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다시 쓰일 수 있을까(ReWrite)
요즘 콘텐츠 플랫폼을 둘러보면 '회귀물'이 넘쳐난다. 웹툰, 웹소설, 드라마, 영화에 이르기까지 그 영역은 점점 확장되고 있다. 어느 날 갑자기 과거로 돌아가거나, 미래에서 누군가가 내려오거나, 시간의 방향을 틀어쥐고 서사를 다시 짜기 시작하는 장르가 그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회귀물'이라 부른다.
특히 지난 2~3년간 회귀물은 단순한 장르를 넘어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재벌집 막내아들』은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투신전생기』 같은 웹툰은 글로벌 플랫폼에서도 강력한 팬덤을 형성하며 화제를 모았다. 드라마 『어게인 마이 라이프나』 『내 남편과 결혼해줘』처럼 "또 그 인생, 다시 살아보기"를 콘셉트로 한 작품들은 익숙함 이상의 정서적 친밀감을 선사했다. 지금의 한국 콘텐츠 시장은 말 그대로 시간여행이라는 서사 구조가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왜 그럴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 혹은 이 세계가 다시 한번 시작된다면, 꽤나 괜찮게 개선해 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한 번쯤 다시 해보고 싶은 마음, 이번엔 다르게 선택해서 살아보고 싶은 마음을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회귀물은 독자들에게 내일을 주지 않고, 대신 어제를 돌려준다. 다시 살아볼 수 있다면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후회와 희망이 맞물린 상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회귀물은 단지 똑같은 클리셰로 복사된 콘텐츠가 아니다. 구조에 따라 결말이 달라지고, 인과에 대한 철학이 다양하게 드러난다. 얼핏 보면 비슷해 보이지만, 회귀물은 크게 두 가지 구조로 나눠볼 수 있다. 나는 구조를 자기일관성 루프 (A)와 멀티버스 분기 (B)로 구분해보고자 한다.
A. 자기일관성 루프: 미래가 과거에 개입하는 구조
이 방식은 미래의 존재가 과거로 돌아와, 자기 자신의 미래를 완성시키기 위해 과거에 개입하는 구조다. 원인과 결과가 순차적이 아니라 순환적이다. '결과가 원인을 만들어낸다'는 패러독스가 성립한다. 다시 말해, 미래의 결과가 현재의 나에게 와서 "내가 되려면, 네가 이렇게 해줘야 해"라고 말하는 구조다.
대표 예시:
터미네이터 (The Terminator)
미래의 인공지능 스카이넷은 인간 저항군 지도자 존 코너를 제거하기 위해 터미네이터(T-800)를 과거로 보낸다. 이에 맞서 존 코너는 자신의 어머니인 사라 코너를 보호하기 위해 병사 카일 리스를 과거로 보낸다. 카일 리스와 사라 코너는 관계를 맺고, 그 결과 존 코너가 태어난다. 아이러니하게도 카일 리스는 존 코너의 아버지가 되고, 결국 스카이넷의 공격이 존의 탄생을 유도하는 결과가 된다. 즉, 미래의 사건이 과거에 영향을 미쳐 미래를 형성하는 자기일관성 루프 구조를 보여준다.
인터스텔라 (Interstellar)
지구의 생존이 위협받는 미래, NASA의 파일럿 쿠퍼는 인류의 새로운 거주지를 찾기 위해 우주 탐사에 나선다. 그는 블랙홀 '가르강튀아'의 사건의 지평선 너머의 5차원 공간인 '테서랙트'에 도달하게 되고, 그곳에서 과거의 딸 머피에게 중력 데이터를 전달한다. 이때 미래의 5차원 존재(사실은 미래의 인류)가 블랙홀 내부의 특이점을 통해 과거로 데이터를 전달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 데이터를 통해 과거의 머피는 인류 이주를 위한 중력 방정식을 완성하게 된다. 이처럼 미래의 쿠퍼의 행동이 과거에 영향을 미쳐 미래를 형성하는 자기일관성 루프 구조를 보여준다.
이 구조는 철학적으로 결정론적 세계관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모든 사건은 이미 예정되어 있다는 가정 하에, 시간은 하나의 폐쇄 루프 안에서 돌고 있다. 결과는 언제나 원인을 자극하기 위해 존재하고, 자유의지는 환상에 가깝다. 시간여행이 가능하다는 가정 하에, 그 여행은 오직 정해진 경로를 따라가게 되는 운명론적 드라마다.
B. 멀티버스 분기: 과거로 돌아가 미래를 다시 쓰는 구조
이 구조는 시간선을 따라 회귀한 주인공이 과거에서 새로운 선택을 함으로써, 전혀 다른 미래를 만들어내는 구조다. 기존의 미래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으며, 이야기의 중심은 '새로운 미래를 위한 현재의 선택'에 놓인다. 쉽게 말해, '이번엔 제대로 살아보자'에 가까운 것이다.
대표 예시:
재벌집 막내아들 (웹소설/드라마)
주인공 윤현우는 재벌가 순양의 비서로 충성을 다했지만 결국 버려지고 살해당한다. 그러나 죽음 직후 과거로 회귀해 순양그룹 총수 진양철의 손자, 진도준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후 그는 미래의 정보를 활용해 재벌가의 권력 다툼에서 우위를 점하고, 전혀 다른 인생을 개척한다.
백 투 더 퓨처 (Back to the Future)
마티는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가서 부모님의 연애를 방해하고, 이를 수습하면서 현재가 달라진다. 그가 돌아왔을 때의 미래는 처음의 그것과 완전히 달라진다.
나비효과 (The Butterfly Effect)
주인공 에반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바탕으로 과거로 돌아가는 능력을 얻는다. 그는 과거의 사건을 바꿔 현재를 바꾸려 하지만, 매번 예상치 못한 결과와 부작용이 생긴다. 결국 그는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위해 스스로를 지워버리는 선택을 한다. 이는 과거의 선택이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낸다는 전형적인 멀티버스 분기 구조 회귀물이다.
이 구조는 철학적으로 자유의지와 다중세계론에 가깝다. 과거의 선택은 새로운 결과를 만들 수 있으며, 세계는 무수한 가능성으로 나뉘어 간다. 여기서 시간여행은 삶을 고치는 기회이자, 두 번째 삶을 사는 수단이다.
회귀물을 둘러싼 구조적 구분은 단지 이야기의 방식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시간에 대한 이해방식, 인간의 선택에 대한 신념, 나아가 세계의 작동 원리에 대한 철학적 상상을 내포한다.
A vs B: 철학적 대립구도
회귀물의 구조는 단순한 플롯 설계가 아니라, 시간과 인간의 선택을 바라보는 철학적 입장의 차이를 반영한다.
A형은 예정조화의 우주다. 미래는 과거를 만들고, 우리는 그 안에서 미세하게 기능할 뿐이다.
B형은 선택의 우주다. 미래는 불확정이며, 우리는 새로운 시간을 창조할 수 있다.
이 둘은 이야기의 윤리, 시간의 정의, 인간의 자유에 대한 서로 다른 세계관을 제시한다. 회귀물은 결국 “시간은 무엇인가?” “우리는 선택할 수 있는가?”라는 본질적 질문에 대해 극적인 상상을 통해 답하고 있는 것이다.
좀 더 깊이 들어가 보자.
우선, 자기일관성 루프 구조는 철저히 결정론적 세계관 위에 세워진다. 이 세계에서 모든 사건은 원인과 결과가 아닌, 결과가 다시 원인을 자극하는 순환의 인과 속에 존재한다. 미래에서 온 존재가 과거에 개입하는 순간, 그것은 역설적으로 이미 예정된 수순이 된다. 선택은 환상이며, 시간은 마치 잘 짜인 연극처럼 끝에서 시작을 거꾸로 추적하는 폐쇄 루프 위를 돌고 있다. 어떤 선택을 하든 결국에는 정해진 운명으로 수렴하게 되는, 한 치의 틈도 없는 예정조화의 우주다.
반면 멀티버스 분기 구조는 정반대의 철학을 따른다. 여기서 시간은 직선이 아닌, 선택의 수만큼 갈라지는 가지 구조다. 과거로 돌아간 주체는 새로운 선택을 통해 전혀 다른 미래를 창조할 수 있으며, 그 결과로 이전의 세계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된다. 세계는 고정된 하나가 아니라, 수없이 중첩되고 갈라지는 가능성의 군집으로 존재하며, 그 중심에는 항상 자유의지가 있다. 이 구조는 인간의 후회를 구원하고, 실패를 수정할 수 있는 두 번째 기회를 제공한다. 우리는 과거의 선택에만 묶여 있지 않으며, 지금의 결단이 미래를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결국 회귀물의 구조는 단순한 이야기 틀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우리가 시간과 삶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비추는 하나의 거울이자, 서사 속 선택의 윤리다.
그렇다면 이 두 구조, 자기일관성 루프와 멀티버스 분기는 어느 쪽이 먼저 등장했을까? 혹은 어느 한쪽이 좀 더 진보했거나 개선된 개념인지 궁금해졌다.
작품들을 시간순으로 살펴보면, 1984년의 『터미네이터』나 1985년의 『백 투 더 퓨처』처럼 아주 이른 시기부터 회귀물은 양쪽 구조를 모두 실험해왔다. 『터미네이터』는 명백한 자기일관성 루프 구조였고, 『백 투 더 퓨처』는 멀티버스적 상상을 훨씬 자유롭게 활용했다. 이후에도 『어바웃 타임』, 『나비효과』, 『인터스텔라』, 『재벌집 막내아들』 등은 각각 서로 다른 철학과 논리를 바탕으로 회귀의 세계를 구축했다.
이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회귀물은 특정 방향으로 진화하거나 점진적으로 단일한 패러다임을 향해 수렴해간 장르가 아니었다. 오히려 서로 다른 시간관과 세계관이 동시다발적으로 시도되고, 교차하며, 반복적으로 회귀해온 장르다. 말하자면, A와 B는 서로 다른 이념의 두 갈래길이 아니라, 동일한 지점에서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두 개의 이야기 엔진이었다.
이처럼 회귀물은 한 가지 진리나 정답을 향해 나아가기보다는, 시간과 인과에 대한 상상력을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실험의 장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 실험은 오늘날 B+와 C 구조 같은 새로운 지평으로도 확장되고 있다.
회귀물은 처음에는 주인공 개인의 두 번째 삶에 집중하지만, 그 회귀가 여러 번 반복될 경우 이야기는 점점 복잡해진다. 특히 ‘기억을 가진 채 반복되는 회귀’는 주인공에게 과거에 없던 통제력을 부여한다. 반복의 누적은 우연이 아니라 의지를, 경험이 아니라 전략을 만든다. 이제는 자기일관성과 멀티버스의 구분을 넘나들며, 시스템적으로 더 복잡한 방식으로 회귀물의 구조를 설계하는 시도들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최근 주목할 만한 새로운 방식은 다음과 같다.
대표작: 『체크포인트』
이 웹툰에서는 회귀가 단지 주인공이 새로운 인생을 사는 문제가 아니다. 주인공은 체크포인트라는 능력을 가지고 여러번 특정 포인트로 되돌아가서 시행착오법으로 전략을 구사해 무엇인가를 '해결'해나간다. 회귀는 반복의 누적을 통해 설계되고, 전략화된 행동의 도구가 된다.
그러나 이 반복 속에서 민감한 누군가는 지금 세상이 '회귀'하며 똑같은 시간이 반복되고 있는것을 '자각'하게 된다. 그리고 '자각자' 중 오히려 해당 능력을 사용하는 주인공을 이용하여 시간선을 지배하려는 '관리자'가 나타난다. 그는 자각자들과 체크포인트 능력자를 잘 섞어서 특정한 미래를 만들어 내는 방식으로 시간여행의 권력을 행사한다. 다시 말해, 회귀는 더이상 개인의 서사가 아니라 시스템으로 활용 또는 악용 될 수 있는 대상이 되어버린다.
확장 예시: 『테넷』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역시 시간을 조작 가능한 시스템으로 바라보는 회귀물의 확장형이다. 이 작품에서 시간은 선형적으로 흐르지 않고, 엔트로피를 반전시킨 ‘시간 역행’이라는 물리학적 장치를 통해 거꾸로 살아가는 존재들이 등장한다. 작중 인물들은 역행 장비를 이용해 과거로 돌아가 특정 사건을 수정하거나 미래를 방어하고, 이 모든 흐름은 일종의 작전처럼 진행된다. 시간은 단순히 배경이 아니라 작동 가능한 기술이자 군사 전략의 무대가 된다.
『체크포인트』가 회귀를 시스템화했다면, 『테넷』은 시간 자체를 물리적으로 전환하며 조작의 대상으로 확장했다. 여기서 회귀는 더 이상 "다시 살아보기"의 정서가 아니라, 과거에 개입하고 미래를 지키기 위한 작전 시뮬레이션이다.
대표작: 『나노마신』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 자기일관성 루프 구조를 따르되, 회귀자와 반(反)회귀자의 개입이 누적되어 복잡한 시간선 상호작용이 벌어진다. 각 회귀자는 자기의 미래가 유리하도록 과거에 개입하지만, 이 개입이 다른 회귀자의 개입과 충돌하면서 또 다른 미래를 만들어내고, 결국 다시 시간선에 간섭자가 등장하게 된다. 이 구조는 마치 자기일관성 루프를 시스템화하여, 무한루프 속에서 살아남은 의식만이 미래의 권리를 갖는 구조로 확장된다.
결국 회귀물은 단지 시간의 방향을 거슬러 올라가는 서사가 아니다. 그것은 실패를 돌아보는 인간의 후회, 다시 선택하고 싶은 인간의 갈망, 그리고 삶을 바꾸고 싶다는 희망이 만들어낸 정서적 장르이자 철학적 은유다.
과거는 바꿀 수 없다는 냉엄한 현실 앞에서, 회귀물은 ‘만약’이라는 상상을 무기로 현재를 재구성하려는 시도다. 그리고 그 시도는 더는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시스템화되고 시간을 다루는 방식 자체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메타 서사로 진화하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시간의 직선 위에 살고 있지만, 이야기만큼은 그 직선을 거슬러 자유롭게 움직인다. 회귀물은 그렇게 문학과 영상이 시간을 실험하는 가장 극적인 장르이자, 동시에 우리가 ‘지금-여기’를 이해하려는 방식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위트를 덧붙여보자. 미래의 내가 끊임없이 과거의 나에게 돌아와 비트코인을 사라고, 어떤 주식을 사라고, 어떤 사람은 만나지 말라고 말하고 있음에도 내가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것이라면,
자기일관성 루프에 따르면, 미래의 나는 지금처럼 비트코인을 하나도 갖고 있지 않을 존재일것이고
멀티버스 분기론에 따르면, 새로운 미래는 이미 다른 평행세계로 갈라져서 현재의 나와는 무관한 길을 걷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가능성과 패러독스의 끝에서 결국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다시 이 순간의 선택을, 이 한 번뿐인 시간선을 살아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