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어 있는 시간과 꽉 찬 하루 사이에서
지난번 이직 관련 글을 올린 이후에 몇 가지 소소한 일들이 있었다.
그때로부터는 2주일이 지났지만, 이직 후 첫 출근으로부터는 1주일이 지났으니 이직 log는 1주 차가 맞겠다.
직장인의 국룰 루트를 밟고 왔다.
'퇴사 후 - 이직 전' 해외여행 출발.
아내와 함께 어디를 갈지 꽤나 고심한 결과, 8월 말에 갈만한 곳을 결정했다. 일 년에 같은 국가를 두 번이나 방문한다는 건 아쉽지만, 태국-푸켓에 가게 되었다.
푸켓에서도 잠깐만 발만 담그다가 피피섬(phiphi island)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일정이었다. 정말 푹- 쉬다가 오자는 컨셉을 가지고, 미리 결정하지 말고 가서 상황에 맞게 움직이자며 숙소만 덜렁 예약하고 출발했다. 어느새 베테랑 여행전문 부부가 된 것처럼 느껴졌지만, 그것은 편안-함을 추구하면 누구나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었을 것이다.
최근에는 여행을 다녀오면 자연스럽게 글을 썼다. 단순히 풍경을 적는 게 아니라 그 순간의 공기, 내가 느낀 감각을 붙잡아두려는 습관이었다. 그래서 브런치스토리는 내게 단순한 기록장이 아니라, 경험을 해석하고 남기는 도구였다.
그런데 이번 푸켓은 달랐다. 그동안의 여행이 ‘발견’이었다면, 이번은 ‘쉼’이었다. 그래서 여행기를 길게 쓰기보다, 이직로그의 한 축으로만 기록해두려 한다.
나는 나의 경험들과 관심사들을 나만의 시각으로 녹여내는 플랫폼을 필요로 했다. 여러 가지 방법 중 글로 써내려 가는 것이 내게 더 적합한 방법이라고 생각해서 브런치 스토리를 선택하였다.
글을 쓰는 시점은 2025년 9월 6일, 네이버웹툰에서 조조코믹스라는 만화는 '천시조'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에피소드가 연재되고 있다. 해당 작품에서 한 인물은 '시'는 왜 빙빙 돌려 말하냐며, 그냥 콱 이야기하면 되지 않냐고 묻는다. 이에 주인공(앞서 질문한 인물도 주인공인가??)은 이렇게 말한다.
나도 잘 모르지만 내 생각에는
더 정확하게 표현하려고 그러는 거 같아
가령 '강아지를 잃어서 슬퍼' 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발끝에 머물던 체온 아직 그리워'
...라고 하는 게 더 와닿지 않아?
내겐 인스타그램의 사진이나 유튜브의 영상보다 브런치스토리의 글이 그렇다.
이번 여행에서 참 많은 사진과 동영상을 촬영했고, 그중 일부는 인스타그램 피드와 스토리에 올렸다. 다시 사진을 보면 그곳에서의 추억도 생각이 나고, 내가 얼마나 좋은 공간을 여행하고 왔는지 되새기는 계기가 된다. 하지만 글로 쓰는 것은 좀 더 깊은 영역이다.
사진과 영상을 담기 위해서는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 위해 최소한 핸드폰을 손안에 쥐어야만 하는데, 그런 게 생각나지 않을 만큼 실시간으로 진행되고 경험하는 순간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그것이 내 목표물이다.
내가 캐치하고 담아내고자 하는 것들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푸켓 여행에서의 경험도 나의 의지를 이어가기 위해 여행 후기를 쓰고자 했었다.
하지만 이번 여행의 컨셉은 그저 즐기고, 누리다가, 쉬다 오는 컨셉이었다. 그래서 많은 시간을 다양하게 움직이기보다는 가만히 있는 시간과 공간을 누볐다. 심지어 '경험의 멸종'이라는 책을 들고 가서 리조트 수영장 선베드에 앉아 하염없이 멍 때리다가 책 보다가 갑자기 수영했다가 잠에 들기를 반복했다.
이 책에서는 내가 휴가지에서 느낀 것처럼 "비어있는 시간"과, "매개되지 않은 경험"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었다. 이미 내가 푸켓에서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여행 후기는 패스 한다.
그저 그동안 다녀오고 기록을 남겼던 여행들과는 콘셉트가 달랐을 뿐이다.
이직하고 나니 환경적으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
우선 차로 출퇴근 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자가용으로 통학/출퇴근을 해본 적이 없다. 누군가에게는 불편한 대중교통이었을지 몰라도, 정시성과 예측가능성을 높게 사는 나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이동수단은 없었다. 게다가 일을 시작한 이후부터는 법인카드로 택시를 타도 되는 상황이 많았다. 그래서 내 머릿속에 서울에서 차 타고 다니기-는 hell 그 자체였다.
하지만 대중교통으로는 매우 멀고, '교통체증이 없는 경우' 매우 금방 갈 수 있는 곳에 위치한 회사를 가게 되었으니 어쩌겠는가. 차로 출퇴근하는 수밖에.
나는 아침형 인간-이 유행하기 전부터도 아침형 인간이었다. 그래서 아침 시간을 잘- 활용하고 싶었는데 마침 잘됐다. 아침 일찍 씻지도 않고 출발해서 차도 막히지 않고 & 출근시간 전까지 비는 시간을 Daily 헬스를 할 수 있다니... 이것이야 말로 완전 럭키비키 아닌가?
게다가 퇴근길에는 서울을 가로질러 와야 하는 꽉 막힌 도로를 지나야 하지만, 그 와중에도 럭키비키가 숨어있다. 후술하겠으나 업무를 찾아서 해야 하다 보니 하루 종일 정신이 없다. '일단 지금은 쉬는 시간~'이라고 하기에는 한도 끝도 없게 된다. 그래서 하루 종일 증시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었는지, 주요 이슈 및 뉴스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누가 좀 읊어줘야 하는 상황이다.
유튜브에는 이런 나의 니즈를 충족시켜 주는 채널이 참 많이 있다. 한경 코리아마켓도 있고 다양한 주식 유투버들도 거시경제에 대해서 각자의 의견을 말해준다. 지하철 출퇴근이었으면 낮은 인내심으로 숏츠만 보았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렇게 진득하게 토론하고 정보를 주고받는다는 게 참 즐거운 일이다.
게다가 하루에 다양한 분야의 사람을 만나다 보니 내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기도 하다. 앞으로의 내가 취해야 할 방향성이라던지, 내가 진심으로 궁금했던 건 뭐였는지 등등- 말이다. (상술했던 '경험의 종말'에서는 비어있는 시간이 창의적인 행동을 만든다고 분석했다.)
그런 의미에서 출근도 퇴근도 비교적 럭키비키인게 맞는 것 같다.
업무적으로도 많은 것이 바뀌었다.
이직의 결심을 하게 된 것이, 일종의 매너리즘이었다고 치자. 그런 의미에서는 지금 너무 새로운 파도 속에서 허우적 대며 겨우 곧게 서있을 뿐인 것 같다. 첫날이었던 월요일부터 하루가 정말 가득 차버렸다.
월요일에는 9시 20분에 주간회의를 진행하고, 10시에 예비 투심위 진행에 참석하고 나니 11시 15분에 점심을 먹으러 갈 시간이었다. 점심 먹고 오자마자 새로 지급받은 노트북을 세팅하는데 잘 안 되는 것들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대표님들과 면담도 하고 아이스브레이킹도 하다 보니 벌써 퇴근시간..
화요일과 수요일에는 회사 공유 네트워크에 접속하여 과거 회사의 업무들을 쭉 둘러보았다. 회사가 어떤 스타일로 일을 하는지, 나는 어떤 역할을 하면 될지, 내부 프로세스는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는지 등등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시간을 쏟아 만든 결과물들을 보는 것인지라, 나도 참 많은 시간이 걸렸다.
목요일에는 총 세 건의 미팅, 네 곳의 회사를 만났다. 펀딩을 받아야 하는 벤처기업들을 만나며 각자가 치열하게 살아가는 삶의 순간을 목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직은 정량적인 재무수치로 결과물을 내놓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렇지 않기에 투자를 하는 것이 VC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각기 다른 업종의 회사들을 만나고 나니 내가 관심을 가져야 할 업종이 그만큼 늘어나게 된 것이다. 부담스러우면서 흥미롭고, 내 기준에서는 도파민 도는 시간들이었다.
금요일에는 이제야 나온 새 명함을 가지고 이곳저곳 연락을 돌렸다. 1주차 이지만 나도 '적응'이라는 방패를 가지고 시간을 더 끌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금요일 즈음이 되니 회사는 어떤 컨셉으로 움직이는지, 나는 어떤 역할을 하면 되는지- 를 대충은 알게 되었다. 정리하건대, 모두 내가 스스로 셋팅하고 진행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판단이 된다. 누가 끌어주면 좋겠지만, 이젠 내가 스스로 걸어 나가기에 너무 이른 시기도 아니지 않은가? 딱 좋은 타이밍에 딱 좋은 역할을 진행하는 것이라고 나를 다독여본다.
이직 1주차는 이렇게 정신없고도 새로웠다. 아직은 파도에 흔들리고 있지만, 곧 내 호흡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그리고 "28일 후, 28주 후, 28년 후" 시리즈처럼, 이직로그 1 month, 1 year에 다시 돌아오도록 하겠다. 그때 나는 또 어떤 풍경에서 걷고 있을까-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