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열정이 나에게도 다시, 후배들에게도 멀리
올해 초, 회사에 신입 직원이 들어왔다. 그는 업무에 임하는 태도부터 달랐다.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모습만 봐도 에너지가 느껴졌고, 그의 존재는 내게 묘한 자극이 되었다.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던가? 지금은 혹시 매너리즘에 빠진 건 아닐까? 스스로를 점검하게 만든 친구였다.
약 두 달 전, 사무실에 단둘이 남게 된 날이 있었다. 외근으로 모두가 자리를 비운 오후였다. 평소처럼 일만 하기에는 아쉬워 그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회사는 컨설팅 펌이 아니지만, 그가 걸어온 길은 명확히 컨설턴트라는 직업을 향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컨설턴트가 되기 위해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를 이야기해 주었고, 나는 놀라움과 흥미로움 사이에서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대화를 통해 알게된 것은, 치밀하게 계획된 과정을 성실히 밟아온 그가 얼마나 열정적인 사람인지 알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가 들려준 이야기는 시간의 역순으로 이어졌다. 마치 정해진 경로를 따라 단계를 밟듯이 말이다.
학회 안팎에서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외향성과 팀워크를 갖춘 사람이라는 인상을 남겨야 한다.
대학교 3학년 1학기에는 주요 컨설팅 학회에 진입해 본격적인 실무 프로젝트를 경험해야 한다.
대학교 1~2학년 때는 컨설팅 관련 선행 학회에 들어가야 한다.
SKY급 대학에 진학해 학벌이라는 최소한의 티켓을 확보해야 한다.
외고나 자사고에 진학해 학습 능력과 자기 주도성을 입증해야 한다.
중학교 3학년 1학기에는 특목고(또는 자사고) 입시 준비를 마쳐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은 단순한 스펙 쌓기가 아니다. 오히려 정답지처럼 공유되는 로드맵을 따라 치열하게 해내야 하는 커리큘럼이다. 그렇지 않으면 시작선에도 설 수 없다는 위기감 속에서, 그는 그 모든 단계를 하나씩 통과해왔던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한편으로는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두렵게 느껴졌다. 세상이 이렇게 치열하다면, 나의 아이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하지만 동시에, 이런 사람이 우리 조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자극이 되었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나고, 내가 책을 하나 추천해달라고 했을 때 그가 『케이스 인 포인트(Case in Point)』를 추천해주었다.
『케이스 인 포인트』는 세계적인 컨설팅 회사에 입사하기 위해 꼭 거쳐야 하는 '케이스 인터뷰'를 정면으로 다룬 실전 훈련서다. 저자인 마크 콘스탄티노는 하버드 케네디스쿨과 다트머스 대학을 졸업한 후 30년 이상 케이스 인터뷰 교육을 해온 인물로, 이 책은 그의 오랜 노하우가 집약된 결과물이다.
책은 컨설팅 면접에 출제되는 문제들을 유형별로 정리하고, 각각을 어떻게 접근하고 해석할지를 단계적으로 제시한다. 특히 수익성 분석, 시장 진입 전략, 인수합병(M&A), 조직 구조 개선 등 실제 MBB(맥킨지·베인·BCG) 면접에서 자주 다뤄지는 문제들이 실제 예제와 함께 등장한다. 피라미드 원칙에 기반한 논리 전개, 가설 기반 접근법, 이슈 트리 구성법 등도 상세히 다루며,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치 '논리의 체육관'에 들어온 듯한 느낌을 준다.
국내외의 후기들을 살펴보면, '컨설팅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읽어야 할 책', '두뇌 근육을 키우는 훈련서'라는 평이 많다. 단순한 취업준비서를 넘어, 문제 해결력 자체를 근본적으로 훈련시켜주는 책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래서인지 저자도 책 초반부터 "읽지 말고 풀어보라"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강조하며, 반복적인 사고 훈련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대표적인 연습문제로는 '서울에 자동차가 몇 대나 있을까?' 같은 가정 기반 추론문제가 있다. 정답을 외우는 게 아니라, 문제를 분해하고 가설을 세워 단계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이를테면 서울 인구수를 가정하고, 가구당 차량 보유율, 상업용 차량 비율 등을 곱해가며 '합리적인 수치'를 만들어내는 방식이다. 또 다른 예로는 '한 해 동안 뉴욕시에서 배달되는 피자의 박스 수는?' 같은 질문도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단지 컨설팅 면접을 위한 훈련을 넘어, 실생활 문제에 대한 분석적 접근을 훈련시킨다는 점에서 많은 독자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400페이지가 되는 책이었지만 단숨에 읽었고, 개인적으로는 히죽거리며 읽었다. 요즘 유행하는 MBTI를 기준으로 했을때 T 100%인 사람이 쓴 책이라고 생각이 들어서 더 웃었다. 물론 이 책을 찾아서 보는 사람도 T 그 자체일 수 밖에 없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하며 박수쳤다. T가 T보라고 쓴 T같은 내용 가득한 책.
대학교 졸업을 앞둔 학생들을 타겟하여 쓴 책이다 보니 최근 읽었던 종류의 책과는 확실히 달랐다. 자기계발 서적이라고 하기에는 나를 다그치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고, 교과서라고 하기에는 현업에서 실무를 통해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생각해내기 어려운 포인트들이 많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책 초반부에 지속적으로 연습을 해봐야 한다고 강조한게 아닐까 싶었다.
지금의 나는 책에 나오는 케이스와 해결방식들이 꽤나 번뜩이는 아이디어들이라고 느낀다. 하지만 컨설턴트가 '되고자'하는 이들도 나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책의 케이스들을 살펴보았을까 하고 아래와 같은 의문이 들었다.
- 실무를 해보지 않은 친구들이 이런 문제들을 논리적이고 분석적이면서 꽤나 탄탄한 근거를 제시할 수가 있기는 한건가?
- 세상의 사건들이 어떤것으로 구성되어있는지 모르는데 사상누각처럼 논리의 건물을 세운다는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부분인가?
- 논리적으로 케이스를 바라보는 능력, 해석하고 제시하는 능력을 본다고는 하지만 이건 오히려 입벌구를 높이쳐주는 시스템적인 함정이 아닐까?
책을 다보고나니 그 친구가 마음속 깊이 골드만삭스와 BCG 등등을 연호하며 살아온 삶이 크게 이해가 되었다. 책을 읽기 전에 나는 그것도 모르고 이렇게 말했었다.
'그 학회하는 친구들은 컨설턴트가 뭐하는지는 알고 그렇게 대학생활을 갈아넣는거야..?'
하지만 읽고나니 알겠다.
첨단에 있고 싶어하는 사람들이라면, 이정도로 열정적이고 계획적이면서 치열하게 살아야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그 친구를 통해, 나는 내가 지나쳐온 선택의 순간들을 되짚어보게 되었다.정확히는 내 후배들이 가질 수도 있었던 기회였다.
내가 회계법인에서 일한지 3년즈음 되었을때, 고등학교 은사님께서 전화를 주셨었다. 학창 시절에는 도덕과목 선생님이시기도 했고, 담임선생님도 아니었던지라 마음속 친밀감은 거의 없는 상태였다. 전화통화를 해보니 선생님께서는 학생들에게 다양한 직업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자리를 만들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중에 회계사라는 직업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하는데 비교적 최근 졸업생인 나를 통해 설명하고 싶어하셨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때는 왜 그랬는지, 염세적인 마음에 절여져서는 바쁘다는 핑계로 거절했다. 사실 내 솔직한 마음은 '회계사가 뭐라고 설명까지 해야 하는 거지 귀찮게'였다.
돌이켜보면 나는 대학교 및 전공을 결정할 때 많은 고3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성적을 기준으로 진로를 선택했다. 진학하고자 하는 학교의 이름값을 우선할지, 아니면 내가 더 흥미를 느끼는 전공을 고를지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었다. 경제와 정치 과목에 깊은 관심이 있었기에 고심 끝에 경제학과를 선택하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그러나 나를 잘 아셧던 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께서 좀 더 실용적인 선택이 좋겠다고 조언하셨고, 나는 회계학과로 방향을 틀었다.
입학 후 공부를 해보니 크게 어렵지 않았고, 마침 공인회계사 시험이 쉽게 출제된 해에 운 좋게 응시하게 되어 비교적 빠르게 합격했다. 나보다도 2년 먼저 합격한 동기에게 앞으로의 방향성을 물었을때, 그는 이렇게 되물었다.
"왜 회계사 하고싶은데?"
나는 제대로 답변하지 못헀다.
"그냥 뭐... 회계학과를 오기도 했고... 다들 준비하기도하고... 전문직 라이센스 있으면 좋겠다고들 하니깐?"
그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시험 공부 시작하기전에 미리 충분히 고민해보고 할껄 그랬어. 다른 길도 많은데, 이 길로 고정되버리는것 같은 느낌이야"
나는 더이상 대답을 잇지 못한채로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이후에 후배들이 나를 찾아와 회계사 공부를 시작할지 말지에 대해 상담을 요청하는 경우가 많이 생겼다. 그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회계사가 왜 하고 싶은데?"
그들도 과거의 나처럼 흔쾌히 답변하지 못했다. 나는 선문답 같지만, 시험공부 시작하기에 앞서 이것을 먼저 곰곰히 생각해보고 하면 어떻겠느냐고 질문을 던지고 다녔다.
하지만 내가 이 자격증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이 일을 통해 어떤 삶을 살아가고 싶은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 시점은 회계법인을 퇴사하기 직전이었다. 그 시절의 나는 그저 주어진 과제를 무난히 처리하며 살아가는, 자기 삶의 구조에 대해 충분히 질문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이 고민을 회계사 시험을 준비할 때부터 시작할 수 있었다면, 더 적절한 시기에 더 좋은 기회를 잡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선생님의 연락을 받았던 그 시절의 나는, 아직 스스로에게 질문조차 던지지 못하던, 깨어 있지 못한 사람이었다.
『케이스 인 포인트』를 읽고, 컨설턴트라는 직업을 둘러싼 준비 과정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게 되자, 나의 생각도 달라졌다.
고등학생들에게 어떤 직업이 있고, 어떤 일을 하는 것인지 소개해주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각자 하고 싶은 일을 탐색할 기회를 주는것, 그 자체가 누군가에게는 전환점이 될 수 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나도 좋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그냥 날려버린 것 같아서 그렇다.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면 응당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책을 덮었다.
『케이스 인 포인트』를 읽고 나서야, 나는 그때 선생님의 제안을 왜 받아들였어야 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고등학생들에게 직업을 소개해주는 일은, 단순히 정보를 주는 것이 아니라 가능성의 문을 여는 일 이라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나 같은 평범한 직장인조차 누군가에게 프레임을 제공하는 선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는데, 그 기회를 가볍게 지나쳐버렸다.
이제는 누군가에게 그런 질문을 먼저 건넬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삶의 방향을 찾지 못해 망설이는 후배들에게, 나도 『케이스 인 포인트』처럼 하나의 프레임을 열어줄 수 있다면 좋겠다. 치열하게 달리는 사람들 앞에서, 그 열정의 가까운 미래가 무엇인지 보여줄 수 있는 선배이고 싶다.그렇게 나도 누군가의 첫 단추가 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꽤 의미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