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돼지의 왕 - 후기

'괴물'이 되기로 한 아이들, 혹은 되지 못한 우리들

by 비읍비읍

2011년에 개봉한 애니메이션 영화 『돼지의 왕』을 2025년에 다시 보았다. 이제는 넷플릭스에서도 볼 수 있을 만큼 시간이 흘렀지만, 유독 이 작품만은 손이 가지 않았다. 아마도 포스터에서 풍기는 어떤 ‘차가운 절망감’이 부담스러웠던 것 같다. 하지만 우연히 접한 두 번의 감상은 그 시간을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고 느끼게 했다. 처음 봤을 때는 몰랐던 복선과 서사가, 두 번째 감상에서는 선명히 다가왔다. 그중에서도 첫 장면, 샤워기 아래서 울고 있는 경민의 얼굴과 15년 전 철이의 괴물 같은 얼굴이 겹치는 컷은 이 영화가 처음부터 되돌릴 수 없는 서사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영화의 첫인상은 ‘이상하게 불편하다’였다. 복잡한 감정으로 가득 찬 경민의 표정, 엉켜 있는 시공간, 죽은 아내와 옛 친구의 대면, 그리고 이어지는 15년 전의 기억들. 처음 볼 때는 그저 경민이 종석을 만나 중학교 시절을 회상하는 이야기로 여겼다. 하지만 두 번째 감상에서는 경민의 모든 대사에 이상한 어색함이 밴다는 걸 느꼈다. 그의 말투, 대화의 흐름, 거짓된 공감. 우리는 경민을 따라가고 있는 줄 알았지만, 실은 철이를 추적하고 있었다.


경민은 왜 종석을 만나려 했던 걸까. 왜 하필, 지금. 처음부터 다시 영화를 보면 이 질문이 영화 전체를 지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목적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자신 안에 남은 죄의 기억을 처리하기 위한 마지막 실천이다. 그 실천의 결말은 다시 중학교 옥상으로 향하는 발걸음이며, 우리는 그 끝에서 아이들이 괴물이 되어가는 모습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




개와 돼지, 그리고 괴물로서의 선택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나는 네이버 영화 후기에서 가장 많은 공감을 받은 글을 우연히 읽게 되었다. 그 글은 '용기 있지 않던 우리들의 중학교 시절을 떠올리게 해서 굉장히 불쾌했다'고 했다. 나는 깊이 동감했다. 그리고 그 글 아래 달린 수많은 댓글들을 보며, 내가 채 인지하지 못했던 의미들이 영화 안에 숨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영화는 인터넷 댓글을 통해서조차 나의 사유를 확장시켰다. 그것이야말로 영화가 사회적이 되는 방식 아닐까.


특히 댓글 중 하나는 이 영화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비유를 제시했다. '개와 돼지'라는 표현이었다. 가만히 있으며 그저 살만 찌우는 돼지 — 자신을 위한 살이 아님에도 이를 인지하지 못하는 존재. 반대로 어떤 행동을 해도 용서받는 개 — "그럴 수도 있지", "너 째째하게 왜 그래"라는 말로 언제나 변호되는 존재. 중요한 건, 누가 돼지인지 개인지는 본인이 결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개들은 돼지가 아님에도 누군가를 돼지로 규정하고, 그렇게 체제를 공고히 만든다. 소수의 개들을 만든 건 시스템을 장악하기 위해 사람들이 묵인한 작은 스캔들이었다.


영화는 이런 구조를 배경으로, 철이라는 인물을 내세운다. 철이는 이 구조에서 '괴물'이 되기로 결심한 인물이다. 그는 더 이상 돼지로 남기를 거부했고, 동시에 개가 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가 선택한 길은 괴물이다. 더는 누구에게도 정당화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그는 중학교 시절을 추억으로 남기게 만들지 않기 위해, '좋았던 시절'로 미화될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 철저히 기억해야만 하는 공포로 재구성하려 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바로 그 유명한 철이의 대사다.


"니네가 10년이나 20년이 지나 어른이 됐을 때 지금을 생각하면서, 야 그때 참 좋았지 않냐, 그때가 그립다, 이딴 소리를 할 게 너무 무서워. 석웅아 잘 들어. 아마 너한테 그런 미래는 없을 거다. 네가 나중에 이때를 생각하기도 싫을 만한 중학교 시절로 만들어 줄게. 어?"


이 말은 철이가 단순히 분노에 휩싸인 소년이 아니라, 철저히 구조를 인식하고 있었던 인물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이 말이 지나치게 철학적이라는 평도 있지만, 나는 다르게 느꼈다. 중학생이었을 때 나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시간이 지나면 이 고통스러웠던 시절도 아름다운 기억으로 포장될까 봐 두려웠던 감정. 그것은 어른스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시기를 온전히 살고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절박한 사유였다.



괴물이 되지 못한 자들, 왕으로 남기를 바란 자들


철이는 괴물이 되었지만, 다른 아이들은 그러지 못했다. 종석과 경민은 피해자였지만, 적극적인 저항자가 되지 못했다. 철이에게 감정적으로 동조했지만, 그와 함께하지는 못했다. 그들은 철이를 ‘대장’, ‘왕’으로 추대했지만, 실은 그저 지켜보고 싶었을 뿐이다. 대신 싸우기보다는, 철이의 파괴가 자신들의 삶을 정화해주길 바랐을 뿐이다.


경민은 철이를 배신한다. 폭력의 책임을 철이에게 전가하며 자신을 하수인으로 규정한다. 종석은 조금 다르다. 그는 끝까지 철이를 왕으로 기억하고자 한다. 그래서 철이가 스스로 괴물이 아닌 돼지가 될 위기에 처했을 때, 그를 옥상에서 밀어버린다. 왕은 죽었지만, 그 죽음은 기억 속에서 영원히 권위로 남는다. 종석은 철이의 실존보다 그 상징을 지키려 한 것이다.


이 부분에서 나는 멈칫하게 된다. 과연 나였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철이처럼 싸웠을까, 종석처럼 방관했을까, 아니면 경민처럼 변명했을까. 솔직히 말해, 나는 경민에 가까웠을 것 같다. 무언가를 부정하고 싶어서, 그것이 너무 무서워서, 거짓된 우정을 가장했을 것이다. 그래서 경민이 가장 낯부끄러우면서도, 가장 현실적인 인물처럼 느껴졌다.



지금의 나는 어떤 어른인가


나는 지금 중학생이 아니다. 학창 시절의 구조는 지나갔고, 나는 안전지대에 서 있다. 하지만 언젠가 나와 가까운 누군가가 그 시기를 살아가게 된다면, 나는 어떤 어른일까. 괴물이 된 아이를 비난할 것인가, 아니면 조용히 괴물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방관할 것인가. 혹은, 그 아이가 돼지가 되지 않게 싸울 수 있을까?


『돼지의 왕』은 그런 질문을 남긴다. 이 영화는 단순한 복수극이나 학교폭력의 기록이 아니다. 구조에 맞서는 자와 침묵하는 자, 그리고 그 침묵의 결과를 보여주는 아주 고통스러운 우화다.


우리는 모두 철이를 잊었고, 종석은 철이를 밀었다. 하지만 어떤 존재가 '돼지의 왕'으로라도 남아주었기에, 우리는 그 시절을 다시 꺼내어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그렇게,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아주 명확한 언어로 남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양심이란 무엇인가 - 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