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목소리를 쓴다는 것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이후, 세간의 이목이 자연스레 그의 작품 세계에 집중되었다. 나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채식주의자』를 읽은 사람으로서 조용히 으쓱해졌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작가의 정수로 평가받는 작품들은 아직 접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이번엔 『소년이 온다』를 펼쳤다.
노벨상 수상 이후, 유튜브 알고리즘은 한강 작가의 인터뷰와 낭독회 영상들을 추천해주었고,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목소리와 태도를 자주 접하게 되었다. 나긋하고도 나른한 목소리, 조용한 태도는 오히려 "정말 책을 쓰는 사람답다"는 어떤 편견을 덧입히기도 했다. 그래서였을까. 『소년이 온다』의 담담한 문체를 읽어 내려가는 동안, 머릿속에선 한강 작가의 목소리가 조용히 읽어주는 듯한 기분이 따라붙었다.
『소년이 온다』는 단지 잘 쓴 소설이 아니다. 그것은 윤리를 품은 문장이고, '기억'을 기리는 형식이다. 한강은 이 작품을 통해 “잘 써야 한다”는 작가적 욕망을 뛰어넘어, “욕되게 하지 말아달라”는 5.18 희생자 가족들의 요청 앞에서 자신의 문장을 고쳐쓰고 고쳐썼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이 작품의 모든 구성은 기술적인 것이 아닌 도달해야만 하는 인간 존엄에 대한 문학적 헌정이라고 생각한다.
『소년이 온다』는 각 장마다 화자가 달라지며 이야기를 엮어간다. 이는 '역시 노벨문학상 수상자로군' 이라는 단순한 평가로 쳐다볼 일이 아니었다. 기교가 아니라, 5.18을 받아들여야 하는 수많은 주체들이 있음을 보여주는 장치다. 그날 광주에 있었던 사람들, 빨갱이로 몰렸던 사람들만의 일이 아니라는 듯, 역사의 파편을 공유하는 이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 비극을 소화해낸다.
"본인 생각과 안 맞으면 빨갱이"라며 배척하고, "본인들이 아니었으면 적화통일됐을 것"이라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에게 이 책은 묻는다. 당신들이 말하는 '자유민주주의'가 권력의 오용과 남용까지도 정당화하는 이름이었는지, 그것이 진정 '수호'였는지. 이 질문은 단지 과거를 향한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향한다.
이처럼 서사 안에 목소리의 다층성을 부여함으로써, 이 소설은 하나의 총체적인 목소리가 아니라 다중의 목소리로 진실을 복원하고 있다.
이 장은 가장 비극적인 형태의 서술이다. 이미 죽은 자의 시선은 신체를 떠난 의식의 파편을 통해 인간 존재를 역설적으로 증언한다.
“내 몸이라고 생각되는 것 위로 또 다른 몸이 포개진다. 고깃덩이처럼.”
시신을 열십자로 포개어 쌓는 행위, 썩고 타들어가는 죽은자들, 덤덤하게 '금속이 나를 꿰뚫었다'고 말하는 화자. 이 장의 화자는 이미 사망한 존재이기에 말할 수도, 느낄 수도, 어딘가로 향할 수도 없는 상태다. 다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기억을 붙드는 것뿐이었다. 그는 누군가로 남기 위해, 사라지지 않기 위해 복기한다. 하지만 그 기억이라는 것이 특별하고 아름다운 회상이 아닌, 그저 ‘일상’이라는 점에서 더욱 비극적이다. 내가 이전에는 곰곰히 생각해보지 못한 평범한 순간들이라서 더욱 머리에 그대로 그려지고, 이들이 평범한 삶을 살고있었음을 반증하는것 같았다.
이 장의 화자는 한 자리에서 맞은 일곱 대의 뺨을 일곱 날에 걸쳐 견디고 이겨내보려 애쓴다. 입안에 차오르는 피, 치아 끝에서 울리는 통증, 실핏줄이 터져 부어오른 볼과 흐르는 피를 간접적으로 느끼며, 이게 7일만에 이겨낼수 있는 것인지 걱정하게 됬다.
한뺨, 두뺨, 세뺨… 그렇게 사건이 있는 다음날들을 뺨으로 환원하여 살아간다. 하지만 이 서술은 단지 하루에 일곱 대의 뺨을 맞고 7일간 회복하는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여섯 번째 날이 되었을 때, 그는 말한다.
'이미 뺨은 아물어버려 통증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일곱 번째 날을 뺨으로 치환하여 이겨내려는 행위를 차마 하지 못한다. 즉, 그 마지막 날의 고통까지 끌어안는 일은 차마 하지 못한 것이다. 아프지 않다는 이유를 들며 고통의 마지막 한 조각을 그대로 묻어두게 되는데, 결국 '일곱 번째 뺨을 잊을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라는 고백에 다다른다. 나는 이것이 곧, 고통을 치유하고 마침표를 찍기까지의 과정을 끝내 밟아내지 못한 이의 고백처럼 느껴졌다.
왜냐하면 바로 다음에 나오는 장면 때문이다. 많은 독자들이 이를 이 책의 가장 백미로 뽑은것 같은은 문장이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518의 직접적인 당사자가 아닌 이 장의 화자가 맞은 뺨 7대 마저도 그대로 묻어두게 되는데, 당사자들은 장례식도 치르지 못했다. 그래서 화자가 앞으로도 뺨을 맞았던 순간들을 계속해서 복기하고 기억해내며 고통스러워하듯이, 당사자들 역시 그 일을 잊을수가 없게되는것이다. 고통의 크기는 다를지언정 개인적인 고통이 곧 당사자들의 고통으로 연결된다.
그래서 '일곱 번째 뺨을 잊을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는 말은, 완치되지 못한 기억과 애도의 지체된 완결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518 당사자들의 아픔이 어딘지 모르게 저 멀리에 있는것처럼 느껴졌었다면, 이 순간 마치 내가 겪었던 순간들처럼 가깝게 다가오게되었다.
육체적 고문이야말로 이 장의 외형적인 공포다. 손톱 밑 송곳, 볼펜으로 뼈를 으스러뜨리는 행위,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 방식. 그러나 너는 더 깊은 층위에 주목했다. 같이 도청을 지키고 항거하던 이들이 서로를 탓하게 되고 원망하게 되는 지점, 그 인간적 균열이 가장 잔혹하다고.
그리고 이 장에서 두 인물은 고백한다. “한때 우리는 유리 같은 영혼을 지녔다고 믿었다”고. 그러나 그 믿음은, 그 유리는 산산조각 났을 때 비로소 그렇게 고결한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아름답고 고귀한 것을 고귀할때 가치를 인지하는게 아니라, 깨지고 나서야 우리가 고결하다는 반증이 아니었냐고 묻는 모습이 나를 한없이 먹먹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때의 자신들을 '유리 같은 영혼'을 지녔다고 말하며 믿는건, 과거를 미화하면서 그나마 자신들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장의 화자는 노동환경에서 극한의 상황에 시달려야했었고, 광주에서는 당연한것들을 지키다가 모든걸 빼앗겨버린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헌법에서는 모두가 고귀하다고 보장하고 있고, 노동법은 각자가 정당한 권리를 갖고 있다고 하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이런 사례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피지배층을 억압하기위한 상층부의 논리에 불과하다고 느껴졌는데, 읽는 나마저도 시스템에 대한 회의가 들었다.
나는 특히 광주 상무대에서 사망자들을 태극기로 감싼 장면을 주목했다. 피 흘려 죽은 이들이 왜 태극기로 싸였을까. 졸속으로 진행되는 군사재판에서도 피고인으로 몰린 사람들이 애국가를 부르는 장면도 그러하다.
과거에 그저 사진으로만 볼때는 몰랐다. 왜 그들은 국가로부터 폭력을 당함에도 불구하고 애국가를 부르고, 잔혹하게 돌아온 시신이 담긴 관을 태극기로 싸매었는지.
그 장면은 역설적이다. 단순히 피해자라거나 억울하게 죽어버려 고깃덩어리가 되버린린 사람을 애도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위해 자신들은 행동했음을 보여주고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키기 위함이었다는것을 알게되었다.
이건 애국심이라기보다, 오히려 국가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되묻는 행위였다. 우리가 배제된 존재가 아님을 스스로 증명하기 위한 마지막 선언. 그래서 작가의 문장 한줄 한줄이 그들의 논리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욕보이지 않기 위한 문장의 윤리적 항변이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