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직장은 왜 마지막 직장이 되기 어렵나??
내 첫 직장은 내 또래에 많은 사람이 한 번쯤 들어본 광고로 유명했다.
‘아버님댁에 보일러 놔 드려야겠어요!’라는 광고 문구로 유명한 보일러 회사의 계열사였다.
건축용 난연재, 산업용 보온재, 충전재가 주요 생산 품목인 건축자재 회사였다.
회사이름은 지금은 안 쓰고 있지만 구약성경 판관기에 나오는 ‘Samson’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었다.
취업 준비하던 중 취업사이트에 그 이름이 올라와 있었고, 나는 호기심에 그 기업 로고를 눌러서 지원하였다.
창업주가 손 씨이고 아들이 세명이라서 삼손이라고 지었다는 말에 좀 실망하였지만, 회장님의 세 아들에 대한 사랑이 느껴져서 그 회사 이름이 오히려 더 친근해졌다. 하지만 친근했던 그 이름은 회사가 통합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처음 입사지원할 때 아산/경주에 공장이 위치한 회사에 나는 아산으로 지원했다.
집(울산)에서 가까운 경주공장은 TO 가 없어서 이다.
아산공장에 입사하고 정신없이 신입사원 교육받는 이튿날이었다.
갑자기 인사부장이 날 찾았는데 의미 있는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황주임 집이 울산인데 혹시 경주공장으로 갈 생각 있나요? “
‘와우 무슨 일이지?’ 나는 얼떨떨했지만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아산으로 올라오면서 마치 군대에 다시 입소하는 기분이 들었다. 회사에서 제공하는 숙소는 회사에서 약간 떨어진 곳 아주 한적한 시골 아파트였다.
같이 생활하는 사람들 인상이 다들 좋아 보였지만, 낯설고 어색함은 어쩔 수 없었다.
경주공장에 가더라도 회사 숙소 생활은 해야 한다. 하지만 집 근처로 가는 게 얼마나 든든한지 타지생활 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나는 조금 고민하는 척하다가 대답했다. “네, 있습니다.”
“마침 경주공장에도 같은 직무에 사람이 필요해서 경주로 갈 수 있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하, 너무 좋아하네, 정말 운 좋은 친구네 “
그렇게 나는 경주공장으로 오게 되었다.
아산보다는 본가와 가까이 있었지만, 그래도 어린 나에게 타지생활은 힘겨울 때마다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2002년 졸업 후에 나의 첫 직장 생활에서 가장 기억이 남은일은 역시나 ‘2002년 월드컵’이었다.
2002년 월드컵을 경험한 사람들은 아마 그 기억을 평생 가져갈 것 같다. 나는 다시는 오기 힘든 짜릿한 경험을 여러 장소에서 만끽했다. 그때 한국 경기를 회사 숙소, 출장 간 모텔, 그리고 주말에는 울산 문수축구경기장 등에서 응원했다.
아직도 그때 선수들에 영상을 보면서 감격할 때가 있다.
이렇게 회사 숙소와 출장 등을 오가며 월드컵에 열기를 남들보다는 좀 적게 느끼게 된 난 향수병이 돋게 되었다.
서울 출장 갔다가 울산공항으로 내려오는 비행기는 울산공항에 착륙하기 전에 울산 석유화학공단 상공을 한 바퀴 돌면서 착륙하게 된다. 그때 난 창밖을 바라보며 이렇게 생각했다. ‘이렇게 공장이 많은데 왜 내가 일할 수 있는 회사는 없나?’라고…
이렇게 향수병이 돋은 나는 이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연애도 하고 싶고, 결혼도 하고 싶었던 나는 울산으로 와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자동차 부품회사 H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내가 그만둔다고 하니 첫 직장에서는 많이 아쉬워했다. 나는 그때 어렸지만 유종의 미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당장은 헤어지더라도 또 언젠가 다른 곳에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예상보다 늦게 입사해서 인수인계 시간이 부족했던 내 후임직원을 위해 주말에 경주까지 가서 업무인수인계를 해주었다. 그게 나의 첫 직장, 그리고 동료들에 대한 최대한 배려였다.
그렇게 자동차 1차 협력사 H사에 들어간 나는 2년간 다른 업종에 근무한 이력이라 경력을 인정받지는 못했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수습기간은 면제해 주었다.
대표이사 면접에서는 사장님과 약 40분 정도 면접을 봤는데, 사장님은 우리 회사는 글로벌 외국계회사이고, 자기는 GE(General Electric Company)에서 근무했으며, 잭웰치(전 GE CEO) 밑에서 일한 사람이라고 했다.
나는 면접을 마치고 집에 와서 잭웰치와 GE라는 회사를 찾아봤다.
H사 사장님은 물론 전문경영인이지만 정말 대단한 사람 밑에서 일한 사람이었다. 내가 생각했던 회사에 대한 이미지(일반적인 자동차 1차 부품사)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나는 잭웰치와 같이 일을 했던 사장님이 있는 자동차 1차 협력사 H사에 합격하여 일하기 시작했다. 나의 업무는 생산팀 생산관리 담당이었다.
나는 신입사원 때부터 일 쫌 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내가 결과물에 대한 정성을 좀 쏟는 편인데 회사에는 그것을 인정해 주었다. 엑셀뿐만 아니라, PPT 사용 보고서 작성은 내가 전담으로 맡아 작성했다.
또한 몇 년 동안 추진 안 되고 지지부진했던 활동, 3정 5S 운동, 설비 My Machine 활동을 입사한 지 6개월 만에 보고서 작성하여 진행시키는 추진간사가 되었다.
그렇게 추진간사가 되면서 팀장은 나에게 ”전체직원에게 설명회를 해야겠는데 황주임 할 수 있겠나요? “
“네… 뭐 한번 해보겠습니다.” 그렇게 자신 있던 건 아니지만, 못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식당에서 전 직원 앞에 발표하는 날이다.
발표자료를 50권 정도 제본하였고, 그 자료에 있는 내용 우리가 왜 3정 5S, My Machine 활동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앞으로 이 캠페인을 체크하고 점수를 매겨, 잘하는 팀에게 포상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두렵고 떨린다. 간혹 머리가 하얗게 될 때도 있다. 그래서 많이 연습해야 한다.
난 많이 연습했다. 반복 또 반복해서 했다.
드디어 발표하는 날, 나는 약 150명 앞에 섰다.
처음에 머리가 하얗게 될 만큼 긴장되었지만, 시작한 지 5분 정도 지나니까 좀 안정이 되면서 자신감 붙어졌다.
마지막장 발표를 할 때쯤은 많은 연습이 이렇게 자신감을 주는구나라는 생각으로 마무리하였다.
나의 발표는 대략 40분 정도 진행되었고, 공장장님이 마무리 발언 하였다.
엄청난 칭찬과 격려가 쏟아졌고 나는 생각보다 많은 격려에 몸 둘 바를 몰랐다.
그 일로 인하여 나는 능력 있는 사원, 신입사원 같지 않은 신입사원으로 입지를 굳히게 되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특진 이야기가 수시로 나왔으며, 입사 1년 만에 창립기념일 기념 모범사원상을 받게 되었다.
그때 타 부서에 한 과장님이 “야~ 황주임 난 맨날 고객사에서 뺑이치고 이렇게 10년이 넘어도 모범상 한번 못 받아봤는데.. 니는 1년 만에 무슨 빽이고?” 그분은 불만 가득한 표정이었지만, 나는 왠지 우쭐했다. 하지만, ’ 내가 이렇게 질투받고, 회사에서 포상받을 정도로 일을 잘했나??‘라고 지난 1년을 돌이켜 보았다.
’ 그래, 신입사원 치고는 일 좀 했나?‘라는 다소 건방진 결론을 내리고 상을 정당화했다.
그때 우리 팀장은 “황주임은 경력은 인정 못 받았지만, 모범상 받게 하고 내년에 만 2년 안되지만 특진(대리) 시킨다 내가.. “라는 말을 회식 때마다 이야기하였다. 난 처음에는 고맙고 기분이 좋았지만, 계속 들으니까 나중에는 의문도 생겼다.
’ 저러다가 안되면 어떡하지?‘
아무튼 우리 팀장은 내편이었다. 그래서 난 팀장말을 믿고, 회사생활을 만족하면서 내 역량을 쏟아부었다.
매일 늦게까지 야근하면서 남들보다 더 열심히 일했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에 변화가 생겼다.
모범상을 받고 한 해를 마무리할 때쯤 조직개편이 났다. 1월 1일 부로 우리 팀장이 바뀌었다. 암담했다.
나는 새로 오는 팀장도 최악으로 바뀐 것도 문제지만, 내년에 특진도 물 건너간 것인가? 생각도 들었다.
연말 회식자리(팀장 송별식)에서 가는 팀장은 ”황주임 걱정 마 내가 새로 오는 팀장한테 다 이야기해 놓을게, 황주임은 내년에 꼭 대리될 거야, 자. 자. 한잔해~~ 예비 황대리 파이팅!!
마치 내 속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마냥 팀장은 나를 안심시켰다.
드디어, 승진 발표가 있던 날.
승진자 명단에는 내 이름이 없었다.
그날 오후 새로 온 팀장은 날 불러서 면담을 했다.
“특진이 힘들지만 나는 황주임이 무조건 대리되는 줄 알았어요”
“나도 마음이 되게 안 좋네. 하반기 창립기념일에 승진하는 경우도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 봅시다.”
나중에 알게 된 거지만, 승진하려면 추천서를 팀장이 상신해야 하는데, 팀장은 추천서 결재 올리지도 않고서 그때 그렇게 말을 한 것이다.
그때부터 난 회사에 정이 급속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특히, 팀원들을 자기 직장생활에 소모품 정도로 생각하면서 , 허구한 날 불러대며 업무지시하는 팀장이 너무 보기 싫었다.
이렇게 두 번째 직장도 떠날 준비가 서서히 되고 있었다.
나는 내 첫 직장 직원들하고는 가끔 연락을 하였다.
그중 나하고 친했던 과장님과 가끔 통화했는데, 전화 마무리 끝인사는 항상 지금 회사가 맘에 안 들면 언제나 우리 회사로 다시 돌아오라고 했다.
자기가 책임지고 위에 이야기하겠다고 했다.
듣기는 좋았지만, 그냥 인사치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날은 첫 직장 팀장이 전화가 왔다.
내 후임으로 들어온 친구가 나가게 되었다고 다시 오라고 한다.
연락하고 지냈던 과장님이 제안을 한 것이다.
조건은 경력 100% 인정, 3개월 후 대리 승진 보장.
첫 직장에서 재입사로 제시한 조건은 나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안 그래도 지금 다니고 있던 직장에 정이 떨어지고 있었는데.
고민되었다.
와이프 하고 먼저 상의하였다.
와이프는 내가 전 직장에서 좋은 조건으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며 좋아했다.
신혼인데 주말부부 해야 되는 게 제일 큰 문제였다.
쉽게 결정하기 어려웠다.
우리의 결정에 있어 중요한 부분은 회사의 미래, 연봉, 직장동료, 거리 등 회사의 비전과 근무 조건이었다.
그리고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에 직속상관에 대한 실망이 추가되었다.
와이프와 나는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재입사이고 스카우트 제의를 받은 거라도 절차상 본사(여의도)에서 다시 임원 면접(면담)을 봐야 했다.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면접을 보고 최종 결과를 기다렸다. 그때가 12월 중순쯤이었다.
1월 2일부로 입사하라는 통보를 받고 나는 업무를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사직서는 면접 보기 며칠 전에 미리 제출한 상태였다. 그래도 막상 떠난다고 하니 동료들이 너무 잘해 주었다.
특히 현장분들이 송별식에 선물까지 준비해 주셔서 떠나기가 미안하기까지 했다.
경험은 있었지만 이직은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사람 관계에 대한 변화가 가장 어려운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친분이 있었던 직원들과 이별,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과 관계 시작.
직장생활도 사람과의 관계가 가장 어려운 문제이다.
승진에 누락되어도 직속상관이 그 이유에 대하여 설명을 한다면, 우리가 좀 실망을 덜 할 것이고, 이직을 생각하지 않게 될 수도 있다.
직장생활에 인간관계는 우리가 이직을 결심하고 실천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본다.
주변에 동료가 승진에 누락되었다면, 따뜻한 위로에 말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맛있는 밥이나 술 한잔 사주면서 그 사람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러면 아마도 그 사람의 실망은 좀 줄어들 것이며, 이별준비는 좀 미뤄질 수도 있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직장생활에서 목표는 자리가 아니라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목표로 삼으라고 했다.
자리가 목표가 되면 자리에 가게 되면(목표를 이루면) 그 이후에는 목표가 사라져서 그 자리를 지키려고만 한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목표로 삼을 필요가 있다.
참고로 나의 직장생활 목표는
전사원이 자부심을 갖고 다닐 수 있는 회사,
연봉이 상위권인 회사, 복리후생이 좋은 회사,
이직률이 낮은 회사, 마지막으로 아침에 웃으면서 즐겁게 출근할 수 있는 회사를 만드는 것이다.
저의 목표가 너무 거창한가요??
-주니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