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조리 어디로 봐도 인프제
처음 엠비티아이를 접한 건 중학생 때였다.
한창 수련회 중에 한 강사님께서 엠비티아이라는 검사에 대해 이야기해주시면서, 직후에 바로 테스트를 해볼 것이라고 하셨다. 정확한 결과는 기억이 안 나지만 첫 시작이 'E'였던 것만은 확실하다.
엠비티아이 검사에서 E란, 쉽게 말해서 외향형 성향을 의미한다. 첫 검사에서 E가 나왔을 때 생각했다.
"역시, 나는 완전 외향형 인간이야."
당시 그건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나도 나 자신을 외향형이라고 자부하고 살았기 때문이다. 밖보다 집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집돌이 오빠와는 다르게 나는 친구들과 만나는 것을 좋아했고, 집에 오래 있는 날에는 답답해서 어떻게든 탈출하고 싶었다. 또한 항상 밖에서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도전하고자 하는 열정이 차고 넘쳤다.
그렇게 고등학생 1학년이 되어 검사를 했을 때도 ENFP가 나왔다. 엔프피는 '재기 발랄한 활동가'라고 한다.
'종종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하기도 하는 이들은 타인과 사회적, 정서적으로 깊은 유대 관계를 맺음으로써 행복을 느낍니다. 독립적인 성격으로 활발하면서도 인정이 많은 이들은 어느 모임을 가든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습니다. '
맞지, 맞지. 사람 좋아하고 이런저런 그룹에 어울려서 활동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나한테는 딱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의 엔비티아이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INFJ, '선의의 옹호자'유형이 조금 뜬금없이 내 엠비티아이 결과로 나왔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웠다. 어떻게 사람 성격이 몇 년 만에 이렇게 변할 수 있나, 결과가 잘못 나온 것은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심지어 내가 E가 아니라, I라니. 그러나 인프제라는 결과를 받고 생활하면서 깨달았다.
나는 외향형 성격이 아니라, 외향형 성격을 가지고 싶었던 내향형 인간이었다.
나는 사실 사람들을 만나면서 에너지를 얻기보다, 사람을 만나고 나서 빠진 에너지를 혼자만의 시간으로 꼭 충전해줘야 한다. 그렇게 충전을 해주지 않으면 혼자 기라는 기는 다 빨려서 어느 순간 저 구석에서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히 무리를 바라만 보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말하는 것도 물론 좋아하긴 하지만 글 쓰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전에는 내가 이렇게 글 쓰는 것을 좋아하는지 몰랐다. 그러나 한번 글 쓰는 데에 재미를 보고 나니 이 방법이 내 생각을 표현하는 데에 알맞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잡다한 생각이 많은 편이라서, 한 번에 모든 것을 쏟아내는 것보다 한 덩어리로 잘 정리해서 내놓는 것이 내가 보기에도 더 깔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전화와 문자 중에 고르라고 하면 단번에 전화를 고를 것이다.)
가끔은 혼자만의 세상에 푹 빠져든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혼자 산책하면서 한 주제에 대해서 깊게 파고든다. 이유는 딱히 없다. 그래도 요즘에는 글을 쓰기 위해서라도 더 다양하게 생각을 하려고 하는 것 같다.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했던 것이 글이나 그림으로 의도한 대로 잘 표현되었을 때에는 그만큼 뿌듯한 게 없다. 최근에는 코로나 때문에 의도치 않게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나서 이런 시간들을 즐기다가도, 친구들과 시시콜콜 수다 떨었던 시간이 그리워진다.
또 생각보다 계획적인 것을 추구하는 편이다. 안 그래도 저번 학기에 교수님으로부터 '너 완벽주의자 구나?'라는 말을 들었다. 태어나서 처음 듣는 이야기에 깜짝 놀라서 손사래를 쳤던 기억이 난다. 집에서는 막내로 헐랭 헐랭한 내가 그런 소리를 듣다니. 당황했지만 생각해보니 완벽주의자까지는 아니더라도 원칙주의자에 가까운 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를 갈 때도 즉흥적인 것은 조금 힘들다. 최소한 가기 전날 대략적인 장소를 생각해 둬야지 마음이 편안하다. 숙제 리스트를 만들어서 한 과제가 끝날 때마다 체크하는 쾌감에 숙제하는 나를 보면 뭐, 말 다 했다.
인간관계가 그리 넓은 편은 아니다. 나는 내가 새로운 것을 찾아 하는 걸 좋아해서 당연히 새로운 사람에도 잘 적응하는 줄 알았다. 그렇지 않았다. 새로운 걸 좋아해도 새로운 사람에는 낮을 꽤나 가린다. 아닌 척, 그렇지 않은 척 해도 내 속에서는 이미 식은땀이 한 바가지이다. 그래도 상대방이 먼저 한번 마음의 문을 '똑똑' 두드려주면 금방 활짝 열린다. 친구 관계도 발 넓게 두루두루 사귀는 것보다 소수의 친구들과 깊은 관계를 가지길 원한다. 여러 명에서 다 같이 모이는 것도 물론 좋지만, 한 두 친구와 만나 서로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좋은 것 같다.
이성보단 감성에 가깝다. 책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에서 설명하는 ‘여자’의 살아있는 표본이라고 볼 수 있겠다. 책에선 상대방에게 어떤 문제가 있을 때 남자는 그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고, 여자는 문제를 겪는 상대방의 힘든 감정을 공감하려 노력한다고 말한다. 나는 완벽한 후자이다. 어떤 일이든 무의식적으로도 감정이 우선이 된다. 내가 어려움을 겪으면서 지인에게 상담을 할 때도 그들에게 해결방안보단 위로와 공감 얻길 바란다.
이렇게 하나하나 곱씹어 보니, 나는 앞뒤 좌우 위아래 어디로 봐도 INFJ였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어떻게 ENTP가 나왔었는지 의문스러울 정도이다. 전에는 나가 내 자신에 대해서 가장 잘 몰랐던 것 같다.
며칠 전에 갑자기 엠비티아이가 생각나서 또 해보았는데, 똑같이 INFJ가 나와서 너무 신기했다.
그래도 전처럼 언제든 엠비티아이는 또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가 진짜 내 성격이 변해서 그렇든, 나도 모르던 나를 찾아서 그렇든, 이제는 새로운 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