기 때문에 더 많은 비난에 노출되는 사람들. ‘방귀 뀐 놈이 성낸다’는 속담이 이토록 정확하게 와닿는 시대가 또 있었을까.

그런 장면들을 보고 있으면, 속이 터지는데도 말은 조심스럽게 골라야 하고, 감정은 억제되어야 하고, 뭘 하나 바로잡는 데에도 온 힘이 다 빠진다. 그럴 때마다 떠오른다. 나도 저 무릎 꿇은 자들과 같은 마음을 품고 있었던 적이 있지 않았나. 그리고 그 마음을 계속 지켜낼 수 있을까, 라는 불안.



2. 분석적 사고는 기술이 아니라 우리의 과제다


이 책이 진정으로 독자에게 요구하는 건 기술이 아니라 태도다. 분석적 사고는 단지 공부를 많이 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삶에서 끊임없이 의심하고 검토하려는 자세에서 비롯된다. 이 책의 진정한 미덕은 바로 그 지점을 서늘할 만큼 명확히 드러낸다는 데 있다.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는 동시에 불신이 넘쳐나는 시대이기도 하다. 어떤 정보는 선명하게 보여서 더 믿고 싶어진다. 하지만 『페이크와 팩트』는 거꾸로 말한다. 선명한 것이 아니라, 불편한 것에 진실이 숨어 있다고. 그리고 그 진실을 마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분석하는 태도, 검증하는 습관이다.


어릴 적 읽었던 만화책이 떠오른다. 누가 누구를 속였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누가 끝까지 진심을 지켰는지가 나중에서야 드러나는 이야기들. 단순했던 그 이야기의 구조가, 지금은 너무나 복잡해진 것 같다. 그리고 그 복잡함 속에서도 진심에 다가가려면, 우리는 불편한 정보일수록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는 걸, 점점 더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저자는 반복해서 말한다. "사실은 민주적이지 않다." 이는, 진실이 다수결로 정해지지 않는다는 선언이다. 진실은 증거를 통해 검증되며, 그 과정은 언제나 피곤하고 비효율적이며 복잡하다. 그 복잡함을 견뎌낼 수 있는 독자만이, 진실에 다가갈 수 있다.



3. 왜곡과 변주의 기술


저자는 단순히 "가짜 뉴스가 위험하다"고 경고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수학, 물리학, 과학사, 정치학 등 다양한 학문적 배경과 실제 사례를 통해 왜 인간은 쉽게 속고, 왜 가짜가 진짜보다 더 쉽게 퍼지는지를 조목조목 짚어낸다.


1) 수학적으로는 베이지안 확률모형을 예로 들며, 사람들이 기존에 믿고 싶은 신념에 유리한 정보만을 취사선택하는 확증편향을 설명한다. 이는 가짜 정보가 왜 특정 집단 안에서 그렇게나 끈질기게 살아남는지를 수학적으로 보여준다.


2) 물리학에서는 양자역학의 '관측자 효과'를 언급한다. 관찰자의 의도가 결과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 원리를 통해, 정보가 결코 중립적이지 않으며, 그것을 전달하는 사람의 태도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변질될 수 있음을 설명한다.


3) 과학사에서는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교회의 압박 속에서도 과학적 진실을 주장했던 사례를 든다. 이는 권력과 진실의 관계, 그리고 진실이 때때로 얼마나 쉽게 탄압받는지를 강하게 시사한다.


4) 정치학에서는 브렉시트를 사례로 든다. 데이터 조작과 감정적 선동이 국민투표의 결과를 어떻게 오도했는지, 팩트가 아닌 프레임이 주도하는 민주주의의 현실을 꼬집는다.


이처럼 『페이크와 팩트』는 다양한 학문적 도구를 동원하여, 우리가 접하는 수많은 왜곡의 층위를 스스로 탐색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독자를 이끈다.



4. 가짜가 판치는 시대, 그리고 내 시선


책은 다양한 사례들을 소개한다. 백신과 자폐의 연관성을 주장했던 논문 하나가 얼마나 오랫동안 반(反)과학적 담론을 견인해왔는지, 암을 생각으로 고칠 수 있다는 주장이 얼마나 많은 생명을 위협했는지. 그리고 기후변화 부정론자들이 조작된 데이터와 선택적 사실만으로 대중의 감각을 마비시켜온 방식까지.


나는 이 사례들을 읽으며 단순한 정보 오류가 아니라, 고의적인 사회적 범죄라고 느꼈다. 누군가는 의도적으로 반지식의 옷을 입히고, 또 누군가는 그걸 소비하며 마음의 안식을 얻는다. 그리고 그 중간에 선 대중은 점차 진실에 접근하려는 시도 자체를 포기하게 된다.


이 책은 그래서 경고를 넘어서 책임을 묻는다. 나는 지금까지 어떤 정보에 침묵했고, 어떤 프레임에 무기력하게 휩쓸렸는가? 그 질문이 꽤 오래 남았다.



5. 믿음과 피로, 그리고 이 책의 윤리


『페이크와 팩트』는 더 이상 정보가 없어서가 아니라, 정보가 너무 많아서 무엇을 믿어야 할지 모르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묻는다. 결국 가장 피로한 존재는 ‘합리적인 독자’다. 검토하고 의심하고, 때론 반박하며 다시 생각해보는 그들은 종종 '까다롭다'는 말을 듣는다. 하지만 그렇기에 우리가 여전히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다.


이 책은 과학이라는 언어로 진실을 이야기하지만, 그 핵심은 윤리에 있다. 비판적 사고는 머리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임을, 이 책은 묵직하지만 단호하게 전한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떠올린 장면은 윤석열 탄핵 심판이었다. 절차적 정당성을 내세워 진실을 회피하는 언론과 정치권의 태도는, 마치 이 책의 한 구절이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진실은 복잡하고 불편하다. 그래서 자주 외면되고, 그 외면은 곧 부패로, 침묵으로, 공모로 이어진다. 우리는 그 흐름을 멈추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비록 느리고 고단할지라도, 불편한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 『페이크와 팩트』는 그런 사람들에게 건네는 단단한 격려였고, 동시에 나 자신에게 던지는 다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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