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나만의 리메이크 앨범 만들기
영화를 많이 보던 시기가 있었다. 책보다 영화가 더 직관적으로 이해가되었고, 개인적인 후기를 남기는 것도 더 수월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내가 영화에 진심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나만의 언어로 분석하고 풀어낼 자신도 있었다. 영화를 좋아하는 1인으로써 꽤 영화를 다양한 관점에서 분석하고 평론하기에 일정 수준에 이르렀다고 자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스타그램에서 문득 보이는 카드형식의 평론에서 1차로 좌절했고, 유투브를 장악하고 있는 많은 영화 리뷰 유투버들이 깊고 통찰력있는 리뷰를 남기는걸 접하고나니 나의 후기들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 후, 내가 선택한 해결의 방식은 ‘그들의 의견까지 반영해서 써보기’였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참조하고, 내 언어로 정리해보는 것이다. 하지만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이게 정말 나의 시선인가?" 작곡으로 따지면, 누군가의 멜로디를 샘플링해 만든 곡을 자기 곡인 척 하는 것과 다른게 뭐가 있을까? 나만의 후기라고 부르기에 민망한 구석이 있었다. 이때 친구와의 대화 끝에 하나의 기준이 정립됐다.
“다른 사람의 관점이 섞여 있더라도 내 시선의 1%만 담겨 있다면, 그건 나의 후기야.”
그렇게 나는 다시 글을 쓸수 있었고, 지금은 이렇게 브런치에 글을 남기고 있다.
하지만『청춘의 독서』를 읽고나니 그 시절의 의문이 내게 다시 찾아왔다. 나는 여기 등장하는 책들을 언제쯤 모두 읽게 될까? 수학에서 어떤 명제가 참이라는 건 알지만, 유한한 시간 안에 증명할 수 없을 수도 있는 것처럼, 그날은 오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특히『유한계급론』부분을 읽고 나니, “이 책은 나의 의식체계를 만든 핵심이다!”라고 말할 수 있기 까지 대체 시간이 얼마나 많이 필요할지 가늠도 되지 않는다.
책을 다 읽었지만, 무언가를 ‘읽었다’는 생각보다 오히려 ‘통과했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내가 직접 읽은 책은 한 권뿐이지만, 마치 열다섯 권의 책을 동시에 훑고 지난 것처럼 정신이 아찔했다. 정작 내가 읽은 건 책이 아니라 유시민이라는 필터를 통과한 책들이었던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무엇일지 정의해보았다.
2시간짜리 영화를 10~15분으로 압축해주는 유튜브 영상? “이것만 알고 가세요”라고 말하는 1분짜리 지식 쇼츠? 그렇다면, 이 책과 그 차이점은 무엇일까?
내가 내린 결론은 이랬다. 이 책은 아이유의 『꽃갈피』처럼 느껴졌다. 리메이크 앨범이란 과거의 곡을 자기 감성으로 되살리는 플레이리스트이다. 『청춘의 독서』는 그렇게 유시민이 만들어낸 리메이크 앨범이다. 그에게 이 책은 젊은 시절 자신을 만들어낸 ‘의식의 지도’를 다시 그려보는 작업인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책을 읽고, 그 위에 나의 사유를 얹어 쓰고 있는 나는 어떤 위치일까? 아마도 1분짜리 쇼츠를 소비하는 사람과, 리메이크 앨범을 제작하는 사람 사이 어딘가쯤에 있지 않을까?
그럼 나는 어떠한 후기를 작성해야할까 고민해보았다. 이 필터 너머에 놓인 책들을 하나씩 꺼내어 나만의 방식으로 다시 배열해보는 것이 좋겠다고 결정했다. 유시민이 ‘젊은 날 들고 다녔던 지도’를 펼쳐 보였다면,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나만의 지도 위에 좌표를 찍어보는 작업을 해보려 한다. 그 지도를 완성하기 위해 나 스스로 충분한 시간을 들여 모든 책을 다 읽고, 정리하고, 소화할 필요가 있겠다.
구획을 엄밀히 나누기는 어렵겠지만, 각 책이 나에게 남긴 질문이나 방향성을 기준으로 삼아 세 개의 범주로 묶어보았다.
그렇게 탄생한 나만의 분류는 다음과 같다.
구조적으로 황폐해질 수밖에 없는 개인을 어떻게 구원할 수 있을까. 도스토옙스키는 여기에 ‘초월자’가 아닌, 평범한 다수의 자각과 노력으로 답한다. 인간의 고통은 제도에서 기인하며, 악인은 불가피하게 발생하지만, 그를 비판하고 변화시키는 주체는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 고통은 신비화되어선 안 된다. 그것은 세상이 우리에게 내리는 당위가 아니니까.
‘지식인’이라는 이름을 갖고 싶다면, 세상의 프레임에 휘둘리지 않는 비판적이고 분석적인 사고력을 갖춰야 한다. 이는 단순히 학문적 소양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신의 사유를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있는 윤리적 태도다. 『페이크와 팩트』에서도 느꼈던 그 절박함이 여기에도 흐른다. 타인의 말과 체계에 묻어가는 것이 아니라, ‘내 사유’를 세울 수 있는가? 그것이 진짜 지식인의 조건이다.
좌우 이념의 틈에서 태어난 한 개인의 비극. 이 소설은 양극단의 비윤리성을 동시에 정밀하게 비판한다. “중립”이라는 말로 모면하지 않고, 각 체제의 불의와 폭력을 고발한다. 단순히 분단 서사가 아니다. 오히려 이 소설은, 양쪽 모두를 겪은 사람이기에 가능한 비평이며, 진정한 사유의 자유가 무엇인지 묻는 작품이다.
“있는 그대로의 역사”란 존재할 수 있는가?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며, ‘기록하는 자’의 시선에 좌우된다. 해석되지 않은 역사는 없다. 그런데 우리는 그 기록을 절대불변의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건 아닐까. 이 책이 한국에서 ‘빨갱이 책’으로 낙인찍혔던 건, 역사의 해석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시대의 공포가 반영된 것 이었을 것이다.
삶의 좌표계를 설정한 다음에는 사회의 구조와 그 안의 진보 가능성에 대해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개인의 구원에서 사회의 진화로-를 두번째 범주로 삼았다.
“눈부신 진보 속에서도 빈곤은 왜 사라지지 않는가?” 이 질문이 이 책의 출발점이다. 『진보와 빈곤』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씌어진 책이다. 그리고 이 질문은, 지금 이 시대에도 유효하다.
고전 속의 사상가들은 단 하나의 정답을 찾기보다, 여러 학문 분야를 넘나들며 사회문제를 구성하고 풀어가려 했다. 헨리 조지도 마찬가지였다. 경제학, 윤리학, 토지 제도, 정치 구조까지 끌어들여 복합적인 사유를 펼친다. 그에 따르면, 문명은 진보하는데 빈곤은 여전한 이유는 ‘대지를 소유한 자’가 모든 진보의 잉여를 독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급진적인 제안도 한다—모든 이익이 집중되는 토지에 과세하자는 것, ‘지주세’를 도입하자는 것.
처음엔 이 제안이 터무니없이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곱씹어 보면, “그렇다면 다른 대안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선뜻 답하기 어려워진다. 빈곤은 개인의 노력 부족 때문이 아니라, 구조가 허락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은 집요하게 보여준다.
문득 지금 우리는 이러한 담론을 전혀 나누고 있지 않다고 생각이 든다. 이처럼 구조의 근원을 파고드는 이야기를 우리는 언제, 어디서, 누구와 나누고 있는가? 혹시 우리는 양자컴퓨터 시대가 도래하면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해서 시뮬레이션을 돌려 최적의 사회 해법을 알려줄 거라고, 그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진보와 빈곤』은 오래된 책이지만, 지금의 담론보다 더 입체적이고 더 급진적이다. 지금 우리는 너무 단편적이고, 즉흥적이며, 자극적인 것만 좇는다. 그 와중에 진짜 중요한 질문들은 묻히고 있다.
“꼬우면 너도 땅 사놓지 그랬어?”로 비아냥 거릴 문제가 아니다. 문명의 '근본적인 변화'를 이루기 위해서 조금씩이라도 협치하며 바꿔나가는게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지금 이 사상은 ‘진 것이’ 맞다. 그러나 졌다고 해서, 그 안에 있던 모든 사유가 무의미해진 것은 아니다. 그들이 말했던 계급의식, 분배의 윤리, 인간 소외는 여전히 유효하다.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말은 여기서 통한다. 어떤 사상이 부정된 뒤에도 남는 편린들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인식 지형을 더 깊게 만든다.
“정치는 위대한 사업이다. 짐승의 비천함을 감수하면서 야수적 탐욕과 싸워 성인의 고귀함을 이루는 일이다.”
『사기』 속 인물열전을 읽으며 제왕들의 리더십을 따라가다 보면, 단순히 나 자신의 인격을 도야하거나 교양을 쌓는 데서 멈춰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모두가 정치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정치를 '더럽다'거나 '나와 상관없다'는 영역으로 밀어내는 자세는 분명 위험하다. 정치를 가벼이 보지 않는 태도, 그것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더 간절히 회복해야 할 시민 의식 아닐까.
정치인이라는 직업에 대해 우리는 흔히 조롱과 냉소를 먼저 던지지만, 직업적 정치인이 어떤 방식으로 세상과 싸워왔는지를 이해하려는 시도 없이 비난만 늘어놓는 건 편의적 태도일 수 있다. 정치가 성인의 고귀함을 지향하는 일이라면, 동시에 그 아래에 깔린 짐승의 비천함과 야수적 탐욕 또한 감당해야 한다는 걸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정치를 해본 적도 없고, 낙선해본 적도 없는 사람은 대통령 선거와 같은 주요 선출직에 나서선 안 된다. 패배의 고배를 마셔본 사람만이 그 구조의 무게와 정치의 생리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는 고결함을 향한 추구인 동시에, 야수성과 부딪히는 실전이다. 『사기』는 그 복잡한 대면을 가장 고전적인 언어로 일깨워준다.
하지만 변화만으로는 세상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이면에는 변화에 저항하는 전통과, 지속성의 힘도 필요하게 때문이다. 그래서 '보수'란 무엇인지 집중 조명한 목차들을 모아서 진정한 보수가 무엇인지를 알아가는 과정을 세번째 범주로 삼았다.
역성혁명론. 신하가 왕을 몰아내는 일.(또는 왕을 몰아낼 수도 있다는 것). 맹자는 이 논리를 줄기차게 내세운다. 그리고 그 논의의 출발점은, 중국 상고시대 하(夏)·은(殷)·주(周)의 왕조 교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이 역사적 사건에 대해 ‘봉신연의’라는 만화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었다. 은나라의 폭군 주왕을 주나라 무왕이 몰아낸 이야기. 정통성과 예법이라는 기준으로 보면, 이건 도저히 정당화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때 맹자는 말한다.
“그는 왕이 아니라, 인과 의를 해친 한 인간을 벌한 것이다.”
결국 맹자가 말한 것은 단순한 왕의 교체가 아니다. 권력보다 윤리, 정통보다 정의가 먼저여야 한다는 급진적 선언이었다. 시간적으로는 기원전 4세기의 맹자조차도, 하·은·주 시대를 '엄청 오래전 일'로 인식했을 것이다. 그러니 기원전 인물들이 ‘피라미드는 언제 지었을까요?’라고 서로 묻는 장면을 상상해본다면, 그만큼 역사의 흐름에서 전통과 혁신의 간극이 얼마나 깊은지를 실감할 수 있다.
여기서 문득, ‘보수주의’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를 떠올려 본다.
“오랜 시간을 통해 발전되어온 연속성과 안정성을 담보할 수 있는 전통적인 제도와 관습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
이념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태도’에 관한 정의다. 그렇다면 맹자는 어떤 태도를 취한 사람인가? 무조건적인 왕정 수호자가 아니라, ‘전통의 가치’를 윤리의 기준으로 재구성한 사람이다.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구분하려 했던 보수주의자. 맹자가 말한 것은, 진정한 보수란 배척의 대상이 아니라 서로 배울 수 있는 태도라는 것을 실감했다.
유한계급은 과시적 소비, 낭비적 여가를 통해 자신의 지위를 과시한다. 우리는 정말 ‘좋아서’ 소비하는 걸까, ‘비싸서’ 소비하는 걸까. 베블런은 그 모순을 날카롭게 짚는다. 명품은 품질이 아니라 가격이 가치를 만든다. 경제학이 가정하는 ‘합리적 인간’은 현실에 없다. 이 책을 읽은 당시의 유한계급은 딱정벌레가 『곤충기』를 읽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온전히 까발려졌기 때문이다.
유한계급이란 Leisure Class, 즉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고도 과시적 소비와 낭비적 여가로 자신의 지위를 드러내는 사람들을 말한다. 베블런은 이 계층을 해부하듯 분석한다. 그리고 베블런의 통찰은 당시의 고전경제학자들과는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한다. 고전경제학은 인간이 자신의 소비만으로 행복을 판단한다고 전제한다. 경제학자들의 효용함수 속 인간은 이렇게 가정된다:
“내가 소비하는 양에 따라 내 행복이 결정되며, 타인의 소비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사람들은 남의 소비를 의식하고, 비교하고, 경쟁한다. 명품을 사는 이유가 정말 그 품질 때문일까? 아니다. 비싸기 때문에, 그것이 지위를 말해주기 때문에 사는 것이다. 즉, 가격 그 자체가 가치를 만들어낸다. 베블런은 이 대목을 정확히 꿰뚫어 본다.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인간은 모두 보수적이다. 익숙한 것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하지만 세상은 진보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진보란 언제나 귀찮음을 수반한다. 습관을 버려야 하고, 제도를 고쳐야 한다. 유한계급은 이 귀찮음을 경제적 여유로 해결할 수 있어서 보수적인 것으로 흘러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평균적인 시민사회의 수준을 높이려 한다면 제도의 진화와 생활습관의 전환은 결국 불가피한 일이다. 아무리 모두가 생활환경의 변화에 부정적으로 노출되어 있다 해도, 그 변화에 적응할 뿐만 아니라 능동적으로 반응할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우리 사회는 그 변화에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다윈의 진화론은 과학인 동시에, 우생학이나 인종주의로 쉽게 오남용되어온 사상이다. 우리는 이 이론을 ‘강자의 법칙’으로만 받아들이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진화의 서사 속에는 협력과 공존의 가능성도 내재해 있다. 우리가 간과해온 건 바로 그 부분이다. 다윈은 강자만이 살아남는다고 말하지 않았다. 변화에 적응하고, 함께 살아가는 종이 생존한다고 말한 것이다. 그가 주장한 진화론에서는 차마 다 담아내지 못했던 담론을 앞으로의 우리가 담아야 할 것이다. 이타적 인간의 가능성과, 집단 선택론을 통해서 우리가 셀프로 채워넣자는 것이다. 맬서스의 인구론과 궤를 같이하지만 그래서 더 읽어놔야하는 담론이라는 것이다.
언론은 권력과 손잡았고, 개인은 파괴되었다. 이 소설은 당시 독일 황색 언론의 폭력을 고발한다. 지금의 한국 언론을 떠올리면 더욱 씁쓸하다. 언론-검찰-정치가 유착된 프레임 속에서 특정 인식을 강요받는 사회. 우리는 아직도 뵐이 개탄했던 시대조차 따라가지 못했다.
이 소설은 허구의 형태를 빌려 썼지만, 실은 독일 일간지 ‘빌트’지를 정면으로 겨냥한 소설이다. 언론이 권력과 결탁해 개인의 삶을 무너뜨리는 방식, 그리고 대중의 여론을 의도적으로 몰아가는 메커니즘을 뵐은 섬세하면서도 단호하게 묘파한다.
유시민 작가가 비교로 삼은 독일의 68혁명을 보며 부러움을 느꼈다. 당시 나치 정권은 이미 끝났지만, 그 잔재는 여전히 사회 곳곳에 남아 있었다. 그래서 청년들은 기성세대를 향해 외쳤다—청산하지 않은 과거가 지금의 왜곡을 만들었다고 말이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며, 한국 사회가 친일 청산 없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비교하게 되었다. 친일 경찰이 해방 후에도 치안감으로 기용되던 풍경이 그러했고, 아직까지도 반공주의와 보수 이데올로기로 수십 년의 담론 구조를 억누른 이력까지 있으니 오히려 우린 더 심했다.
그 결과, 지금도 우리는 특정한 사상에 대해 “빨갱이”라는 한 마디로 억압하고 배제한다. 특히 언론은 권력과 검찰과 연결되어 특정 프레임을 강화하고 있다. 비록 유튜브가 ‘자유로운 말하기’의 공간처럼 새로운 지평을 열어낸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극우 유튜버와 종편 중심의 보수언론도 새로운 미디어에서 주도권을 일부 장악한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청춘의 독서』에서 유시민 작가는 이 소설을 언급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런 시대는 지나갔다. 우리도 이제 국가와 언론 그 자체가 아니라, 특정한 정부와 특정한 언론이 문제인 시대에 살게 되었다. 드디어 40년 전 독일 수준에 도달한 셈인가? 그렇지가 않다. 뵐이 개탄해마지않았던 수준에도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
이 문장에 나도 깊이 동감했다. 우리는 여전히 권력과 언론을 구분하지 못하고, 특정 담론을 구조적으로 억압하는 프레임에 익숙해져 있다. 이 소설은 단지 과거의 독일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한다 해도, 단 하나의 반대 의견은 보호받아야 한다—밀은 이렇게 말한다. 자유란 추상적 구호가 아니라, 표현과 토론의 권리를 현실에서 지켜내는 일이다. 오늘날 우리는 자유라는 말을 쉽게 쓴다. 하지만 실제로 그 자유가 어떻게 억눌리고 있는지, 또 어떤 조건에서만 허용되고 있는지를 돌아본 적이 있는가? ‘자유’는 말보다, 구조의 문제다.
이 책은 자선조차 죄악이라 말한다. 복지로 인해 도태되어야 할 사람들이 살아남게 되고, 이는 자연 질서를 해치는 일이라는 주장이다. 우리는 여기서 극단적 자유주의 보수주의의 뿌리를 본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보수의 본질일까? 연속성과 안정성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기초 복지마저 부정하는 태도는, 사실상 보수라기보다 냉소적인 이기주의에 가깝다. 진정한 보수는 ‘지켜야 할 것’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현대 정치에서 빈곤하고 고령의 유권자들을 감싸야하기 때문에 극단적인 무-복지정책을 내세울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늘상 말하지 않던가 미국의 '선진적인' 민영화 정책을 가져와서 털어버릴것은 털어버리자고 하지 않는가.
책을 다 읽고 나니, 예전처럼 주변 사람에게 다 본 책을 나눠주기보다는 책장 한쪽에 꽂아두고 소장하고 싶어졌다. 시간이 흘러 다시 꺼내 읽을 일이 있을 것 같아서다. 그때는 또 다른 시선으로 같은 문장을 마주하겠으나, 달라진 건 문장이 아니라 나 자신일 것이다.
한 권의 책을 다 읽은 것이 아니라, 앞에 놓인 열다섯권의 책을 빠르게 읽어낸 기분이다. 각각의 문장에서 유시민 작가의 시선과 사유가 느껴졌고, 나는 그 사이를 아주 편안하게 건너갔다. 물론 이 책 한 권으로 나의 독서가, 사유가, 인생이 바뀌었다고 말하진 못하겠다. 하지만 시대를 고찰하는 지성인의 지도를 물려받은 기분은 든다.
언젠가 나도 독서를 통한 의식의 변곡점이 생긴다면, 이렇게 한번쯤은 정리해서 나만의 리메이크 앨범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여전히 그리고 부단히 걷고 있고, 언젠가 나만의 원곡을 부를 날도 오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