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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bo Apr 09. 2022

마음에 글이 담긴 날

채식주의자, 어떻게 쓰지 않을 수 있겠어요. 


채식주의자를 이제야 읽고 있다. 원작을 먼저 읽어야할지, 그 유명하다는 번역본을 먼저 읽어야할지 어영부영하다 몇 년이 그냥 지났다. 


근사한 서평들이 많으니 굳이 보탤 것은 없다. 나의 짤막한 생각으로는 어차피 상징과 상상과 은유로 넘쳐나는 이 이야기를 해석하기도 버겁다. 그런데 한강 작가의 언어가 턱턱 발에 채인다. 돌부리 마냥 걸려 자빠진 채 한참을 맴맴 돈다.


'염오감'. 세 번을 찾아봤는데, 외우지 못하고 방금도 다시 찾아봤다.


  : 마음으로부터 싫어하고 미워하는 감정. 


구글에 검색해보니 나처럼 채식주의자를 읽다가 이 단어를 배운 사람들이 좀 있는 것 같다. 중앙일보 권석천 논설위원은 이 단어를 가지고 칼럼도 썼다. 자기가 모르는 단어가 나와서 어지간히 신기했던 모양이다. 낯설었지만 읽다보니 염오감 외에는 다른 단어는 도저히 찾아지지 않았다. 대체불가의 감정. 


이런 표현도 있다. '나는 혼자 어두운 부엌에 남아 그녀의 흰 뒷모습을 삼킨 방문을 바라보았다.' 기가 막히게 좋아서 글자들을 한참 보았다.  이 한 문장으로 빛과 느낌과 공기와 길게 드리운 감정을 다 빚어냈다. 


이런 언어를 쓰는 한강 작가가 채식주의자 책의 가운데 작품인 몽고반점의 시작을 온갖 '것'들에 사로잡힌 문장으로 채웠다. 오늘 나는 연가를 냈고, 잉여력이 넘치니 찾아봤다. 


쓸모없는 것을 시작으로 더 고요한 것, 더 은밀한 것, 더 매혹적이며 깊은 것, 환멸을 맛보았다는 것, 깨달았다는 것, 꿈꾸는 것, 그것, 자신이라는 것, 있다는 것, 저장한 것, 보였을 것, 끝나리라는 것, 시작하는 것, 그것, 현실적인 것, 괴물과도 같은 것, 이것, 대단찮은 것, 모든 것, 많은 것, 터져나올 것, 그리고 흘린 것...을 마지막으로 거짓말처럼 눈에 채지 않는다.  


교정 교열을 20년 넘게 한 김정선 작가는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에서 이런 문장에 대해 교열자들이  '적.의를 보이는 것.들'이라고 부르며 적개심(!)을 표현한다고 썼다. 접미사 '-적'과 조사 '-의' 의존명사 '것' 접미사 '-들'이 문장안에 자주 등장하면 잡초나 자갈처럼 뽑아내고 골라내어야 깔끔하고 분명한 문장이 된다는 의미다. 군더더기적인 것들의 소음...이라고나 할까. 혹은 교열자들을 괴롭히는 것.들.


한강 작가는 저 많은 것들을 다 명징한 다른 표현으로 쓸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투명한 '것'들로 채웠다. 몽고 반점은 (읽고 있는 중이라 결말을 모른다) 아직까지는 처제에 대해 기이한 성적 환상을 가지게된 형부의 이야기...라고 쓰니 정말 천박한 느낌이지만..어쨌든 그렇다. 이해할 수 없는 욕망과 이미지에 사로잡힌 주인공의 머릿속 생각을 '그런 것'들로 채움으로써 나 역시 이름 붙일 수 없는 생각의 미로에 갇힌 느낌이다. 


그리고 맞닥뜨린 '그를 충격한 것'. 그리고 '힘이 있는 덧없음'..



이 표현을 쓰기 위해 그렇게 읽는 이를 짙은 안개 같은 문장 사이에서 헤매게 했나보다. 거친 번역투의 표현과 형용모순이 웅장한 불협화음이 되어 꽝. 울린다. 눈앞에서 순식간에 안개가 걷히고 내가 선 곳이 끝없는 지평선을 내려다보는 벼랑 끝임이 드러난 느낌이다. 아찔하다. 이런 문장을 쓸 수 있는 자신감..아니 이건 확신이다. 수 없이 다시 생각해도 이렇게 밖에 쓸 수 없는. 


어제 밤, 망설였던 넋두리를 쏟아 놓고도 마음에 수많은 말들이 차오르고 엉켰다. 그리고 다시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쓰고 있는 나조차도 믿기지 않지만, 이 말도 안되게 구불구불한 글은 사실 그래서 이윤주 작가님의 어떻게 쓰지 않을 수 있겠어요 에 대한 연가다. 그녀(라는 단어에는 모종의 편견과 아름다움이 동시에 담겨 있어 잘 쓰지 않지만, 이 경우에는 아름다움에 방점을 찍어서)는 글쓰는 법이 아닌, 글쓰는 사람의 삶을 써주셨다. 어제 글은 작가님의 응원에 크게 빚졌다. 응원하려고 쓰신 글이 아닐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우렁찬 속삭임이었다. 


 이를테면 밥벌이의 현장에서 부당한 시스템에 부딪혔을 때, 그리고 그것에 이의를 제기할 능력이 없을 때, 그래서 그 무능이 모멸로 돌아왔을 때, 나는 '이따 집에 가서 글을 쓰면 돼'라고 생각했다. 이미 세계에 공고하지만 납득하기는 어려운 권위들이 내게 순종을 요구할 때, 그를 따르지 않으면 내가 감내해야 할 고통이 더 많아질 때, 넙죽 고통을 받아 들지 못하는 비겁함이 또다시 모멸로 돌아왔을 때도 '이따 집에 가서 글을 쓰면 돼'라고 생각했다. 글을 쓴다고 실제로 뭐가 달라지는 건 물론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겪은 일을 언어로 재현할 수 있다는 믿음은 희한하게도 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것이 구체적인 세계에 어떤 영향력을 미치지 못해도, '쓸 수 있다'는 사실 자체는 내게 구체적인 힘이 되었다. 내 힘을 내가 안다는 것이 중요했다. 나는 이따 집에 가서 글을 쓰면 되니까.


마음에 글을 담지도, 써내지도 못한 시간이 꽤 길었다. 그리고 가을의 어느 날 그 빗장이 풀린 것을 깨달았다. '오래 억눌러온 고함 같은 것이 기침처럼 터져나'온 느낌이다. 온갖 언어가 빛처럼, 독처럼, 칼처럼 엉킨 혼돈의 악다구니에서 한 줄씩 빼내어 타래를 짓는다. 


그럼에도 불안했다. 내가 토해놓은 글이 냄새나고 어두침침할까봐. 내가 아닌 다른 어떤 것일까봐. 나 아닌 다른 누군가인 척 할까봐. 작가님은 내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록산 게이의 헝거를 예로 들어 작가와 글의 거리를 설명한다. '고통에 잡아먹히지 않고 고통을 바라보는 상태'에 이르러 자신의 목소리를 정확하게 들려주는 것이 얼마나 용감한 일인지, 그로 인해 작가도 읽는 이도 더 이상 울지 않을 힘이 나는지. 헝거를 읽던 날 어스름한 빛이 다 사라진 방에서 꼼짝도 못하고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까지 옹숭그린 채 있게 했던 힘이 바로 그 의미였음을 이해했다. 


자신도 '마음을 붙잡기 위해' 쓴다고 했다. 그리고 글쓰기란, 예술이란 '모든 사건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일, 삶을 쪼개고 쪼개고 또 쪼개도 그것이 도무지 단순해지지 않음을 아는 일'이라고 함으로써 글쓰기는 어떤 일의 총체와 본질을 포착하는 것이라고 기울던 내 생각에 반딧불이가 돼 주었다. 글쓰기라는 것이 원래가 흘러가는 물마냥 움직이는 생각을 붙잡는 것이고, 그 생각이라는 것은, 삶이라는 것은 촘촘히 뒤집고 썰어도 복잡하다는..불가능하다는 위안. 그리고 그렇게 저미고 다진 언어로 나를 내어보이는 일은 용기가 필요하지만, 같은 언어로 느끼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온기를 줄 수 있다는 희망. 잘 빚은 언어가 내뿜는 아름답고 단단한 힘. 


그래서 때때로 쓰려고 한다. 여전히 부끄럽지만.


어처구니 없이 설사 같고 물똥 같은 책감상은...광고로 끝내야겠다. 괴나리 봇짐을 싸들고 방방곡곡 다니며 책을 팔아드리기로 한 약속(물론 내 마음 속 생각이다)이 묵은 똥이 되게 할 수 없으니까. 


이 긴 글을 혹시라도 다 보신 분들은 이윤주 작가님 책 '어떻게 쓰지 않을 수 있겠어요.' 꼭 읽어보시죠. 저의 재주가 일천하여 책감상은 뭣같이 썼지만, 작가님 책은 사실 겁나 웃깁니다. 글 읽다가 현웃이 벼락같이 터져나오는 귀한 체험하실 수 있습니다. 


10쇄 기원

(2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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