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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온실 수리 보고서 - 후기

복원이 아닌 수리에 대하여

by 비읍비읍

6개월전에 사놓고 결국 펼쳐보지 못한 책이었다. 이 책을 살때만 해도『부의 심리학』, 『부의 속성』, 『페이크와 팩트』처럼 좀 더 직설적이고 분석적인 책들에 먼저 손이 갔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뒷전으로 내팽개쳐져서는 거진 5개월간 서재방 한켠에 박혀있었던 책이었다.


어느날 헬스장에서 런닝머신 한시간 동안 타겠다고 마음먹은 나는, 여기에 가장 적합한 영상을 고심하며 찾고 있었다. 이동진의 인터뷰 영상에서 박정민 배우가 나오는 회차를 보기로 결정했다. 물론 1시간 40분이나 되는 영상이었던지라 다 보지는 못했지만, 김금희 작가의 대온실 수리 보고서를 다시 봐야겠다고 마음먹는데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박정민 배우는 '무제'라는 이름의 출판사를 만들어 출판인으로 1년을 보내겠다고 선언한 상황이었다. 해당 영상에서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오디오북을 타겟으로 먼저 '책'을 만들고, 비장애인들을 대상으로하는 일반 서적을 출간하는 프로젝트에 대한 내용에 대해 이야기했다.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해나가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된 계기와, 앞으로 1차 창작물이 2차 창작물로 변형/확산 될 수 있다는 등 그의 향후 계획을 듣는데 이보다 더 유익한 영상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또한 해당 프로젝트의 저자를 맡아준 사람이 바로 김금희 작가라고 설명했다. 이때 이동진 평론가와 박정민 배우는 김금희 작가 특유의 필체와 문장 진행방식에 대해 서로 맞장구치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였다. 마치 이런식으로 말이다.


"저는 진짜 김금희 작가 좋아해요"

"제가 리얼로 김금희 작가 찐팬인데요."

"김금희 작가는 이런~ 저런~ 것에 특징이 있고 장점이 있고.. blah"

"너도 김금희의 진가를 알아? 꺄르르"

"나는 완전 예전부터 골수 팬이었어 꺄르르"


신체적으로 박수만 치지 않았을뿐이지, 내가 보기에는 그 둘이 단상 위에 올라가서 방방 뛰며 맞장구를 치는 모습이 그려졌다. 이를 보는 내 시선은 아니꼬웠던게 아니라, 그들이 마치 단상위에 있는 것처럼 느껴질정도로 부러웠다고 하는게 맞겠다. 그들이 언급한 것은 『경애의 마음』과 『복자에게』라는 책이었지만, 나에게는 『대온실 수리 보고서』가 있지 않은가!?.




그래, 그들이 언급한 몇가지 포인트들을 내가 직접 겪어봐야겠다.


그들이 말했던것 중 대표적인 부분은 '대사가 많다'라는 부분과 '책을 빠르게 넘기게 된다'라는 부분이다.


'대사가 많다'라는 부분은 대온실 수리 보고서의 앞 50페이지만 읽어봐도 무슨말인지 너-무 잘 알겠다. 추정컨대 혼자만의 독백으로 구성된 소설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오히려 주인공이 타인들과의 대화 속에서 감정을 확인하고, 관계를 통해 변화하는 이야기다. 그렇기에 이야기의 동력은 ‘서술’보다 ‘대사’에 실려 있다. 때론 막장 드라마를 방불케 할 정도로 감정을 들끓게 만드는 인물들도 등장하지만, 작가는 그 모든 상황을 직접적으로 묘사하기보다는 인물들 사이의 말과 말 사이에 흘러가게 둔다. 나는 그 점이 오히려 더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책을 빠르게 넘기게 된다'라는 이유는 단순한 '몰입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책의 판형이 작고, 여백이 많고, 행간이 넓다. 굳이 내 책상에 올려져있는 책들을 보며 얼마나 페이지가 작고 여백이 많은지를 비교해보았다.

'대온실 수리 보고서'가 이정도...
'청춘의 독서'와 '양자컴퓨터의 미래'는 이정도...


페이지를 구성하는 방법까지도 '어떻게 읽히길 원하는가'에 대한 의도를 담고 있었고 얼마나 섬세한 전략이 작용했는지 새삼 깨달았다. 단지 이야기를 쓰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이 독자에게 ‘도달하는 방식’까지도 기획되는 것이다. 출판이란 결국 독자의 독서 행위를 디자인하는 일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실감하게 되었다.






김금희 작가 문장의 힘, 단어의 농도와 정서의 비침


나는 책을 읽는다는 건 결국 문장을 모으고, 단어를 모은다는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감정을 정확하고 간결하게 전달할 수 있는 단어가 있다는 의미인데, 작가의 글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특히나 확실히 소설에서만 사용 될 법한 단어들을 보며 내심 감탄했다.


예를 들어 ‘간여하다’라는 단어 하나로 작가는 인물의 태도와 입장을 통째로 그려내었다. '관여'는 긍정적인 관심과 접근이라고 한다면, '간여'는 부정적인 참견과 기웃거림이라는 것을, 나는 이번 책을 통해서야 알게 되었다.


또한 “무릎을 세우고 고개를 숙인 채로”라는 문장 하나로 특정한 정서 상태를 시각화 하였다는것이, 작가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문장력의 격차를 새삼 느끼게 했다. 내가 글을 써서 해당 자세와 분위기를 설명하려고 했다면 구구절절하게 긴 글을 써야만 했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혼잣말로 포장하지만 사실은 타인을 향한 불만의 말”이라는 표현은, 문장 하나가 대사의 전체 맥락을 함축하는 방식의 정수였다. 그렇게 특정 인물의 행동에 대해서 묘사한 것이 인물의 심리와 그 안의 눌림/표출을 모두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인물은 과거에도 그랬는데 / 지금도 그러하며 / 여전히 바깥으로 화살만 쏘아대고 있다는 모습을 알게되었다. 이제 주인공은 그 인물이 하는 말의 저의를 알고 있으니, 더는 상처받지 않을것-이라는 단단함까지 느껴졌다.


순신과의 재회 장면도 그랬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11월임에 슬리퍼를 신고다니며, 주인공의 조카들에게 "용돈 좀 줄까"라며 건네는 말 한마디가 피식 웃음이 나오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덕분에 그동안 마음속에 켜켜히 쌓아두고 고심했던 감정의 찌꺼기들이 한순간에 일소된다. 연애가 이소설의 중심은 아니었지만, 웬만한 연애소설보다 더 쿨하고 적절하게 표현해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그 장면을 읽고 이렇게 생각했다.


“이렇게 재회할 거라면, 이들은 왜 그렇게 오랫동안 그 아픔을 꾹꾹 눌러가며 살아왔던 걸까.”



그리고 이런 문장도 있었다.

“청둥오리들이 자맥질을 하며 가을의 윤슬을 타넘고 있었다.”
“생선 잇몸이 시릴 정도의 추위.”


전자는 내게 가을의 윤슬이 눈앞에 그려지게 만들었다. 게다가 청둥오리들이 물속으로 고개를 푹 집어넣는것이 자맥질이라는 깨알정보까지 입수하게 만들었다. 사람마다 경험이 다르겠으나, 꽤 고즈넉하고 여유로우면서 곧 저녁이 되어가는 분위기는 대다수에게 비슷한 감정으로 전달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후자는 작가가 ‘일러두기’에서 바쇼의 하이쿠를 변용한 표현임을 밝히며, 그 출처마저도 담담하게 독자와 공유한다. 그런 태도가 좋았다. 안그래도 어찌 이런 표현을 쓸수 있는건가 하고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작가도 나처럼 다양한 독서를 통해 단어와 문장을 모아왔던거라고 생각하니 내심 가깝게 느껴졋다.






서사의 겹과 '수리'라는 것의 철학


이제서야 정리해보는 소설의 줄거리는 이렇다.


타칭 석모도 헤밍웨이로 불리는 주인공은 강화에서 겨울을 나는 철새에 관한 홍보자료를 만들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창경궁의 대온실 보수공사에 참여하게 된다. 본 공사 설계를 담당하는 사무소에서 함께 일을하며 건축에는 특히나 진심인 사람들과 작업을 진행한다. 참고로 창경궁은 서울 지하철을 기준으로 안국역과 혜화역 사이 즈음에 있는데 지하철이 아니라 버스로 오가야하는 곳에 위치해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 대온실이 위치한 창경궁이 바로 주인공이 짧은 학창시절을 보냈던 장소, 원서동이라는 점이다. 서사는 이 지점에서부터 촘촘하게 꼬이기 시작한다.


강화 석모도가 고향인 주인공은 어린 시절 집안 형편으로 인해 서울로 유학을 오게 되고, 할머니가 살던 원서동의 하숙집에서 학창시절을 보낸다.그 하숙집에는 고고한 할머니 뿐만 아니라 왁자지껄한 딩 아주머니와 본인을 지지해주던 연극하는 언니, 어딘지 방관자로 있는 고시생 오빠, 얼음처럼 날이 서있던 동년배인 리사까지 함께 사는 하숙집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만남을 갖게되어 교제하게 된 공고를 다니는 남자친구 순신까지 , 이만하면 원서동에 대한 인물설명은 전부 다 한것으로 봐야겠다.


소설은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는 구성으로 진행된다. 집중해서 읽지 않으면 어느새 과거 회상으로 흘러들었다가 현재로 돌아오는 촘촘한 시간의 흐름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겠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오늘 있었던 일을 되뇌이며 집에 왔는데, 집에 도착해서 맞딱뜨리게 된 옛날 아버지의 물건을 보며 아버지가 했던 말들과 그때 당시의 에피소드를 회상한다. 그러다가 오늘 있었던 일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일이었는지 결론지으며 문단이 끝난다. 그 다음 문단은 옛날 아버지 물건이었던 짧은 단편같은 산문의 내용이 개괄되는 등의 방식이다.


이 소설은 기본적으로는 창경궁 대온실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건축설계사무소의 사람들과의 시간선이 주가 되며, 퇴근 후 석모도로 돌아와 고향친구의 딸인 산아와의 대화를 하는 것 까지가 메인 시간선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 틈 사이로 과거 원서동에서의 기억들이 불쑥불쑥 들어온다. 또한 문화재적 가치를 조사하던 도중, 주인공은 대온실 지하에 얽힌 오래된 서사를 발견하게 되고, 그 이야기가 원서동 하숙집에 함께 살았던 할머니의 과거와도 연결될 수 있음을 직감한다.


이야기의 핵심은, 기억의 파편들이 ‘수리’라는 키워드 아래 조립되어 간다는 점이다. 과거의 억울함과 말하지 못했던 진심, 그리고 도망치듯 끝냈던 관계들이 문화재 수리라는 시간 안에서 다시 떠오른다. 주인공은 그 기억의 조각들을 마치 합체 로봇의 부품들처럼 하나씩 끼워 맞추며 '나'라는 존재를 다시 조립한다.


대온실 수리가 진행되는 현재 시점은, 주인공이 30대 중반이 된 시점이다. 할머니는 이미 3년 전에 세상을 떠났고, 차갑게만 느껴졌던 리사는 이제 10살 아이를 키우는 이혼모가 되어 있다. 11월에도 슬리퍼를 신은 채 나타난 순신은, 예전처럼 거칠지만 조카들에게 용돈을 건네며 어른의 태도를 보인다. 감정은 희석되었고 기억은 해탈의 얼굴로 돌아온다.


한편 소설은, 창경궁 대온실 지하에 무언가 숨겨져 있는 듯한 복선들을 깔아두지만 끝내 그 진실을 파내거나 해결해내지 않는다. 마치 “이쯤에서 그만해도 되지 않을까?”라고 방향을 정하고 처연하게 지난 서사들을 풀어주는 것 같이 느껴졌다. 누군가의 아픈 진실이긴 하지만 굳이 꺼내지 않아도 되는, 알려지지 않는 편이 더 아름다운 진실들도 있다는 판단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소설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공무원의 행정 절차 같기도 하지만, 어쩌면 진정한 삶의 지혜 같기도 하다.


이것은 ‘수리’라는 행위의 철학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대온실의 구조가 일본식이든 프랑스식이든, 혹은 이도 저도 아닌 혼합된 양식이든 중요한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와 어떻게 연결되는가이다. 그래서 수리는 복원이 아니라 재해석이다.


모든 것을 원형으로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남겨둘 것은 남기고, 잊어도 되는 것은 잊는 것이다. 지금 이곳에서 다시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 현재에겐 가장 중요한 일이 될 것이다. 『대온실 수리 보고서』는 '수리'에 대해 400페이지 짜리 부연설명문을 달아놓고, 그것을 읽는 독자들도 이처럼 '수리'하길 바라는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참을 수 없는 디테일의 충실함


일전에 황석영 작가의 일침을 기사로 접하고나서 요즘 소설이라는 것이 쓸데없는것에 집중하고 있다-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가 일침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작가는 현실을 삭여서 그것으로 독자와 어떻게 대화할 것인가를 자신만의 방법론으로 고민해야 하는데 요즘 젊은작가들은 그런 점에서 걸린다. 이들은 문학 책만 보고 인문사회를 공부하지 않는다."

" 서사가 딸리니까 햇볕이 들어오는 과정만을 묘사한다. 그 장면은 치열하고 섬세하다. 나뭇잎에 비가 어떻게 떨어져서 구르고 떨어지고, 한마디로 주접을 떨고 있는 것"


그래서 소설의 이런 접근과 표현들에 대해 폄하하고 거들떠보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소설은 점점 더 ‘디테일만 섬세한’ 이야기로 흘러가는 듯 보였고, 정작 삶 전체를 꿰뚫는 힘은 약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한동안, 소설이라는 장르에 대해 ‘쓸데없는 것에 집중한다’며 스스로 경계선을 그은 적도 있다.


하지만 『대온실 수리 보고서』를 읽고 나니 생각이 조금씩 달라졌다. 이 소설은 과잉 묘사나 감정의 포르노그래피에 빠지지 않는다. 햇볕이 들어오는 장면을 쓴다면, 그 빛이 비추는 대상까지도 함께 보여준다. 나뭇잎의 떨림만 묘사하지 않고, 그 떨림을 지켜보는 사람의 내면과 시간까지도 묘사한다.


소설적 묘사만큼 전체 스토리의 상황을 설명하고, 풍경을 보여주며, 등장인물들의 마음을 제대로 들려주는것이 또 있을까? 오히려 이런 표현들이 2차원 텍스트로 된 소설이 영화가 되더라도 소설원작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느낄수있는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시각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을 넘어서, 각각의 독자가 읽고 선명하게 느낀 상황과 풍경을 각자의 머리속 배우들이 연기한다면 어떤 영화가 나타나더라도 자신들의 영화와 비교하게 될테니깐 말이다.


황석영 작가의 비판이 틀렸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그 비판에서 벗어나는 글도 분명히 존재하며, 김금희는 그 중 하나였다. 그녀의 문장은 현실을 섬세하게 들여다보되, 독자와의 대화를 위한 결을 끝까지 잃지 않는다. 장면과 서사, 정서와 구조를 균형 있게 엮어낸다. 그렇게 나는 그동안 스쳐 지나왔던 문장들에 다시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문장은 단어로, 그리고 결국 삶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연결된다는 걸 이 책이 새삼 일깨워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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