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결혼 일기 - 1월 18일 자
뭐지? 남자친구가 바람을 폈는데 왜 내가 속이 시원하지? 5월의 햇살이고, 지구의 유일한 자연적 위성 달이고 뭐고 다 쌔빨간 거짓말, 연애에서 씨부리는 모든 것들이 다 꼬시기 위해 하는 거짓말, 꼬시고 난 뒤 단물 빠지면 씹던 껌처럼 버려지고 말지.
첫 연애는 이렇게 최악이었다. 현수가 따라오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이 녀석 굳이 따라와서 내 입에서 험한 말 나오게 만들었다.
"꺼져, 멍멍아~"
도시에 살던 사장님께서 사업을 접으시며 그동안 모아두었던 돈으로 부인과 함께 소도시의 시골로 이사를 하기로 하셨다. 이곳 저곳 찾아다녔지만 이거다 싶은 땅이 없었다가 여기다 싶은 땅을 만나게 되었다. 3천평 넘는 땅을 사서 건축에 대한 아무런 조예도 없는 남편분은 집을 짓고, 조경에 대한 아무런 조예도 없으신 부인 분은 마당을 꾸몄다. 평소 진취적이고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고 계신 두 부부는 10년 후 케이블카를 타다 우연히 보게 된 땅에 마음을 빼앗겨 살던 곳을 팔고, 다시 집을 짓고 계셨다. 이번 우리 클라이언트 분의 사연이었다.
올해 52년 용띠라고 하셨는데, 그보다 한참 젊어보이시는 것은 일을 하고 계시기 때문이렷다. 우리가 들어서자마자 공사판 현장 한켠에 따뜻하게 만들어놓은 쉼터 공간으로 우리를 초청하시더니 손수 믹스 커피 한잔씩 타주셨다. 그리고 대뜸 여자인 나에게 이런 일을 하시는 것 참 대단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우리는 연세도 있으신데 현장에서 일하시는 사장님께서 더 대단하시다며 엄지척 해드렸더니,
"사람이 왜 빨리 늙는지 알아요? 감성이 메말라서 그런 거에요. 나는 내가 나이가 들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아무 일도 못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어제 읽었던 책에서 이런 구절이 나옵디다. 몸이 아픈 갑부가 병상에 누워있는데 병원 창밖으로 낙엽을 치우고 있는 청소부를 보았답니다. 평소엔 정말 천하게 여기던 그 사람이 부럽더랍니다. 저렇게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말이죠. 나는 건축에는 조예가 없는데 좋아서 짓는 거에요. 언제 다 지을런지 모르겠지만 마음 맞는 친구들 모아다가 집 짓고 있어요."
일할 수 있는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 행복함을 느끼는 이 순간이야말로 감성이 무르익는 시간이고 이 때 우리는 비로소 살아있는 자신을 느낄 수 있다. 반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미건조한 삶이 사람을 빨리 늙게 한다는 말에 크게 공감이 되었다. 세상에 천한 일이란 없다. 어떤 일을 천하게 보는 그 사람이 천한 사람이라고 링컨 대통령께서 말씀하셨다고 한다. 여자인 내가 이런 험한 일을 한다며 안타까워하는 사람들보다 대단하다 칭찬해주는 사람들이 더 많은 걸 보며 세상이 그래도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나는 내가 하는 일이 더 자랑스럽고 즐거워진다. 굳이 지랄같은 남자친구 없어도 그만이다.
그러나 연애라는 것도 빨리 늙지 않기 위해 하기는 해야 하는 일이다 싶은 것이, 나이 지긋한 사모님께서도 어디 외출할 것도 아니고 남편과 단 둘이 공사 현장에 콘테이너 집 하나 놓고 몇 달을 살지언정 매일 화장을 곱게 하고 계신다. 단장하지 않는 그 순간부터 여자로서의 특권이 사라지고 급하게 늙어버릴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한 사람과 끝이 나빴다고 해서 다음 연애가 나쁠 것이라는 생각 하지 않기로 했다. 1월 1일 연인 만들기를 실패했을지라도 내 스스로 나를 연애실패자로 낙인 찍지 않으려 한다. 기회는 있다. 왜냐하면 현수에게 꺼져 이 강아지야~ 하고 난 뒤 집에 들어와 지형씨가 내게 보내준 편지 속에 그 메세지를 드디어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게는 영화 티켓도 아직 남아있지 않은가! 일단 오늘 할 일을 마무리짓고 내일 할 일을 준비한 뒤 이른 저녁에 내가 먼저 데이트 약속을 잡으려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지형씨는 내 대답을 듣기 위해 기꺼이 함께 영화를 보기로 했다.
영화를 마친 뒤 우리는 근처 술집으로 갔다.
"진실게임이요? 그건 애들이나 하는 거 아니에요?"
"우리도 아직 20대잖아요. 제 첫인상 어땠어요?"
"단발머리가 싱그러웠고, 손에 쥐고 있는 커닝페이퍼가 귀여웠으며, 덜덜 떠는 소심함이 너무 안쓰러워서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고등학생도 아니고 무슨 단발머리에."
나는 웃다가 순간 멈칫했다.
"1월 1일에 소영씨를 처음 본 게 아니에요. 고등학교 3학년 때 간부 수련회에서 소영씨 봤었어요."
"그걸 기억하고 있었어요?"
"소영씨는 완전히 잊었더라고요. 물론 내가 안중에도 없었겠죠.'
"이렇게 잘생긴 분을 제가 몰라뵈었을 리가 없는데요."
"글쎄, 눈길도 안 주던데요."
나는 기억해내려 눈알을 굴리며 애를 썼다. 전혀 떠오르지를 않았다.
"미안해요."
그럼 그 오랜 시간을 나만 바라봤다는 뜻? 에이 설마.
"뭐 소영씨만을 기다린 건 아니지만 소영씨보다 좋은 사람은 아직 못 만났나봐요."
술이 달다. 한 잔, 두 잔 넘어가는 이 맛. 오늘까지만 마시고 끊자. 알딸딸한 것이 약간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으면서 기분이 너무 좋았다. 그런데 이번에도 기억에 소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정신줄 꽉 잡자.
"제 물음에 답해준다고 하지 않았어요?"
"저도 좋아합니다. 좋아합니다 지형씨."
"너무 쉽게 대답하는 게, 술 취해서 하는 말 같은 게 영 미덥지가 않네요. 소영씨, 내일 아침 10시에 좋아한다는 말이 사실이면 전화 주세요. 만약 기억 나지 않거나, 기억이 났는데 후회가 된다면 전화 안 하시면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이 말까지는 기억이 났다.
스르르 감기는 눈을 지탱하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지형씨에게는 좋은 향기가 난다고 느꼈다. 티트리 향인가? 그를 만나면 항상 머리가 개운한 느낌이 있었다. 그런데 술 기운이라 그런가? 그의 티트리 향 때문인가? 잊혀진 고등학교 때 기억의 파편들이 합쳐지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나는 이번에는 제대로 집으로 돌아왔다. 병실에 가려는 나를 지형씨가 집으로 데려다줬다고 한다. 이제 그 병실에는 한 선배도 없는데 나는 왜 또 거기로 가려고 했을까? 습관이란 참 무서운 것이다. 아침 9시 50분. 나는 반드시 떠올려내야만 하는 기억이 있었다. 삼세번,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른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머리가 아팠다. 숙취는 여전히 배와 머리를 부수고 있었다. 물 한잔을 마시고 크게 심호흡을 하고 전화를 걸었다.
"나, 전화했다."
"왠 반말?"
"나 고등학교 때 일도 기억 났거든. 티트리향."
"...고맙다."
금방이라도 달려가서 안아주어야 할 것만 같은 그의 음성에 오랜 기다림이 묻어나고 있었다. 새로운 운명은 이렇게 포문을 열고 있었다.
고3 2월에 떠난 졸업여행에서 몰래 샴페인을 챙겨온 친구들과 처음 술이라는 것을 마셨다. 그때 옆 남학교에서도 같은 곳으로 졸업여행을 왔는데 -패키지 여행은 이게 문제다 싶었지- 거기에 지형씨가 있었다. 샴페인을 살짝 찌끄리고 눈이 조금 나빠 찡그리는 내게 다가온 남학생이 지형씨였다.
"나 기억 안 나? 너 만나보고 싶다고 편지 보냈었는데."
"편지? 나 편지 받은 적 없는데?"
"전해지지 않았구나. 근데 그 사이에 너 머리카락이 많이 길었구나. 예쁘다."
예쁘다고 했다. 나에게. 그런 말을 해준 사람은 처음이었다.
"너 잘생겼다. 주거니 받거니~"
우리 둘은 마주 보고 웃었다. 이제 곧 성인으로 가는 길목에서 만난 예비 남녀라고 해야 할까? 느낌이 좋았다. 그가 내게 다가왔다. 좋은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좋은 향기 난다. 무슨 향이야?"
"티트리 향이야. 이걸 알아보는 애도 있구나."
"그래? 나 좀 대단해? ㅎㅎ"
"너 많이 대단해. 몇 달 전 간부 수련회 때, 너는 내 구원자였어. 너의 그 발표내용이."
"호스피스?"
"응. 그때 우리 아버지가 말기 암이셔서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거든."
그렇다. 지형의 얼굴을 보니 몇 달 사이 지형의 아버지는 이미 운명을 달리 하신 모양이었다.
"많이 울었겠구나."
"그랬지. 그런데 너의 그 발표가 내게 생기를 주었다고 하면 믿어질까?"
지형의 티트리 향이 점점 가까워져왔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내 입을 타고 티트리 향이 번져왔다. 내가 쭈빗거리며 뒤로 발을 빼자 내 입속에 아직 남은 샴페인 향에 그가 취했는지
"널 좋아해"
낮게 속삭이며 그가 더 깊이 내게 파고들었다. 그런데 나는 갑자기 찾아온 산소결핍에 심한 두통을 느끼고 있었다.
"나 머리 아파."
그때 내게 전해줘야 할 편지를 가로챈 범인인 연수가 나타났다.
"이지형, 나랑 얘기 좀 하자."
편지를 가로채듯 지형을 가로채갔고, 나는 왠지 너무 졸려서 잠을 잤다.
아침에 숙소로 돌아와 있던 나, 내가 길 벤치에서 자고 있더라면서 나 얼어죽을 뻔했다고 자기들이 목숨을 구해줬으니 목숨값을 내놓으라는 친구들의 귀여운 협박을 받으며 나의 졸업여행은 끝이 났다. 그리고 그 전날 지형씨와 나눴던 대화와 첫키스의 기억은 알코올과 함께 증발해 버렸다. 그러나, 유일한 증인이 있었으니, 티트리향만은 진실을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