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휘력과 이해의 범주
요즘 나는 '단어'가 문제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정확히는, 단어가 의도를 오해하게 만들고, 감정을 왜곡하는 순간들을 자주 마주한다. 나는 가끔 사용하는 단어지만, 상대방은 전혀 들어본 적 없는 단어들. 또는 의미는 알지만, 그 단어가 이 상황에서 쓰인 건 어떤 감정이 깔려 있는 게 아닌가 의심하게 만드는 단어들.
이런 경험을 되짚다 보면, 이해심이라는 것은 결국 타인의 언어를 이해하려는 데서 출발한다는 생각에 다다른다. 꼭 온전히 이해하지 않더라도, 이해하려는 태도 자체가 이해심의 시작이 될 수 있다.
고등학교 때부터 친했던 친구는 유달리 문어체적인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내며 대화했다. 반면 대학교 친구 중 일부는 유머와 드립의 일환으로 짧고 날카로운 표현을 즐겼다.
예를 들면, “지하철에 사람이 많았다”는 말을 “서울의 인구밀도에 대해 직접적으로 목도하는 계기가 되었다”라고 표현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 표현이 웃기면서도 절묘하다고 느꼈다. 성남에서 잘 나오지 않던 친구가 서울의 지하철에서 만원 상태를 처음 본 충격, 그리고 그걸 다큐멘터리처럼 느낀 감정을 단어 하나로 감칠맛 있게 담아낸 셈이다.
하지만 내가 같은 말을 했다면 어땠을까.
“목도? 그게 무슨 말인데?” “왜 어려운 말로 기분 상하게 해?” “그냥 사람 많더라 하면 되지.”
또 다른 일화도 있다. 성남 출신의 친구가 서울 오르막길을 힘들어하는 나에게 “이 정도면 평지지. 혹시 서울 사람?”이라며 농을 건넸다. 나는 웃으며 “성남의 피는 거의 남아있지 않아서. 서울 사람은 이만 가보겠습니다”라고 답했다. 우리 사이에서는 해학이자 농담이었다. 그 언덕을 함께 겪은 사람끼리 가능한 언어적 유희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대화를 제3자가 들었다면 어떻게 반응했을까.
“왜 사람 무안 주고 그래?” “서울 산다고 자랑하냐?” “나도 발 아파.” 오해는 언제나 문턱에 있다.
서로 사용하는 단어의 결이 다르고, 그것이 오해로 연결되기 쉽다는 걸 알게 되면서 나는 한 가지 확신하게 되었다. 자신의 언어 체계를 기본값으로 삼는 순간, 타인을 이해하려는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게 된다는 사실이다. 어휘력은 개인의 이해력을 확장시키는 가장 큰 도구일 수 있다. 요즘처럼 단어 하나에도 쉽게 오해하고, 감정이 곧바로 상처가 되어 돌아오는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인지, 최근에 있었던 몇 가지 '어휘' 논쟁들이 내게 남긴 인상이 꽤 깊었다.
하나는 영화평론가 이동진의 '기생충' 한줄평이었다. "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 낸 신랄하면서 처연한 계급 우화"라는 문장.
처음 이 문장을 읽었을 땐 사실 고개를 갸웃했다. ‘명징하게 직조해 낸’이라는 말이 너무 번듯해서, 감탄보다 거리감이 먼저 들었다. 그런데 문장을 곱씹다 보니, 단어 하나하나가 꽤 의미의 결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승과 하강은 공간 구조이자 계급의 메타포였고, '직조'는 이야기의 엮임을 암시했다. '신랄하면서 처연한'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시선에서 느껴지는 불편함과 슬픔을 한꺼번에 담아낸 감정의 복합어였다.
문장은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어려운 문장이 문제인 게 아니라, 그 문장 속에서 의미를 꺼내려는 의지가 점점 사라지는 것이 더 큰 문제다.
또 다른 논란은 '심심한 사과를 드립니다'라는 표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심심한'을 'boring'의 의미로 받아들였고, 결국 이 말은 진심 없는 사과로 오해받았다. 하지만 '심심한'은 본래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을 뜻한다. 진정성을 담은 표현이다. 나도 중학생 때까지는 그 의미를 정확히 몰랐지만, 어렴풋이 그 말에 담긴 정중함을 느꼈다.
그런데 이 표현이 왜 비난받아야 했을까? 문제는 단어 자체가 아니라, 그 단어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 태도, 그리고 그 틈에 반지성주의가 깃드는 사회 분위기다.
“내가 모르는 말을 왜 해?” “왜 나를 오해하게 만들어?” “그 단어 누가 쓰냐?”
이런 반응들이야말로 우리가 얼마나 자주 이해의 문 앞에서 분노를 택하는지를 보여주는 징후다. 중앙일보의 한 사설은 이렇게 말했다. 물론 이 문장을 모든 상황에 일반화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나는 이 말을 읽으며 내 안의 어떤 부끄러움과 마주한 기분이었다. 단어를 둘러싼 오해 속에서, 나도 때로는 더 쉽게 말하고, 더 쉽게 판단하려 했던 적이 있지 않았을까.
“차분한 읽기가 사라지고 표현을 정교히 할 다양한 어휘를 배울 생각조차 안 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필수 전제인 성숙한 시민 문화가 위기에 처했다는 뜻이다… 문제는 더욱 복잡해지는데 사람들은 그 복잡함을 감당하기 싫다는 이유로 화를 낸다면, 거짓으로 단순한 해법을 제시하는 포퓰리즘 지도자들만 부상하기 좋은 조건이 마련된다.”
명백히 부정적인 의도가 전제되지 않는 이상, 대화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단어들이 오해와 불만을 낳기보다는 이해와 소통의 도구가 될 수 있도록 모든 화자와 청자가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 단어가 나에게는 불편했지만, 그 사람에게는 가장 진심을 담기 좋은 표현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 인식만으로도, 우리는 꽤 많은 오해를 피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