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큼 그들에게도 치열한 계획이 있다.
세상에 책은 많고, 읽으면 좋은 책도 엄청나게 많다.
그래서 한정적인 시간을 효율적으로 보내고자 누군가의 추천이나 과거의 고전들을 먼저 답습하곤 한다. 내가 신간을 게걸스럽게 읽어냈다간 본업이라는 것을 전혀 수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높은 확률로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아직도 못 읽어본 고전과 최근 유명인으로 떠오른 작가들의 작품들을 읽는데만 해도 내 독서시간의 대부분을 쏟을 수 밖에 없다.
이렇게 읽는 책들은 가깝게는 30년 전, 멀게는 2천 년 전의 시대상을 반영한 내용을 담고 있다 보니, 현재의 시류를 반영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는 많지 않은 독서를 하면서 컨템포러리(contemprorary)를 속으로 갈망해왔다. 하지만, 최근을 반영한 책일수록 아직 고전이나 레전드로 남기에는 부족한 깊이를 가진 경우가 다반사라 아쉬움을 느끼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 그렇다고 최근 발간된 신간들이 레전드로 충분히 걸러진 이후까지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면, 내가 시행착오를 겪는 것만큼이나 많은 시간을 허비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10여 년 전부터 문학동네에서 나오는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사서 읽곤 했다. 또는 이상문학상, 한국일보 신춘문예 등을 통해서 최근의 글쓰기 트렌드는 어떤지 엿보곤 했다. 여기서 말하는 트렌드라는 것은 글쓰기 스타일에 한정되지 않는다. 글의 배경이 되는 시대상이나 나와 동나이대의 사람들이 고민하는 것들이 어떻게 담겼는지를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나의 갈증을 알고 있는 친구가 추천해준, 202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복 있는 자들』은 나에게 그 시의성을 치열하고 명징한 방식으로 건넸다. 그래서 그 친구와 함께 후기를 작성해보았다.
줄거리나 후기를 쓰기에 앞서, 요즘 작가들의 높은 벽이란 얼마난 높은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나름 브런치 스토리를 통해서 글을 찌끄리는 중이라고 자평하는 나에게는 더 높게만 느껴졌다. 나도 글이라는 것을 구조 있게, 통찰력 있게, 시대를 반영할 수 있게 하려고 노력했지만 이번 당선작은 차원이 달랐다. 작가가 심어놓은 복선들을 아무렇지 않게 지뢰 밟듯 읽어나갔는데, 클라이맥스에서 저항 없이 터져버렸다. 최소한 4번은 펑-하고 터져버린 것을 보면 작가는 굉장히 많은 기관진식을 만들면서 글을 썼다고 추정된다. 복선뿐만 아니라 주제의식도 확실하다. 짧은 단편이지만 소설 속 특정 기간에 발생하는 사건들을 관통하는 주제의식이 정확하게 한 줄로 정렬되어 내용이 전개된다.
줄거리는 아래와 같다.
주인공 "나"와 엄마는 아현 재개발지구 내 임대아파트에 산다. 이곳은 아버지가 무일푼으로 세상을 떠난 뒤, 유일하게 얻은 ‘은혜’였다. 나와 엄마는 주거급여 수급 조건을 맞추기 위해 소득을 최소화하고 생활을 유지한다. 하루 97만 원 이하만 벌며 수급자 자격을 유지하고자 했지만, 어느 날 ‘부정수급’으로 신고당한 공문이 날아온다. "나"는 자신을 신고한 이가 누구인지 가늠하며 분노와 의심에 휩싸인다.
복지 자격을 유지하려면 엄마를 세대원으로 등록해야 하고, 두 사람의 합산소득이 기준을 초과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월 200만 원의 수입은 기준을 넘는다. 절망 속에서 엄마는 아랫배 통증으로 쓰러지고, 난소 종양이 발견된다. 수술비는 150만 원, 가진 돈은 80만 원. "나"는 돈을 빌리기 위해 수영장에서 만난 류아 언니에게 부탁하지만 거절당한다. 언니는 오히려 “편법 말고 정당하게 살아보라”고 충고한다.
개구리 울음소리로 잠을 이루지 못하던 "나"는, 부유한 입주민 아이들이 연못에 기르던 올챙이를 버렸다는 사실을 듣는다. “112동은 임대니까 진짜 주민도 아니다”라는 아이들의 말에 치욕을 느낀다. 관리사무소에 민원을 제기하지만 진짜 주민이 아니라는 이유로 묵살된다. 수급 자격을 상실하고, 돈을 구할 길도 막힌 "나"는 한밤중 생태연못에 개구리알을 풀어놓는다. 그리고 이렇게 저주하며 다짐한다: “더럽고 비루하게라도, 서울에 들러붙어 살겠다.”
나는 정확히 네 번 소름이 돋았다. 이 짧은 소설을 읽는데도 뭐 그리 여러번 소름이 돋냐며, 건강이상설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직접 찾아서 읽어보길 바란다. 내가 읽었듯이, 아래 링크를 타고 들어가서 한국일보 홈페이지에서 읽어보길 바란다.
[2025 한국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복 있는 자들' | 한국일보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122313320000807
『복 있는 자들』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너무 가난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가난하지 않지도 않은’ 애매한 경계에 선 삶이다. 적확한 표현은 아니겠지만 ‘적당히 가난한 사람’이 가장 위태롭다. 제도는 수치를 기준으로 지원 대상을 정하고 있어, 어떤 사람들은 그 경계에 들기 위해 삶을 조율한다. 그러니 가난도 일종의 전략이 될 수도 있겠다.
"나"는 주거급여 수급조건을 맞출 만큼 가난하지만, 가난을 피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면 가난하지 않음의 임계점까지는 올라갈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하지 않음'으로 지원대상자 범위에 들어가게 되는데, 다양한 혜택을 받으며 열심히 살아보려는 사람들보다는 어떤 면에서 더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러나 아주 조금만 열심히 살면, 쫓겨난다. 아주 조금만 덜 벌면, 살아남는다. 그 경계에 맞춰 살아가는 일은 비루할지언정, “나”에게는 아주 똑똑한 생존 방식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나"는 아등바등 '가난하지는 않음'의 영역에 있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웃기기만 한다. 계획만 잘 세운다면 더 편하게 지내면서 더 많은 것을 누릴 수가 있으니, 다른 사람들은 무턱대고 움직이는 사람처럼만 보인 것이다. 심지어 "나"는 일하지 않음으로 얻은 시간에 지급받은 문화생활 쿠폰으로 수영 강습까지 받을 수 있다. '멈춤'으로써 얼마나 얻는 게 많은 '똑똑한' 삶인가!
하지만 쉽게 얻어낸 가난은 너무 쉽게 무너진다. "나"가 추정하건대, 가난한 놈들의 종특으로 일갈당하는 '남 잘되는 꼴 배 아파서 못 보는'사람들에 의해 쉽게 무너졌다. 편히 살 수 있었는데 말이다. 가난이 문제가 아니라, 가난하게 살아보지 않은 이들의 오해가 위협적이다.
최근 이재명 정부에서 신용불량자들의 대출금 탕감해주는 것에 대해서 기사가 나온 적이 있다. 항간에서는 이렇게 대출금 탕감될 거였으면 왜 개같이 일해서 빚 갚았냐고 분통을 터뜨리곤 했다. 신용불량자로 살걸 그랬다는 반응들에 이재명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신용불량자로 7년 살아보시겠습니까? 장기 악성채무 탕감이 맞다.
삶의 불이익을 감수한 대가조차 누군가는 편법으로 오해한다. 그러니까 “나”같은 사람들은 늘 이런 질문을 안고 살아간다. 이렇게까지 해서 살아남는 게 정말 편법일까-.
"나"같이 적당한 가난함의 영역에 걸쳐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생각해보게 된다.
물론 제도는 개별 사정을 세밀하게 반영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래서 어디에나 회색지대가 존재한다. 가령 연소득 5,000만원 이하에게 50만원 지원금을 준다고 가정해보자.
같은 연소득이라도, 근로소득만 있는 사람과 이자소득이 포함된 사람은 전혀 다른 생활을 한다.
혼자 벌어 생계를 꾸리는 5,500만 원 근로자와, 부모 집에 얹혀사는 4,500만 원 근로자의 체감 여건은 같을 수 없다.
같은 직장인데도 5,020만 원인 A는 지원 제외, 4,990만 원인 B는 포함이라면, 형평성은 어디쯤 있는가?
『복 있는 자들』은 차상위계층에서도 여러가지 삶이 있고, 각자의 고충이 있다는 것을 섬세하게 보여준다. 가난의 구간 안에도 층위가 있고, 그 안에도 서열이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같은 차상위계층인데도 어떤 사람은 ‘쫓겨나는 걸 막기 위해 멈추고’, 어떤 사람은 ‘조금이라도 더 벌기 위해 아등바등’한다.
장 지글러가 쓴 『인간섬』의 내용을 떠올렸다. 이 책에서 지글러는 유럽 난민들이 어떻게 사는지, 난민이 된 사연은 어떠한지 여과없이 보여준다. 해결책을 쏙 빼고 말이다.
누군가는 해결책도 없는 문제제기에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문학과 기록은, 해법 이전에 ‘보게 하는 일’을 한다고 생각한다. 문제를 제기하며 관심을 유도하는 사람들에게, 해결책까지 풀세트로 가져오지 않으면 네 의견은 엉망진창이야-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이 책도 그렇다.
우리가 미처 몰랐던 가난의 전략, 그 전략의 불안정성, 그 안에서 움켜쥔 자존심과 모멸감까지 낱낱이 보여준다. 그리고 조용히 묻는 것 같다.
우리는 누구를 위로하고, 누구를 비웃으며 살아가는가.
그리고 그 감정은, 수영장에서 만난 한 사람의 얼굴로 구체화되었다. 바로, 류아 언니였다.
“나”와 같이 수영을 하는 류아 언니는 아닌 척하지만, “나”를 못마땅해한다.
왜 노력하지 않아? 왜 부정하게 수급조건을 맞춰가며 임대아파트에 들어가? 누구는 노력해서 정당하게 부를 취득하려고 하는데, 너는 왜 부당하게 임대아파트에 들어가?
-라는 노골적인 대사는 없었지만, 글을 읽는 내내 이런 류아 언니의 생각이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류아 언니도 “나“와 비슷한 경제적 조건을 갖고 있다. 주거급여 요건을 맞추려면 편법으로 ”나“처럼 임대아파트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조건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류아 언니의 카페는 그만두고, 곧 남편이 될 남자 친구의 소득만으로 대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야 한다. 그러나 류아 언니는 임대 아파트를 신청해보라는 ”나“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한다.
류아 언니도 “나“만큼 가난하지만,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가난을 대한다. ”나“는 가난을 벗어날 수 없다 생각하고 최대한 이용하려 하지만, 류아 언니는 가난을 탈출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가난을 벗어나 보통의 삶을 살아가고자 노력한다. 이건 각자의 삶이 달랐던 만큼 ‘보통’을 바라보는 가치관이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 일하는 만큼 돈을 벌지 못하는 아버지를 보고 자랐지만, 류아 언니는 일하는 만큼 돈을 버는 가족들 아래서 살아왔다. 그래서인지 류아 언니는 편법적으로 살아가는 ”나“가 맘에 들지 않는다. 언니는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일하는 만큼 벌 수 있는데, 왜 일을 하지 않고 임대아파트에 들어가? 나는 전세사기 위험을 무릅쓰고 신혼집을 얻는데 너는 왜 20년이나 넘게 아파트에 살 수 있어?
나는 “나”보다 류아 언니와 같은 행동이 더 현실에 있을 법하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냉정함과, 누구도 쉽게 비난할 수 없는 선택의 잣대가 언니에게 있었다.
부정수급 물론 잘못된 행동이다. 하지만 “나“의 말처럼, 뼈 빠지게 고생해가면서 버는 돈 중 대부분을 언제 끝이 날지 모르는 대출을 갚아가면서 생활하고, 복숭아도 먹을 수 없고 수영도 할 수 없이 사는 것은 고된 일이다. 결국 그 삶의 끝은 일하느라 갈려나간 낡은 몸뚱이랑 재개발만 기다리는 낡은 아파트일 테니깐 말이다. 하지만 부정수급자로 전락할 수만 있다면, 20년 동안 임대 아파트에 공짜로 살면서 수영도 하고, 과일도 먹고, 일도 덜 하면서 살 수 있다.
두 가지의 삶 중 류아 언니는 전자를,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그리고 류아언니거나 류아 언니와 같이 생각하며 사는 누군가가 “나”를 부정수급자로 신고했다. 서로가 놓인 환경과 선택들을 보며 생각이 꼬리를 물고 끝없이 이어졌다.
이건 온전히 “나”의 잘못일까? 후자의 삶을 선택한 “나”를 비난하는 게 맞는 것일까.
류아 언니의 행동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
올바르지 않았다면 어떻게 하는 게 맞는 행동이었을까
이 둘이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적인 문제가 아니었을까-
수영이라는 운동은 이 소설에서 단순한 취미 그 이상으로 그려진다. "나"는 문화생활 쿠폰으로 수영을 배우며 시간을 보내고, 꽤 성실하게 다닌다. 처음엔 ‘그래, 이렇게라도 뭔가 하며 사는 거구나’ 싶었다. 하지만 중반부를 지나며 의문이 생긴다. 정말, 수영을 한다는 것만으로 충분한 걸까?
작가는 영법 하나까지 삶의 비유로 녹여냈다. 예를 들어 평형에서 사용되는 레그킥은 웨지킥과 웹킥이 있다. 평형에 더 적합한 것은 웹킥으로 새롭게 배워야 하는 방식이다. 더 효율적인 방식이지만 귀찮고 몸이 잘 따라주지 않는다. 그래서 예전의 방식으로 버티며 수영을 해나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저 기존의 방식으로 살며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레그킥의 효율성에서 큰 차이가 발생해서 수영 속도가 차이나게 된다. 결국 “나”는 웹킥을 적용해서 치고 나가는 사람들과 다르게 다리에 쥐가 나고, 수영은 멈춰버린다.
그저 수영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킥의 방식까지 바꿔야 했다.
내가 느끼기에는 작가는 수영이라는 운동을 통해 "나"가 처한 상황을 완벽하게 은유로 그려냈다고 생각했다. 수영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열심히 사는 인생인가. 하지만 무엇인가를 하긴 하지만 개선해내려고 하지 않고 하던 대로만 한다면 효율성의 측면에서 뒤로 밀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전히 웨지킥을 하다가 다리에 쥐가 나서 수영장에 빠져버리는 "나"를 보여준 게 "나"가 사는 삶의 방식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뭔가를 하고 있어’라는 안도감 속에서, 삶의 방식은 바꾸지 않는다. 개선하지 않는다. 그러다 결국 그 방식이 자신을 버린다. 이 얼마나 정확하고 날카로운 묘사인가.
나는 이 대목에서 작가의 필력이 가장 도드라졌다고 느꼈다. 수영이라는 일상의 동작을 통해, 인물의 태도와 구조의 한계를 모두 드러냈다. 그리고 그 결말은 너무도 익숙한 현실의 결말처럼 다가온다 — 뭔가를 계속하긴 했지만, 결국 방식은 낡았고, 몸은 멈췄다.
소설 초반에 문화생활 쿠폰으로 수영을 한다고 했을 때, 참 열심히 생활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했지만
소설 중반에 웹킥으로 넘어가지 않고 하던 대로 하려는 모습에서, 삶을 개선하지 않고 '수영'을 하기만 하면 되는 정도로 왜 그렇게 살까 라며 안타까워하다가
소설 후반에 웹킥을 고수하며 수영하다 다리에 쥐가 나는 모습에서, 지금의 삶의 방식도 곧 멈춰버릴 것이라는 소설 전체적인 흐름과 너무 꼭 맞는 서사였다고 생각한다.
부정수급이라고 신고당한 이후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에 놓은 "나"는 집에서도 비슷한 상황에 놓인다. 무더운 날씨에 여름을 이겨낸다기보다는 그저 여름을 나기 위해 선풍기로 근근히 지내고 있다. 왜 이렇게 더운 거냐며 문을 열어도 밖에서는 개구리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니 신축아파트도 너무 불편하기만 하다. 그러다가 개구리소리가 왜 나는지 알게 된 "나"는 이를 항의하기 위해 찾은 관리사무소에서 큰 벽을 느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목에 땀이 흐르도록 더운 하루를 보내던 "나"와 달리 관리사무소 직원들은 뽀송뽀송하다. 에어컨이 빵빵하게 틀어진 공간이라 누구는 가디건을 입고 있었고, 창문에는 결로현상이 생길 지경이었다.
같이 여름이라는 계절을 지내고 있는데 이 정도로 엄청난 격차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는 것에 충격을 받는다. 이 충격은 부러움을 넘어 여러가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에어컨을 누리고 있는 자들에 대한 분노와 쾌적한 환경을 보고 나니 지금까지 생활하던 공간이 얼마나 낮은 곳에 있는지 깨닫게 되는 자괴감까지 들게 된다.
소설을 보는 내내 "나"에 이입되어 후텁지근한 날에 창문을 열어두고 선풍기를 틀고 있지만 바깥은 시끄럽고 땀은 식지 않고 그저 땀 식히는데만 모든 역량을 다하는 현실 속의 내가 상상이 되었다. 그러다가 소설 속 "나"가 관리사무소에 들어가서 본 풍경을 묘사한 글을 보는데 내게 에어컨 바람이 불어오는 것만 같았다.
정확히는 이미 냉동창고처럼 차가운 공간에 들어가서 그간의 모든 짜증과 힘듦이 일소되는 엄청난 경험을 글로 겪은 것이다.
처음에는 미세하게 신경이 쓰이는 정도의 개구리 소리였다. 뭐 여름을 묘사하는데 개구리 소리만 한 건 없을 테니깐- 이러면서 말이다. 하지만 "나"가 신경 쓰이는 만큼 독자인 나도 개구리 소리가 성가시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파트 단지 설계를 어떻게 했길래 개구리소리가 쩌렁쩌렁 나는 거지- 하면서 말이다.
그러다가 전체 아파트단지에서 일부 동만 임대아파트라는 것을 알고 나니 이것이 바로 차별이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는 비-임대아파트 주민들이 만든 의도적인 차별이라는 것을 알고 분노가 치밀었다. 개구리알 키우기 체험을 하는 어린이를 둔 가정에서 손쓰기 어려워진 개구리(또는 올챙이)를 임대아파트 쪽 개울에 버려버렸다는 게 화가 났다. 생명경시- 이런 것보다 훨씬 단순한 분노였다.
자신들이 귀찮아하는 것들을 자신들보다 아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주변에 버려버렸다는 거 아닌가. 임대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마치 전체 아파트 단지의 군식구처럼 귀찮은 존재처럼 인지하면서 말이다. 앞에서 말한 적당한 가난이나 평형에서 웹킥, 에어컨은 이런 차별에 비하면 귀여운 차별처럼 느껴졌다.
수영이라는 행동과 에어컨이라는 촉감을 넘어서 개구리 소리라는 청각적인 요소까지 활용해서 "나"의 가난한 상황을 묘사할 줄이야. 작가가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방식이, 이 시점에는 극에 달했다고 느꼈다. 장기를 기준으로 말한다면 작가의 포, 마, 차, 졸이 모두 나 같은 독자의 왕을 잡을 수 있는 상황처럼 말이다.
“나”는 자신과 다르게 가난의 기준선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복 있는 자들’이라 부른다. 어느 정도만 노력하면 가난을 벗어날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해도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하지 않았더니, 오히려 더 편해졌다. 수급조건을 맞춰 얻은 문화쿠폰으로 수영을 배우고, 아파트에 오래 거주하며, 과일도 먹고, 조금은 여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었다. 그렇게 ‘멈춤’은 역설적으로 더 많은 것을 가져다주는 듯했다.
하지만 그 삶은 너무도 쉽게 무너졌다. 나를 쫓아낸 건 제도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못된 신고자들, ‘우리’와 ‘그들’을 나누고 싶어 하는 주민들, 보이지 않는 선을 그으며 어느 쪽에 속하는지를 끊임없이 점검하려는 사람들이 그러하다. 그들의 시선이, ‘나’를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나는 묘한 불쾌함과 불편함을 느꼈다. 분명한 소설인데, 너무도 현실 같았기 때문이다. 어딘가에 실제로 존재할 것 같은 인물들과 상황들.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나와 내 친구들의 이야기 같아서, 어느 순간부터는 마음이 답답해졌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어디쯤일까, 나도 모르게 누군가를 판단하며 살고 있는 건 아닐까-.
한국 사회는 이제 아이들조차 임대아파트와 일반분양을 구분하고, 부모의 차종으로 서로를 평가한다. 노숙인이 건물 화장실을 쓰는 것이 불쾌하다는 류아 언니, 연못에 개구리알을 버리는 아이들로 표면화되었다. 그들은 분명 ‘밑’이라고 여긴 사람에게만 그런다. 그렇다면 묻고 싶다. 우리는 정말, 누군가를 깔봐도 되는 존재인가? 무슨 자격으로?
작품의 마지막,
"나"는 연못에 개구리알을 던지며 말한다. “더럽고 치졸하게라도, 들러붙어서 살겠다.”
그 말이 오래도록 맴돈다. 삶이라는 것이 경계 위에 선 자들의 투쟁이라면, 이 투쟁은 누구의 잘못이었을까. ‘하지 않음’으로 편법의 경계에 걸쳐 있는 “나”의 선택이, 정말 그 개인만의 도덕적 실패인지 되뇌었다.
『복 있는 자들』은 단지 가난을 묘사하는 소설이 아니다. 이 작품은 우리가 얼마나 얇고 투명한 벽 너머로 서로를 들여다보고 있는지, 얼마나 쉽게 그 경계를 깔아뭉개거나 외면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조용히 되묻는다.
나는 지금, 누구를 올려다보고 있는가. 그리고 또 누구에게, 올려다보이고 있는가.
이것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