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르노/호르크하이머가 경고한 바로 그것
지난 6월 18일, 문화체육관광부는 국정기획위원회에 ‘5대 문화강국 실현’ 계획을 보고했다. K컬처를 300조 원 시장으로 키우겠다며, 앞으로 5년간 51조 원을 투입하겠다는 거대 구상을 내놓은 것이다. 수치만 보면 문화에 대한 대대적인 투자인 듯하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문화’에 대한 이해는 놀라울 정도로 얕고, 방향은 의심스러울 정도로 위험하다.
보고서는 영상, 음악, 게임, 웹툰뿐 아니라 뷰티와 푸드까지 ‘K컬처’로 포장해 수출산업으로 육성하겠다는 계획을 밝힌다. 지원 확대, 세제 감면, 플랫폼 생태계 조성 등 수단은 그럴듯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전제, 즉 문화는 곧 산업이며, 시장 확대가 곧 문화의 발전이라는 믿음 위에 서 있다. 하지만 진짜 문화는 그렇게 자라지 않는다. 문화는 순간 소비되고 폐기되는 유행이 아니라, 사회가 자신을 비추고 해석하는 방식이며, 공동체의 감각과 태도를 형성하는 서서히 스며드는 힘이다. 이런 점에서 이 보고서는 철학적으로 치명적이다.
이미 20세기 중반, 철학자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문화산업(Culture Industry)'이라는 개념으로 이러한 문제를 경고한 바 있다.
“문화가 산업화될 때, 예술의 자율성과 비판성은 사라지고, 인간은 획일화된 콘텐츠에 길들여진다. 문화는 각성의 도구가 아니라, 지배를 정당화하는 마취제가 된다.”
그들은 문화가 자본주의 논리 속에서 상품처럼 대량 생산되고 소비되면, 예술의 비판성과 독창성은 사라지고, 대중은 획일화된 콘텐츠에 길들여진다고 보았다. 결국 문화는 인간을 각성시키는 것이 아니라, 지배 질서를 강화하는 마취제가 된다.
지금 문체부가 보고한 정책은 바로 이 '문화산업' 논리의 현대적 재현이다. 국가는 콘텐츠를 ‘육성’한다는 명목으로 창작의 방향을 틀고, 예술가를 ‘창조자’가 아닌 ‘정해진 형식에 맞춘 생산자’로 만든다. 예술은 실험과 성찰이 아니라, 정해진 수요를 맞추는 공급으로 축소된다. 그 결과는 깊이 없는 표피적 콘텐츠, 빠르게 소모되고 잊히는 문화의 피로다. 이러한 산업주의적 문화정책은 창작 생태계에 해악을 끼친다. 지방으로 국립예술단체를 이전하고, 무용원이나 플랫폼을 만든다고 예술 생태계가 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운영 방식이 바뀌지 않는 한, 이는 단지 ‘서울 철밥통’을 지방으로 옮기는 재배치에 불과하다.
진짜 문제는 창작자들의 삶, 그리고 자율성과 지속가능성이다. 그래서 일회성 단순 생계지원을 넘어, 장기적인 안목으로 제작극장과 같은 창작 환경을 지원하고, 예술가 노동에 대한 제도적 논의가 병행되어야 한다. 이는 단지 복무나 적절한 보수의 문제가 아니라, 공연 /작업 중 사고에 대한 안전 보장과 사후 보상까지 포괄하는 문제다.
정책은 방향을 제시하는 행위이기 이전에, 그 사회가 문화와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드러내는 거울이다. 이번 문체부 보고서는 방향도, 기준도 없이 수출 실적과 산업 성장의 언어만을 반복했다. 이는 문화정책이 아니라 기획재정부식 산업계획의 언어에 가깝다. 문체부는 비판 여론이 커지자 곧바로 “해당 보고서는 내부 검토안일뿐이며 확정된 사항이 아니다”라고 물러섰다. 이 말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행정의 무책임함을 보여준다.
정말 새 정부가 ‘문화강국’을 꿈꾼다면, 가장 먼저 바꿔야 할 것은 예산의 규모가 아니라, 행정의 언어와 정책의 철학이다. 51조 원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돈이 향하는 방향이다. 문화정책은 쇼케이스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가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대한 철학적 선택이며, 사람 중심의 감각과 공동체적 미래에 대한 상상이어야 한다.
국정의 회복이 속도감 있게 진행되는 지금, 문화예술만큼은 급하게 서둘러선 안 된다. 예술가를 소비시장에 공급하는 생산자가 아니라, 스스로의 감각으로 세계를 해석하는 창조적 주체로 인정하는 것. 콘텐츠가 아니라 감각, 수치가 아니라 관계, 단기 성과가 아니라 긴 호흡의 생태계. 이런 언어로 정책을 설계하지 않는 한, 아무리 많은 예산을 쏟아부어도 결과는 반복될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번에도 ‘비전’은 남고, 현장은 또다시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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