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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림 자객 Apr 27. 2024

아름다운 이름을 새기다

성남 서현도서관, 가장 한가할 것 같은 때를 골라 강연 일자를 잡았다. 불길한 예감은 틀린 법이 없다. 되려 가장 바쁜 때가 되었다. 그림 작업 마감해야지, 자료 준비 해야지, 조카 결혼 축시 써야지, 정신이 하나도 없다. 여기에 혹이 하나 더 붙었다.

ㅡ 강사님, 은지화 그리시잖아요. 제가 페북에서 보니까 너무 좋더라구요. 강연 오실 때 좀 가져와서 수강생들에게 전시하면 안 되나요?

담당자에게 이런 전화를 받고 잠시 망설였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데 수고스럽지만 마다할 수가 없다. 내친 김에 수강생들의 방명록 작품이나 만들자 싶어 화판까지 준비했다. 반응이 꽤 좋다. 작품을 접하고 호들갑이다 싶게 감탄을 내뱉기도 한다. 강연 중간쯤 쉬는 시간에 글이든 그림이든 자유롭게 화판을 채워달라고 했더니 누군가 '조옥희'라고 화면이 가득찰 만큼 크게 적었다. 맨 첫사람이 이렇게 공간을 많이 차지하면 뒷사람의 원성을 듣기 쉽상이다. 조금 우습기도 하고 도대체 어떤 재미난 캐릭터의 엉뚱한 여성일까 궁금하여 조옥희가 누구인지 물었다. 뜻밖에도 맨 앞쪽에 앉은 중년의 남성이 손을 든다.

ㅡ 아, 성함은 여성적인데 엄청 대담하게 일당백으로 적으셨네요 ㅎㅎ

제가 아니고 어머님 성함이에요.

ㅡ 네? 어머니를 왜?

ㅡ 이거 작품 만들면 전시할 거라고 하셨잖아요. 해외 전시도 할지 모른다고ᆢ.

ㅡ 네, 그렇긴 한데?

ㅡ 지금 병원에 계시거든요. 아프시기 전에는 제가 여기저기 모시고 다녔는데 지금은 그러기 어려워요. 몸은 병원에 있지만 이름만이라도 바깥 나들이를 하시라구요. 해외 전시도 꼭 했으면 좋겠어요!

ㅡ 아ᆢ! 본인 이름은 왜 안 적으셨는지?

ㅡ 적었어요. 귀퉁이에 제 아들 이름과 함께 안 보이게, 아주 작게요.

집에 와서 화판을 살피니 큼지막하던 이름의 윤곽이 다소 흐트러졌다. 뒷사람들이 조금 심술이 났는지 이름 글자를 활용해 자기 그림을 덧붙인 까닭이다. 이름 글자가 돋보이도록 손질을 잘 해야겠다. 우리 어머니도 노환에 치매로 집안에 들어앉은 지가 5년인데 나는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어느 작품이든 나도 큼지막한 글씨로 전복심이라 적어 넣어야겠다. 삼인행 필유아사란 말처럼 도처에 나를 가르치는 스승이 많다. 그저 기념작품으로 그리려했지만 안되겠다. 마음이 가상하니 혼을 갈아넣고 정성을 다해야겠다. 해외 전시가 성사된다면 꼭 가져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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