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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이란 무엇인가 - 후기

스스로 옳다고 믿는 감정의 이름. 하지만 그 감정은, 정말 내 것일까

by 비읍비읍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었다.

아마도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했고, 지지부진한 시간들 속에서 '읽어 내고야 말겠다'는 의지로 완독했다.


모든 여정을 마무리하는 장에 이르러서야, 내가 지금까지 보고 이해하고 공감했던 내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됬다. 짜릿함이라는 표현이 꼭 맞을 정도로, 이 책의 후반부에서 작가가 정리한 내용이 나로 하여금 일종의 성취감을 느끼게 했다.




양심이란, 많은 경우 스스로를 옳다고 믿는 이들의 방패로 쓰인다. 우리는 그 단어가 붙은 판단은 일단 옳고, 선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작가는 『양심이란 무엇인가』에서 묻는다. 그 ‘양심’은 정말 우리의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 주어진 것인가?


우리는 양심을 마치 내면 깊숙이 존재하는 도덕의 나침반처럼 여긴다. 누군가 “양심에 따라 행동했다”고 말하면, 그 선택은 자동적으로 숭고함을 부여받는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통념에 강하게 도전한다. 양심은 선천적인 본능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길들여진 감정 반응이며, 사회가 요구한 ‘이상적인 도덕’을 개인이 스스로 내면화하도록 설계된 결과물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통찰은 특히 현대 국가라는 구조 속에서 양심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들여다보며 더욱 선명해진다. 국가가 요구하는 의무나 복종을 양심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방식은 아주 정교하고도 오래된 전략이다. 군 복무, 납세, 혹은 특정한 정치적 태도까지도 양심의 언어로 포장된다. 스스로의 판단이라 믿었던 많은 선택이, 실은 제도적으로 설계된 판단이었다는 사실은 인간의 도덕성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양심은 인간의 본능인가, 설계된 반응인가


양심이라는 감정은, 내 안에서 자연스럽게 솟구치는 게 아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양심껏 행동하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선생님도, 부모님도, 심지어 광고 속의 나레이션도 그 말을 했다. 그 말은 늘 옳은 선택을 하라는 말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옳음’은 늘 정해진 형태를 가리켰다. 이 책을 읽고 나서야 나는 깨닫게 되었다. 양심은 ‘느껴지는 감정’이 아니라, ‘느끼도록 배운 감정’이라는 것을.


작가는 이 감정을 ‘설계된 반응’이라 표현한다. 국가나 종교, 제도가 요구한 가치 기준이 ‘스스로 판단하는 것처럼 느껴지도록’ 사람의 도덕 감각을 조정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이데올로기의 내면화”라 말하지 않는다. 대신 그것을 “정서적 습관의 훈련”이라 한다. 그리고 이 훈련은, 우리의 의식이 자리 잡기 전에 이미 시작된 것이다.


현대 국가가 특히 능숙하게 다루는 영역은 바로 이 '자발성의 착시'다. 누군가 "나라를 위해 죽을 수 있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의 선택을 고귀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 결단이 어디서부터 만들어졌는지를 따라가다 보면, 교육, 미디어, 군사 문화, 법률 제도의 프레임이 조용히 그 뒤에 놓여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양심에 따라 행동한 것”이라는 말은 종종, “내가 오래도록 훈련받아온 감정에 따라 반응했다”는 말로 바꿀 수 있다.


근원적 선호에 붙는 이름표


이 책이 말하는 가장 불편한 진실 중 하나는, 양심이 '진실한 내면'이 아니라, 시대가 요구한 ‘정당성의 장치’였다는 점이다. 전쟁을 지지한 사람과 반대한 사람 모두가 자기 양심을 따랐다고 말할 수 있다. 복종과 저항, 순응과 반발 모두 양심이라는 이름 아래 정당화될 수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느 쪽이 더 옳은가가 아니라, 누가 그 ‘옳음’을 정의했는가가 된다.


그래서 책에서는 양심을 이렇게 분류하기도 한다.

소크라테스의 양심, 기독교에서의 양심, 마키아밸리의 양심, 헤겔의 양심, 니체의 양심, 프로이트의 양심, 일본의 양심, 중국의 양심, 나치의 양심, 자연에 대한 양심, 양심적인 건강, 로봇의 양심, 뇌과학 관점에서의 양심

작가는 양심을 고정된 실체가 아닌 작동 방식의 문제로 본다. 어떻게 작동하는가, 누구를 향해 작동하는가, 그리고 무엇을 침묵시키는가. 이 질문 없이는 양심은 가장 무서운 도구가 되기도 한다. 그것이 공권력의 정당화가 되고, 전쟁의 동기가 되며, 차별의 근거가 되는 순간을 우리는 수없이 보아왔다.


양심은 타고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주입되는 것이라는 점. 마치 세상이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생각하게 만든 후, 그 결과물에 “이건 네 양심이잖아”라고 이름 붙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쯤에서 나는 다시 한번 멈추게 된다. 지금까지 내가 옳다고 믿어온 감정은 과연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그 감정은 정말 내 안에서 자생한 것일까, 아니면 오래전부터 반복된 훈련 속에서 길들여진 결과일까? 어쩌면 내가 느끼는 죄책감조차, 누군가가 나를 통해 작동시키고자 했던 감정일지도 모른다.


양심은 결국 우리에게 익숙한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익숙한 것이 반드시 선하다는 보장은 없다. 그러니 가끔은 양심을 의심해야 한다. 그게 진짜 양심이 작동할 수 있는 출발점일지도 모르니까.


소크라테스부터 로봇 시대까지, 양심은 명확히 정의되지 못한 채 각기 다른 모습으로 존재해왔다. 아마 앞으로도 '양심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답을 얻기는 어려울 것이다. 양심을 정의하는 것보다 양심을 가진 로봇이 더 먼저 등장할 것이라는 아이러니도 이와 같다(제작자의 근원적 선호가 반영될 것이기에).

돌아보면 책은 제목에서부터 '양심이란 무엇인가'라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다. 책 전반에서 양심이 무엇인지에 대해 심층적으로 파고들고, 결국 정의하기 어렵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 책의 목적 자체가 양심이 어떤 모습으로 3000년 이상을 관통하고 있는지에 대한 여정이라고 하니, 단박에 내 모든 수고로움이 깨달음 비슷한 것으로 보상받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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