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5화 <첫 말다툼과 끝없는 해명>

다시 쓰는 결혼 일기 - 1월 15일 자

by 재섭이네수산

불편한 속이 진정되기를 기다리느라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드문 드문 내가 술에 취해 부렸던 난동들이 조금씩 파편처럼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내가 징징대며 말했다.

"아니 나한테 말도 없이 어디를 간다는 거야~"

인규 선배가 "응 집에 가자, 집에." 나를 달랬다.

지형 씨가 화장실에 있는 나를 붙잡고 나온다. 내가 또 토를 했나보다.


내가 기억해 낸다고 해서 있었던 일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나는 더 떠올리는 일 대신 얼른 해장을 해야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편안한 속이 되어야 전날 나의 수치스러운 일들도 더 대담하게 받아넘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람은 자고로 속이 든든해야 한다!

"라면 끓여먹을까?"

여전히 심통이 나 있는 현수에게 물었다. 현수는 말없이 냄비를 꺼내왔고 나는 라면을 꺼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냄비에 물을 넣고 라면을 넣고 끓는 사이에, 식탁에 숟가락을 놓고 물컵을 놓고 그릇을 놓았다. 라면이 다 끓자 둘은 처음으로 집 안의 식탁에 마주앉아 라면을 먹었다. 그런데 나는 이 역사적인 순간이 즐거운 것이 아니라 좀 숨이 막혔다.

"음~ 잘 끓였지?"

분위기를 바꿔보려 나는 가볍게 말을 던졌으나 현수는 여전히 무거웠다.

"라면도 못 끓이면 그건 진짜 구제불능 아닌가?"

현수의 말에 가시가 돋혔다.

"무슨 말이 그래?"

"내 말이 왜?"

"구제불능?"

"라면 못 끓이면 구제불능이라고. 누나는 잘 끓였잖아요."

"뭐가 기분 나쁜데?"

"그런 거 없는데."

"그런데 왜 그래?"

"없다고 하면 없는 줄 알면 되지 왜 따져요?"

현수가 젓가락을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야~"

"야? 야라고 했어?"

"어 야. 기분 나쁘잖아 너."

"기분 나빠요. 너무 기분 나빠."

"그러니까 뭐가 기분이 나쁘냐고."

"외박. 꼭 내가 말로 해야 아나?"

"네가 내 남편이라도 돼? 내가 외박을 하던 가출을 하던 내가 니 허락을 맡아야 돼?"

"기다렸잖아요. 내가. 하루종일 누나를."

"말했잖아. 술에 취해 인규 선배 병실에 있었다고."

"근데 왜 하필 인규 선배 병실에서 외박을 해요?"

사실 현수는 옛 내 짝사랑의 상대가 인규선배였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기다리게 한 건 미안해. 그런데."

그렇다고 하나 나는 이 옥죄어 오는 답답한 상황을 더이상 이어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필요 이상으로 날이 선 채로 화를 내는 현수에게 어떤 해명도 하고 싶지 않아졌다.

"그만 하자."

현수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나가버렸다. 말릴 새도 없이. 순간 나는 마음이 답답해왔다.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 나간지 얼마 되지 않아 현수 다시 돌아와 나를 와락 껴안았다.

"누나, 미안해요. 내가 다 잘못했어요."

나는 조금 망설였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먼저 해명하지도 않고 그 마음을 온전히 품어주지 못해 일어난 다툼인 것만 같았다. 나도 현수를 안아주었다.


이 날 첫 말다툼으로 나는 많은 것들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현수는 내가 첫사랑이 아니었다. 대학 때도 나를 늘 마음에 품고 있었다고는 하나 많은 여자들을 만났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들을 묻지 않았고 묻어 주었다. 현수는 이미 예전에 내가 인규 선배를 짝사랑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현수의 의심은 점점 더해져만 갔고, 나는 밑도 끝도 없는 해명을 하는 상황이 반복되어져만 갔다. 좋았던 시간은 짧고 다툼의 시간은 길었다. 그리고 우리는 지쳐만 갔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도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