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선명하고 불확실하게 추정하기
서점에 가서 책 표지들을 하나하나 넘기며 구경하던 날이었다. 어떤 책을 사야겠다고 정하고 간 것은 아니다. 그냥 끌리는 표지, 끌리는 제목, 혹은 내가 요즘 생각하는 것들과 닮은 구석이 있는 책이면 한 권쯤 집어야겠다고 마음먹고 방문했다.
부동산과 경영일반 쪽은 너무 단순한 정보들이 입문자용으로만 배열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아서 나는 아예 쳐다도 보지 않았다. 시간은 넉넉했고, 관심 가는 주제를 만나면 앞부분을 서서 읽어보기도 했다. 그러다 ‘요즘 내 관심사와 앞으로 내가 몸담게 될 곳’에 대해 말하고 있는 책을 한 권 발견했다. 바로 이 책이었다.
다 읽고 나서 든 생각은 이거였다.
“2024년 내내 더벨 기사 유료 결제해서 봤거나, 요즘 핫하다는 텔레그램 채널에서 열심히 트렌드 정리한 사람이라면 대강 알고 있을 내용이겠구나.”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본업이 ‘인터넷 기사 읽기’는 아니지 않나. 이런 식으로 한 번씩 정리하고 짚어주는 것도 좋다고 느꼈다. 공동저자는 조세훈, 이영호, 오귀환. 더벨과 조선비즈 기자들이다. 매일같이 정보를 보고 취합하고 쓰는 사람들이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을 실천해낸 결과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책은 라이징하는 사모펀드에 대한 소개와 최근의 플레이 방식부터 이야기한다. 내가 몸담고 있는 시장은 스몰캡이고, 조 단위 빅딜에 대해서는 딱히 관심을 갖지 않고 있었는데, 이 책을 통해 그런 세상이 있다는 걸 구체적으로 알게 됐다. 민물에서 노는 물고기라고 해도, 원양에서 어떤 참치가 잡히는지에 대한 이야기에 굳이 귀를 막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빅딜에서 만들어진 트렌드는 종종 낙수효과처럼 스몰캡시장에 참신한 딜로 흘러들어오기도 하니까 말이다.
책에서는 2024년의 주요 트렌드를 열 가지로 정리해두었다. 앞 문단에서 말했듯 나는 지금 스몰캡 시장에 있기 때문에 이 목록에 있는 기업들을 직접 담당하진 않았지만, 관련 산업 동향이나 시장 내 주요 변화는 능동적으로 계속 업데이트해오고 있었다. 업계 친구들이나 선후배들과 만나면 실제로 어떤 업체를 검토 중인지, 산업 전망에 대한 의견은 어떤지를 주제로 꽤 건설적인 대화를 자주 나누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에서 말하는 2024년 산업 트렌드 목록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내가 그간 귀동냥하고 찾아보고 정리했던 내용들과의 일종의 포트폴리오처럼 느껴졌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업계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다 들어봤을 법한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막상 목록을 쭉 보면 “이걸 어떻게 이렇게 잘 정리했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요점을 잘 짚고 있다.
1. 군살 빼는 대기업, 리밸런싱 / 커진 구조조정 시장 / '현금 곳간' 폐기물, 식지 않는 인기
2. AI 임팩트, AI 반도체에 투자 몰린다 / 돌아온 반도체 슈퍼사이클
3. 선택과 집중, 되는 바이오만 노린다
4. K-뷰티에 지갑 열렸다
5. 다가온 미래, 로봇기업 쇼핑 나섰다
6. 전기차 캐즘에 다시 보는 자동차 부품사
각 목차들은 실제로 2024년 업계 사람들 사이에서 쉴 새 없이 오르내렸고, 나 역시 어떤 산업을 분석할 때 늘 써먹었던 주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2025년에 대해 전망한 이 책의 후기를 타임캡슐처럼 간직해 두고, 내년 이맘때쯤 “진짜 세상이 이렇게 흘러갔는지” 한 번 되짚어 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책에서 정리한 2025년 트렌드 목차에 대해 내 개인적인 감상과 뷰를 적어보자면 아래와 같다.
1. 생성형 AI, 새로운 투자 기회 — AI 산업을 ‘공정’ 단위로 본다면
“xxx을 지브리 스타일로 바꿔줘~”
정말 별것 아닌 요청이 전 세계를 흔들었다. 생성형 AI가 대중의 손에 잡히는 순간이었다. ai는 남 일이라고 생각하던 사람들도 갑자기 할 말이 생겼다.
“챗GPT 써봤어?”, “이 사진 미드저니로 바꿔봤어?” 정도는 누구나 입에 올리게 된 것이다.
나도 챗GPT를 쓰고 있었지만, 알고 보면 GPT만 있는 것도 아니다. 수많은 툴들이 있고, 그 툴들은 서로 데이터를 주고받으며 얽혀 있다. 그걸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미 돈 들어갈 만큼 들어갔고, 미국 대기업들이 선점해버린 시장 아닌가?” 재미나이, 구글꺼, 아마존꺼, 메타꺼… 치고 나가는 서비스가 너무 많지 않은가. 국내에서는 네이버나 카카오가 뭔가 한다고는 하지만, 체감은 미미한것 같다.
우리나라 기업은 그냥 나가리 난 거 아닌가?
그런데 그때 떠올랐다. 내가 반도체 산업을 공부하고 이해의 폭을 넓힌 방법이 말이다. 공정 하나하나마다 각각의 기술과 기업이 붙고, 그걸 이해하고 나니 비로소 이 산업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었다. AI도 마찬가지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모두가 챗GPT 같은 완성된 제품만 보고 있지만, 그 제품이 나오기까지는 ‘공정’이 존재한다. 각각의 공정에는 승부처가 있고, 아직 선점되지 않은 자리도 많다. 내가 AI를 반도체처럼 이해하려고 했던 건 이 때문이다.
그래서 정리해보면, 지금 AI 산업은 아래와 같은 7개 공정으로 나뉜다고 볼 수 있다.
데이터 확보/저장 – 웹 크롤링, 퍼블릭 데이터셋, 검색 로그 확보 등 (예: Common Crawl, Reddit, StackOverflow)
전처리/라벨링 – 노이즈 제거, 정제, 수동 라벨링, 파인튜닝용 세분화 (예: Scale AI)
모델 설계/구조 최적화 – 트랜스포머 아키텍처 개선, 경량화 구조 설계 (예: Mistral, MosaicML)
훈련(Training) – 고성능 GPU 인프라 사용, 분산학습 기술, H100 수요 (예: NVIDIA, AWS)
배포/호스팅 인프라 – API 서버, 오픈모델 공개 플랫폼, 유저 트래픽 처리 (예: HuggingFace, Replicate)
파인튜닝/도메인 특화화 – 고객사 맞춤 LLM, 사내용 내재화 (예: Pythagora, OpenAI Custom GPTs)
UI/UX 및 상품화 – 챗봇, 이미지 생성툴, 검색엔진 연동 (예: ChatGPT, Claude, Perplexity)
책에서는 이중 몇몇 공정에서 활약 중인 대표 기업들을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미스트랄(Mistral): 초경량 모델로 고성능을 구현하는 유럽 스타트업
스케일AI(Scale AI): 데이터 라벨링 및 전처리, 파인튜닝 영역의 아웃소싱 파트너
허깅페이스(HuggingFace): 오픈소스 모델 유통 플랫폼으로 LLM의 깃허브 같은 존재
GPT 하나만으로 산업을 설명하는 시대는 지나갔고, 이제는 AI 산업 전체를 구성하는 생태계를 보는 관점이 필요하다는 것 — 이 책이 말하려는 바가 그것 같았다. 미국 대기업이 다 쓸어가고 황량하게 남은 대지가 아니라 아직 구석구석 여지가 남아있는 시장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2. 밸류업 프로그램, 일본 거버넌스 개혁을 참고한 전략 모색
우리 본부에서는 한 달에 한 번 산업 분석 세미나가 열린다. 작년까진 PM들이 돌아가며 발표했는데, 올해부턴 리서치센터 애널리스트들이 발표를 맡고 있다. 확실히 분석 퀄리티가 압도적으로 높다.
특히 지난번 세미나 주제가 ‘밸류업 프로그램’이었는데, 꽤 인상 깊었다. 이제 곧 정권이 바뀔 상황에서 밸류업 프로그램은 이름만 바뀔 뿐, 기업가치를 끌어올리기 위한 거시적 드라이브는 계속될 거라는 해석이 바로 그러하다.
발표자는 기업가치를 움직이는 변수로 수익성과 코리안 디스카운트 해소, 이 두 가지를 꼽았다. 그리고 지금 시점에서 가장 실현 가능한 건 **“주주가치 제고”**라고 했다. 자기주식 매입 → 소각은 바로 효과가 나는 전략이고, PBR이 낮은 금융업부터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논지였다. 실제로 메이저 은행들은 이미 분기배당, 배당성향 확대, 자사주 매입 계획을 명확히 밝히며 움직이고 있다. 이쯤 되니 나는 슬쩍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 은행주 싹 사모아야 하는 타이밍인가?”
하지만 발표자는 이렇게 말했다.
정권 교체 이후, 신용 연체자와 소상공인을 위한 금융지원 정책이 나올 가능성이 있어 은행의 수익성이 일시적으로 정체될 수 있다- 라고
그래서 나는 여름쯤, 7~8월 흐름을 보면서 진입 시점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책도 밸류업 프로그램에 대해 꽤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특히 10년 넘게 밸류업을 시도해온 일본 사례를 통해 배울 점과 조심해야 할 점을 비교하며 정리해준다. 이 흐름이 진짜로 뿌리를 내린다면, 지금이 그 움직임에 한 발 먼저 올라탈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회일지도 모른다.
3. 캐즘 쇼크, 이차전지 지형이 바뀐다
2023년 여름, 아내와 파리에서 여름휴가를 보내고 있을 때였다. 에코프로가 150만 원을 넘겼다는 소식이 들렸고, 2차전지 관련 종목들이 날아오르던 그 시기의 분위기는 거의 종교에 가까웠다. 그 중심에는 '밧데리아저씨'로 불리던 금양의 아저씨가 있었다. 적극적인 IR로 2차전지 산업의 성장성을 설파했고, 그 외침은 일종의 문화현상처럼 업계 전반에 퍼졌다.
회사 정관에 '2차전지 관련 XX업'이라는 문구만 들어있으면 주가 폭등은 물론이고 상장 심사도 프리패스였다. 하지만 2024년이 되자 상황은 반전됐다. 어떤 2차전지 기업들의 주가는 -95%까지 폭락했고, 실적은 사실상 증발했다. “전기차 캐즘”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했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새로운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 배터리 셀의 형태 : 각형, 파우치, 원통형, 누가 승자가 될까?
- 테슬라가 채택한 5280 방식과 맞물린 소재 기업은?
- 이제는 전기버스, 상용차 중심으로 인프라가 바뀌는 것 아닐까?
최근 경험에 따라 주요한 포인트로 느낀건 택배차, 전세버스, 택시 등 상용차(전기를 제일 많이 쓰는 차량군)로 전기차 패러다임의 중심이 옮겨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 흐름은 충전 인프라 구조에도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승용차는 전국적으로 깔아야 하지만, 상용차는 거점형 충전소로도 커버가 된다. 최근 투자 검토한 'P'사같은 기업이 상용차 기반 충전소에 집중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상용차가 전기차의 중심이 된다면 다시 소재로 돌아와서 눈을 비벼서 봐볼 필요가 있겠다. 바로 양극재 이야기다. 이제는 모두 알다시피 2차전지의 핵심 소재는 아래와 같고, 삼원계(NCM, NCA)와 LFP는 이 중에서도 가장 비중이 큰 양극재에 해당한다.
양극재 (삼원계, LFP 등)
음극재 (주로 흑연)
분리막
전해질
삼원계는 니켈, 코발트, 망간 등을 조합한 소재로 에너지 밀도와 출력 성능이 뛰어나 하이엔드 전기차에 적합하다. 하지만 그만큼 가격이 비싸고, 무엇보다 코발트 등 원재료 수급 리스크가 크며, 열 안정성이 낮아 안전 문제도 제기되어왔다.
반면 LFP(LiFePO₄)는
1) 에너지 밀도는 다소 낮지만
2) 가격이 싸고
3) 화재 위험이 낮고
4) 사이클 수명이 길다는 장점이 있다.
그리고 중요한 건 상용차 중심의 시장에서는 그 정도의 고성능이 필요하지 않다는 점이다. 오히려 더 중요한 건
1) 충전의 안정성
2) 주행 거리의 예측 가능성
3) 낮은 유지비와 긴 수명이다.
물론 LFP는 최고의 기술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시장 구조(상용차 중심, 충전 거점 집중, 안전성과 내구성 우선)에 있어서는 지금 시장에 가장 잘 맞는 기술일 수 있다. 대한민국은 지금까지 삼원계 중심으로 산업을 설계해왔기에, LFP의 부상이 구조적으로 반갑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시장은 언제나 기술보다 앞서 움직이고, 우리는 그 틀을 다시 짜야 할지도 모른다.
4. 반려인 1,500만 시대, 반려동물 산업 투자 전략
딱 한 줄로 정리하자면 이렇다.
2024년에 우리나라에서는 아이를 위한 유모차보다 반려견 유모차가 더 많이 팔렸다.
반려견을 키우는 가정이 늘어나기도 하고, 사료 및 의료환경 개선으로 반려견들의 수명이 길어져 고령의 반려견이 늘어난것이다. 게다가 아이 유모차는 당근마켓에서 활발하게 거래되지만, 반려견 유모차는 왠만하면 새로 사서 끝까지 쓴다. 그리고 반려인들은 구매력도 상당한 편이다. 특히 사료 시장이 가장 화이팅 있는 분야인데, 정작 국내 기업들은 여기에 제대로 진출하지 못했다.
그동안은 산책 플랫폼, 의료 연계 같은 부가 기능 중심이었고, 사료는 외국 브랜드의 독무대였다. 다만 노견이 늘어나면서 건식보다 습식 사료 수요가 늘고 있고, 이 분야는 국내 기업에게 기회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몇 해 전, 반려견 산책을 같이 할 크루를 모으는 일종의 데이팅 앱 얘기를 들었을 때, 문득 이렇게 생각했다.
“이 정도면 개 틴더 아닌가?”
산책은 핑계고, 사람과 사람이 엮이는 구조. ‘반려인 감성 소비’가 플랫폼 위에 올라온 대표적 사례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걸 무조건 부정적으로 본 건 아니다. 오히려 이 산업이 정서적 니즈 + 소비 여력을 모두 안고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작년 말에는 고양이 화장실에 쓰이는 톱밥을 만드는 회사가 IPO를 준비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실적을 보니 매출도 상당한 수준이었고 수출 비중도 높았다. 특히 스토리라인이 확실했고, 비즈니스적으로도 펀더멘털이 있었다. 단순한 트렌드가 아니라 진짜 펀더멘털을 가진 영역도 이 산업 안에 있다는 걸 처음으로 체감했다.
나는 반려동물을 키우지 않는다. 그런데도 세상은 분명 ‘반려인의 시대로’ 바뀌고 있는 것 같다고 느껴진다. “고령화 사회니까 실버타운이 필요하다”던 세상에서 이제는 “반려타운은 어떻게 설계할 건가요?”를 묻는 시대가 되었다. 약간은 음울한 미래상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흐름은 피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2025년의 트렌드에 대해 내 경험과 관점으로 정리해보았다. 1년쯤 지난 뒤, 이 글을 다시 읽게 되면 어떤 기분일까? “오, 그래도 꽤 날카로웠네” 하며 스스로를 칭찬할까. 아니면 “그때 난 정말 아무것도 몰랐구나” 하고 고개를 젓게 될까.
어쨌든 한 해를 시작하는 시점에서 이렇게 한번 짚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습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투자든 생존이든, 결국은 ‘한발 먼저 듣고, 한발 먼저 써보는 사람’이 유리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