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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림 자객 May 14. 2023

부끄럽지만 숨을 곳이 없다

ㅡ 장세현 시집


<시집 출간 소식 전해요^^>


대학 4년 무렵, 이른 나이에 멋모르고 첫시집을 냈다. 서슬 푸른 군사독재 정권이 민주화 열기에 밀려 막바지 발악을 하던 시절이었다. 현실 비판과 저항의식을 담은 시를 설익은 목소리로 내뱉었지만 등단도 하지 않은 새파란 대학생의 시를 시집으로 묶어주었다. 당시 이름값이 꽤 높은 한길사의 시선에는 고은, 김남주 같은 당대 쟁쟁한 민족시인이 들어 있었던 걸 생각하면 매우 이례적이다. 아마도 부조리한 현실을 대하는 젊은 패기와 열정, 예민한 감수성을 높이 샀던 것 같다.


 졸업 뒤에는 생활인이 되어 사회에 편입해 들어갔다. 삶의 오선지 위에서 추는 춤은 늘 아슬아슬했다. 한 발 잘못 디디면 낭떠러지였다. 시보다 중한 게 밥이고 목숨이었다. 시 같은 건 나중의 일이 되고 말았다.


  첫시집 이후 30 여년 만에 두번째 시집을 엮게 되었다. 시는 아득히 먼 안개 속의 섬 같았다. 그 섬에 가고 싶었지만 배도 없고 노도 없었다. 젊은 시절, 맨몸으로라도 헤엄쳐 가고자 몸부림쳤으나 힘에 부쳤다. 가뭄에 콩나듯 간간이 썼던 시가 세월의 더께로 쌓이다 보니, 시집을 엮을 만큼 되었다. 두번째지만 마치 첫 시집처럼 설레인다.


  삶의 오선지는 여전히 위태롭지만 그 동안 중심을 잡아줄 잔근육은 늘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농사로 치면 30여년 만에 수확을 거두는 셈인데 알곡이 별로 없다. 시라는 형식을 띠고 있지만 부끄러운 삶의 고백인 셈이다. 시집 제목을 <부끄럽지만 숨을 곳이 없다>라고 지은 까닭이다. 몸은 나이가 들어도 마음은 쉬이 늙지 않는다. 그 섬을 향해 풍덩 몸을 던져야겠다.


(* 이 어쭙잖은 시집의 발문을 써준 친구한테 욕을 바가지로 먹어가며 두번이나 퇴고 작업을 거쳐 겨우 조금 덜 부끄러운 수준으로 내게 되었다. 얼마나 못 썼는지 궁금하신 분들은 한번 펼쳐보고 마음껏 비웃어줘도 좋다^^)



* 시집 속 시 한 편


  [나를 그린 나]


부끄럼이 많았다 암사내라 불렀다 어스름을 등짐처럼 지고 오는 엄마 품속으로 숨곤 했다


가족의 굴레는 천형이거나 어느 전생의 벌인지도 모른다 죄를 사해 줄 엄마 같은 여자를 만나고 싶었다 그런 여자는 엄마밖에 없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으나 회개하지 않았다


나를 상실한 나는 숨 쉬면서 죽었다 숙명을 거스른 탈출은 또 다른 섬으로의 고립이었다 억울해, 억울해, 목구멍에 걸려 넘어진 말은 무릎이 깨져 울었다


먼저 살아야 했다 독을 품은 짐승마냥 침을 꼿꼿이 세웠으나 세상 앞에 서면 마냥 부끄러웠다 간혹 제 살을 물어뜯은 상처의 피로 낭자했다 부끄럽지만 숨을 곳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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