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가 왜 거기 있는지부터 알고 있자-
요즘엔 굳이 영화관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 넷플릭스, 유튜브, 디즈니+까지. 누워서, 혼자서, 원하는 타이밍에 끊고 다시 보는 ‘나만의 영화관’이 오히려 더 익숙하다. 영화관에는 큰 스크린, 웅장한 사운드, 팝콘 냄새, 다른 관객과 함께 숨죽이며 보는 느낌—이라는 아주 작은 이점만 남아있다. 그럼에도 몇몇 영화는 꼭 스크린으로 봐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압도적인 시각 효과, 거대한 생명체, 무너지는 도시, 달리는 공룡들.. 그런 장면은 여전히 대형 화면과 5.1채널 사운드로 경험해야 제맛일 테니까 말이다.
이번에 개봉한 『쥬라기 월드 4: 새로운 시작』을 보러 영화관을 찾았다. 나는 쥬라기공원이 한글 제목으로 언제 쥬라기월드가 되었는지도 모르는, 그야말로 이쪽 분야의 문외한이다. 하지만 이날은 적당한 킬링타임과, 기억 속 희미한 과거의 영광을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선택한 영화였다. 쥬라기 공원 영화는 본 적 있냐는 아내의 질문에 나는 이렇게 말했다.
'크리스 프랫 나와서 영화소개하는 프로에서는 본 것 같은데... 공룡으로 테마파크 만들어서 뭐 하는 거 같던데?'
그리고 이번 영화는 그 테마파크에서 여러 가지 사건이 터진 이후 폐쇄된 지 17년이 지난 시점부터 시작한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17년 전, 인젠(InGen)사의 유전자 실험실에서 발생한 사소한 사고—근무 중 한 연구원이 스니커즈 초콜릿 포장지를 제대로 버리지 않아 출입 시스템이 오작동하면서 발생한 사고로 인해 실험실이 폐쇄된다. 그리고 2027년. 세상은 바뀌었다. 도심 곳곳에 공룡이 출몰하고, 인간과 공룡이 억지로 공존하고 있는 시대. 하지만 여전히 많은 공룡들은 인간 사회에 녹아들지 못하고, 적도 인근에 위치한 세인트 휴버트 섬에만 모여 군집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
이때 제약회사 소속의 마틴 크렙스는 전직 특수부대원이자 생존 전문가 조라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한다. 심장병을 완치할 수 있는 신약을 개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고, 그 핵심은 “살아있는 공룡의 혈액”이다. 조라는 과거의 트라우마로 주저하지만, 마틴이 제시한 보수는 무려 천만 달러. 결국 그녀는 임무를 수락하고, 공룡 전문가 헨리 루미스 박사를 비롯한 옛 동료들—던컨, 바비, 르클레르, 니나—와 함께 섬으로 떠난다.
한편 같은 시기, 루빈이라는 남성과 두 딸 테레사, 이저벨라, 그리고 딸의 남자친구 제이비가 요트 여행 중 모사사우루스의 습격을 받아 조난을 당하고 구조신호를 보낸다. 조라 일행은 구조 신호를 외면할 수 없다며 방향을 바꿔 이들을 구출하고, 우연히 함께 섬에 상륙하게 된다.
이후 영화는 크게 두 개의 축으로 나뉜다.
- 조라와 팀원들은 공룡들의 혈액을 채취하기 위해 모사사우루스(수상), 티타노사우루스(초식), 케찰코아틀루스(비행)의 표본을 수집하고,
- 루빈 일행은 살아남기 위해 섬을 탐험하면서 티라노사우루스와 뮤타돈, 벨로시랩터에게 위협당하는 과정이 이어진다.
마침내 인젠사의 폐쇄된 연구소에서 양측이 재회하지만, 디스토르투스 렉스라는 이름의 유전자 조작 괴수 공룡이 등장하면서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는다. 그러나 조라와 생존자들은 루미스 박사의 조명탄 덕분에 섬을 탈출하는 데 성공하며 영화는 마무리된다.
『쥬라기월드 4』의 부제는 ‘새로운 시작’이지만, 나에겐 ‘뻔한 반복’ 같이 느껴진다. 쥬라기 공원이라는 익숙한 세계관에 최신 유행 윤리와 자본 논리를 덕지덕지 붙인 이 영화는, 되려 SF가 보여줄 수 있는 상상력의 깊이를 얕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현실의 복잡한 시스템을 비추어 보니 영화 속 설정이 더욱 허술하게 느껴졌다. 특히 나는 영화 속 개연성이 떨어지는 순간들을 볼때마다 '영화 바깥'으로 튕겨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왜 저 인물은 저런 행동을 하고 있는거지?" 라는 식으로 이해와 공감이 되지 않아서, 영화에 현실로 툭- 떨어지는 것 같았다. 해당 순간들을 집어내서 지적해 보고 굳이 현실감각과 타협한다면 어떤 식으로 내용이 흘러갔어야 했을지 아래 목차처럼 생각해보고자 한다.
1. 아주 사소한 일이 큰 일을 만든다.
2. 신약개발 바이오 회사에 대한 인식
3. 천만달러짜리 단순업무
4. 물에 빠진 사람 구해줬더니 봇짐 내놓으라고 한다.
5. 공룡들은 몸집에 비해서 아주 작은 인간들을 왜 이렇게 집요하게 공격하는가
아주 사소하면서 우연한 일이 큰 사건으로 번진다는 건 잘 알려진 클리셰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너무 사소한 일로 큰일이 벌어졌다.
쥬라기 월드 4의 서사는 초콜릿 포장지 하나에서 시작된다. 그것도 근무 중 몰래 스니커즈를 까먹은 인젠사 소속 연구원이 포장지를 실험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버린것 때문이다. 그 사소한 행동이 출입 통제 시스템을 마비시켰고, 결과적으로 유전자 실험실 전체가 붕괴되는 사고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그 여파로 연구소는 폐쇄됐고, 영화는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미래에서 다시 시작된다.
근데 이 실험실,
공룡 DNA를 직접 다루던 고등위험 생물유전자시설이었다. 해당 연구소에서는 각 섹터들이 안전 등을 이유로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 심지어 어떠한 문은 안에 있는 사람과 밖에 있는 사람이 투명 유리창을 바라보며 동시에 키를 돌려야 열릴 정도로 보안이 철저하다. 게다가 대부분 연구소 인원들은 마스크까지 착용하고 있다. 그런데 사소한 일이라는 게 연구소 인원 중 한 명이 근무 중에 '아주 태만하게' & '마스크도 끼지 않고' & '나 혼자서만 대놓고 초코바를 까먹다가' & '그 껍질을 주머니에 넣지도 못해서' 출입 시스템이 마비되었다는 설정인 것이다.
국내 중견기업에서도 이런 일은 없다. 식품이나 의약품 생산 공장만 가보더라도 보안 수준이 매우 높아 인적오류가 발생하기 어렵다. 공간별로 보안등급에 맞게 옷을 입어야 하고, 다음 룸으로 들어갈 때마다 클린룸을 통과하기까지 해야 한다. 하지만 영화속 실수가 나오는 환경이려면, 천장이 없는 무더운 황무지에서 잘 포장된 박스를 옮기는 상황 정도여야 개연성이 조금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하물며 '대 미국'에서 이렇게 단출한 시스템으로 공룡 유전자 연구를 하고 있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게다가 그걸 인지하고 복구하는 시스템도 없었다. 이 정도면 AI도 아닌, 그냥 자판기 수준이다. 영화니까 가능하다고 넘기기엔, 이 설정은 너무 무책임하다. 클리셰라고 하기엔 클리셰의 체면이 아깝다. 우연이 큰 사건을 만들 수 있다는 건 이해한다. 하지만 최소한 “그럴 법한 우연”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화 속 모든 사건은 모 제약회사의 신약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하다보니 생긴 일들이다. 그 회사는 "어떤 공룡의 혈액을, 살아있는 상태에서 채취해 온다면, 심장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완치에 가까운 약을 개발"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실행에 옮긴 것이다. 하지만 영화 줄거리가 진행되면서 제약회사 담당자(마틴)와 자문 역할을 수행하는 교수(루미스)와 이견이 발생한다. 이견이랄 것도 없이 교수의 독단적인 판단으로 이렇게 결론 지어 버린다.
'공룡 혈액을 채취하는 것까지는 협조하겠으나, 일이 끝나고 나면 제약회사로 가져가지 않고 모두가 값싸게 쓸 수 있게 하겠다'
그리고 교수는 이번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핵심 인력(조라)에게 네가 판단하라고 책임을 떠넘긴다. 이에 천만달러라는 큰 돈을 벌겠다는 일념으로 합류한 조라는 '그까짓 돈 안받고 말지-'라는 식으로 의사결정을 한다.
여기서 아주 큰 의문점이 생긴다.
이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실제로 수행하면서 초기 자본금을 지원한 제약회사는 왜 배척받는가?
뒤에서 후술 하겠으나 조라는 정의롭고 도덕적인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에 매몰되어 있는 상태다. 이것은 그녀의 캐릭터성을 탓할게 아니다. 오히려 미국 영화계를 휩쓸고 있는 기계적 PC에 의해서 당당하고 파워풀한데 이성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완벽한 인물을 연기해야 해서 그럴 것이다.
루미르 교수는 제약회사가 결과물을 갖게 된다면 큰 일이 벌어질것처럼 말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심장병 약은 너무 비쌀 것이라서 소수의 사람들만 혜택을 볼 것이라며 조라를 설득한다. 이 말 한마디에 본인에게 천만 달러를 주겠다며 일을 의뢰한 사람을 등지고, 실제로 신약개발 프로세스가 어떤지 고려하지 않은 상태로 단독 의사결정을 한 것이다. 다행히(?)도 마틴이 섬을 떠나기 직전에 공룡에게 뜯어먹혀 버려서 논쟁은 벌어지지 않았다. 다만 그가 사망하지 않았더라면 조라는 어떤 의사결정을 했을지 너무 궁금하다. 돈 있는 소수만 혜택을 봐서는 안된다는 대의를 위해 마틴을 쏴서 죽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또는 루미르 교수와 협의하여 공룡 혈액을 50:50으로 나눠가졌을 수 있다. 절반은 신약개발 회사에, 절반은 공공의 목적을 위한 연구에 쓰게 조정한 것이다.
영화를 영화로만 보지 못한 분노가 치밀어 오른 데에는 이유가 있다. 신약개발을 하는 바이오회사들이 어떤 고난의 시간을 감내해내야, 하나의 신약이 나올 수 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래의 그림은 여러 간담회에서 사용된 모 VC의 설명회 자료를 발췌했다.
신약 개발이라는 것은 엄청나게 오래 걸리는 일이면서 실패할 리스크가 매우 높다. 그래서 하나가 성공을 했을 때 나머지 실패들을 상쇄시킬 만한 베네핏이 있어야 한다. 그 말인즉슨, 신약개발에 성공해서 판매를 통해 수익을 얻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동안 쏟아보은 비용을 회수할 수 없는 구조라면, 신약개발을 끌고 갈 유인이 없게 되는 것이다. 대승적인 책임감만을 요구한다면 누가 혁신하려고 하고, 누가 시장을 선도하려고 노력할 것인가.
예상해 보건대, 제약회사에서는 mRNA 플랫폼 등을 통해서 특정물질을 활용할 경우 심장병에 즉각적인 효과를 주는 약을 개발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위 그림에서 설명되어 있는 바와 같이 그저 후보물질 발굴의 단계일 것이다. 양자컴퓨터까지 상용화된 세상에서 시뮬레이션을 돌렸다고 가정한다면, 특정 물질을 확보만 해온다면 독성 평가까지 완료한 임상 1상은 끝낼 수 있다고 확신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도 겨우 이제 10개 중에 1개만 신약으로 시판될 수 있는 단계가 됐을 뿐이다.
게다가 루미스 교수의 제안은 실효성이 매우 떨어진다.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신약개발이라는 것은 소요기간 만큼이나 소요 비용이 천문학적으로 필요하다. 하지만 교수가 공공 이익을 실체화하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우선, 공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는 기관에서 임상시험을 할 수도 있겠다. 아니면 대학 등의 기관에서 해당 혈액을 가지고 최소한 전임상시험 까지는 통과시켜줘야 할 것이다. 마치 과거에 리눅스(Linux)에서 오픈소스로 생태계를 만들어서 다 함께 개발을 이어갔던 것처럼 전임상시험 결과를 공개하여 "앞으로 아무나 더 개발해보세요~"라고 하려고 했던 것일까- 생각해 본다.
그렇다면, 제약회사가 신약개발을 위한 후보물질을 확보하는 데에 무지성으로 막아설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비싸게 팔려서 몇 명 혜택을 못 본다는 것보다 중요한 게 있다. 신약개발이 성공할지 말지도 모르는데, 일단 개발이 원활하게 이루어진 다음에 생각해도 될 일이다. 게다가 신약개발에 대한 특허가 만료되었을 때 바이오시밀러 제품으로서 전 세계에 더 빠르게 퍼질 수 있는 가능성도 있지 않은가?
제작자는 제약회사를 악역으로 만들고 싶어 했지만, 정작 악역은 “논리의 부재”였다. 공룡보다 무서운 건 자본이 아니라, 책임 없이 선언되는 선의다.
천만달러를 준다고 제안하고 시작한 일 치고는 꽤나 단순한 업무였다. 영화에서는 그 숫자를 꽤 멋들어지게 말하는데, '0이 6개가 들어간 거 10장 주겠다'-라고 말한다. 천만 달러면 현재 환율을 고려했을 때 약 130억 원이다. 공룡의 권리도 있는 세상으로 미루어보건대 꽤 비밀스러운 업무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업소득으로 세금을 신고할 것도 아니니 130억 원 그대로 받는 엄청난 고액의 알바(?)인 것이다(!?).
그만큼 조라가 담당한 일은 그녀가 아니면 해낼 수 없을 수준의 임무였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목숨을 건다는 것에서 높게 쳐줄 수는 있겠으나, 130억 원 준다는데 목숨을 걸지 않는다는 게 더 이상한 일인 것이다. 심지어 요즘 세상에 130억 원이 아니라 50억만 준다고 하더라도 선발을 위한 서바이벌을 열어야 할 만큼 지원자가 한가득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존윅도 출전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가 영화에서 보여준 역할이 어떠했는지 봐보자. 타겟으로 설정한 3가지 종류의 공룡 혈액을 채취하는 순간들이다.
먼저, 해양 공룡인 '모사사우르스'다. 그녀는 고속으로 이동하는 배의 앞머리에 몸을 고정한 상태로 공룡을 향해서 총을 발사했야 했다. 한 번은 파도가 쳐서 탄을 허공으로 날려버리는 아쉬운 연습게임까지 발생했다. 물론 10M 이내에서 발사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지만, 이는 같이 배에 승선한 선장 및 선원의 협업으로 꽤 난이도를 낮춰준 부분이라고 생각이 든다.
두 번째로 육지 공룡인 '티타노사우르스'다. 육식 공룡들처럼 그녀에게 위협적이지도 않았고, 매우 거대한 초식공룡일 뿐이었다. 심지어 그 공룡을 아주 평온한 대평원에서 암수컷이 사랑의 목 휘감기를 하던 순간에 맞닥뜨렸다. 동행한 교수는 임무와는 별개로 너무 멋진 광경이라며 공룡의 다리에 손을 얹고 감격스러워하기까지 했다. 얼마나 편안한 일정인가.
마지막으로는 비행 공룡인 '케찰코아틀루스'의 경우다. 익룡 한 마리가 작은 랩터 두 마리를 사냥하는 장면이 나오길래, 인간이 어떻게 상대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너무 손쉽게도 익룡의 둥지를 발견하게 되었고, 공룡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둥지 속 알을 통해 액체를 채취하는 데 성공한다. 물론 뒤늦게 둥지로 돌아온 공룡에 의해 동료를 잃기는 했지만, 그것은 조라가 해결했어야 하는 일도 아니었다.
메인 퀘스트는 세 건의 샘플 채취로 '미션 컴플릿트' 해냈다. 근데 이 미션은 '미션 파서블' 그 자체였다. 목적지 가는 길에 배 근처를 지나가던 공룡에게 발사 / 교미하려는 공룡 근처 가서 발사하고 / 빈집에 들어가 알에다가 발사하기. 지나고 보면 다 별일 아닌 것 같다고-할 수 있겠지만, 이건 정말 별일 아니었던 것 같다. 조라가 아니었으면 안 되는 미션처럼 시작했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아예 130억을 예산으로 삼아서 4인 1조 팀을 구성했다면 실손보험도 들고 다녀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문제는 그다음이다. 그렇게 어렵지 않게 모은 샘플을, 의뢰자인 마틴에게 넘기지 않기로 결정한다. 임무는 마쳤고, 약속한 보수도 받을 수 있었지만, 조라는 루미스 박사의 “공익적 가치”라는 설득에 넘어가 혈액 샘플의 사용처를 바꿔버린다. 결국 제약회사는 아무것도 받지 못하고, 마틴은 결국 디스토르투스 렉스의 식사 코스로 퇴장한다. 마틴이 죽지 않았어도 제약회사는 아무것도 받지 못하는 결론이 되었을 것이다.
조라는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다. 돈도 안 받고, 사명감도 불분명하다. 그냥 윤리적 선택을 했고, 이를 보는 관객들은 박수쳐야 된다고 강요하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래서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이건, 천만 달러도 안 받고 고생한 이야기인 건가? 루미르 교수가 심장병 신약개발 잘 해내지 못할 거 같은데”
선장과 조라는 정의심을 불태우며 목적지 도착 5분 전에 구조신호 위치로 배를 선회한다. 그렇게 구해준 4명(루빈, 테레사, 이사벨라, 제이비)은 구해줘서 감사하다는 말보다는 적당한 위치에 내려다 주면 알아서 가겠다고 말한다. 심지어 총기가 오가고 공룡들과 맞서싸우는 모습을 보며, 당신들 대체 뭐냐고 되묻는다. 구구절절 모든 이야기를 해줄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본인들이 전후사정을 알아야겠다고 주장하며 제대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냐며 훈계하는 지점이 다다른다.
앞서 논의한 바와 같이 신약개발 프로세스 중에서 후보물질 발굴도 중요하다. 그래서 보안이 유지되어야 할 사항이다. 그런데 구조신호를 보낸다면 모두 헛수고로 돌아갈 수 있다. '어떤 제약사를 필두로 한 무리가 공룡 서식지에 몰래 접근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모두에게 난처한 일이 되기 때문이다. 난파당해 구조된 인원 4명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나는 이런 이유로 마틴이 구조신호를 보내려는 테레사를 저지했다고 생각한다. 당시는 공룡들의 공격으로 배가 기울어져 제 한 몸 가누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런데 언제 구조신호를 다시 보내려고 시도할지 모르는 인원을 구하기 위해 마틴이 몸을 내던졌어야 했나 싶다. 나였어도 도의적으로 사람은 살려야지-라고 말은 하지만 몸을 내던져 구해내려고 하지 않았을 수 있다. 구해주되, 서로의 일을 캐묻지 않고 간섭하지 않겠다는 서약은 좀 받아내야 살리든지 말든지 결정할 것 같다.
그런데 이 사건을 두고, 조라는 혹시 일부러 안 구해주진 않았지? 라며 마틴을 질책한다. 그들의 원래 목적보다 '사람을 구해야지'라는 식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니 보는 내가 다 답답하다고 느꼈다. 그녀와 일을 한다면 일을 잘 해내는 것보다 부차적인 것으로 꼬투리를 잡을 것이라고 걱정해야 한 달 까나. 내가 마틴이었다면 지금 현재 임무의 제1 원칙과 목적이 무엇인지 주지 시키며 팀을 장악해 놓았을 것이다. 왜 우리가 여기에 모여있는지, 얼마나 비밀이 유지되어야 하는지 등등 말이다. 원팀이라면 응당 그래야 하지 않는가?
결국 영화는 마틴을 나쁜 사람으로, 조라를 도덕적 영웅으로 그리려 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이 장면에서 가장 위험했던 건 마틴도, 공룡도 아니다. 상황 판단보다 감정적 정의감이 먼저 나서는 대사 구조였다.
가장 먼저, 모사 사우르스는 루빈 가족의 요트를 들이받는다. 정교한 유도탄처럼 수면아래서 상승해서 요트를 전복시키는 장면은 그야말로 살의 그 자체다. 굳이 요트에 정면으로 박아야 했나? 게다가 루빈 일행은 무장도 안 돼 있고, 위협적인 행동을 한 적도 없으며, 그냥 바다 위를 떠다니던 가족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모사사우루스는 수면 아래에서 다이빙 유도탄처럼 정확하게 노렸다. 그 에너지를 차라리 해류를 따라 이동하는 데 썼으면 훨씬 생산적이었을 것 같다.
티라노사우루스와 뮤타돈, 그리고 최종 보스 디스토르투스 렉스의 집착은 더 심각하다. 단순한 먹잇감을 넘어선 듯한 광기가 느껴질 정도다. 특히 디스토르투스 렉스는 선착장 앞까지 따라와서 마지막 문을 부수기 직전까지 가는데, 그 이유가 뭔지 명확하지 않다. 마틴이 그 앞에서 지프차를 몰고 도주하다가 들이받자, 그를 잡아먹는 순간 시선이 잠깐 분산되는데, 이때가 아니었으면 일행 모두 죽었을 것이다. 말 그대로 “사람만 보면 킬” 모드다.
게다가 뮤타돈 무리들도 지열 발전소 작동 이후 몰려오는데, 그냥 쫓아오는 게 아니라 문, 벽, 천장까지 뚫는다. 마치 인간을 죽이기 위해 태어난 존재처럼. 이들이 연구소에서 인위적으로 태어난 유전자 조작 공룡들이라는 설정을 감안해도, 인간 감지 → 추적 → 포획 → 사망의 알고리즘은 너무 완벽하다. 어지간한 AI 군사용 드론도 이 정도는 아니다.
대형 육식 공룡 T-렉스는 개울가 근처를 걷는 인간 네 명을 발견하자마자 미친 듯이 들이닥친다. 근데 그걸 왜? 인간 네 명을 잡아먹는다고 해서 저 덩치에 들어갈 영양분은 거의 없다. 암소 세 마리는 먹어야 간식이라도 되는 수준인데, 인간은 뼈밖에 없고, 심지어 지능과 도구를 써서 반격까지 하는 종족이다. 공룡계의 가성비로 치면 이건 최악의 선택이다. 단백질 섭취가 아니라 거의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행동처럼 보였다. 말 그대로 화풀이.
더 어이없는 건 공룡의 추적 방식이다. 해당 장면에선 T- 렉스가 고무보트를 따라가다가, 굳이 선두로 돌아가 보트 앞에 미리 대기한다. 그 모습은 마치 여울에 서서 뜰채를 들고 송사리 낚는 사람 같다. 그냥 지나가는 인간을 습격하는 게 아니라, 방향을 예측해 기다렸다가 튀어나오는 수준이라면, 이건 본능이 아니라 거의 사냥 계획서가 있었던 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이쯤 되면 ‘공룡이 인간을 위협으로 인식한다’는 식의 세계관 설정이라도 있어야 한다. 예컨대 유전자 조작 과정에서 “인간의 특정 페로몬에 반응하도록 설계됐다”는 설명이라도 있었다면 납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 속 공룡은 그런 설명조차 없이, 그냥 인간이 보이면 쫓고, 안 보이면 잠깐 숨 쉬는 단순한 알고리즘처럼 행동한다. 그야말로 고전 게임 속 몹 AI 수준이다.
심지어 공룡들이 인간을 공격하는 장면마다 살의만 가득해서 '살인의 추억'의 대사가 떠오른다.
“밥은 먹고 다니냐?”
도대체 무슨 원한을 품었길래 이 정도로 집착하는 건가. 먹을 것도 아닌 상대를 굳이 물고 뜯고 쫓아가는 장면이 반복될수록, 스릴은 사라지고 ‘이 공룡은 왜 이러는가’라는 의문만 남는다. 결국 『쥬라기 월드 4』는 공룡을 위협적인 존재로 보여주려다, 오히려 그 집착의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면서 설정의 허점을 더 드러내버린 영화가 됐다. 먹고살기도 빠듯한 시대, 이렇게 비효율적인 생물체는 현실에서 이미 멸종당했을 것이다.
결국 이쯤 되면 설정이 필요하다. “디스토르투스 렉스는 인간의 DNA 냄새에 반응하도록 설계되었다” 라는 식의 한 줄 설명이라도 있었으면 괜찮았을것이다. 하지만 없다. 단지 화면에서 극적 긴장을 유지하려는 장치라는 게 너무 눈에 보인다. 오히려 『쥬라기 월드 4』는 공룡보다 사람을 공포스럽게 그리는 데 실패한 영화가 아니라, 사람보다 공룡의 감정선을 더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