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남편과 꽤 만족스러운 뮤지컬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길이었다.
커튼콜 장면에서 모든 배우들이 무대에 나와 인사를 한다. 관객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진다. 이어서 주연 배우가 무대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 찬 그 공간은 믿기지 않을 만큼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일순간 무대 위의 한 배우, 그의 표정과 목소리에 모든 관객이 집중했다.
잠시 숨을 고른 후, 그는 수없이 부르고 또 불렀을 자신의 곡을 더없이 완벽하게 소화해 냈다.
노래가 끝나기 무섭게, 모든 관객이 기립하여 긴 환호성과 박수로 무대의 감동을 표현했다.
뮤지컬을 관람하고 며칠, 몇 주가 지난 뒤에도 감동의 여운이 가시지 않았다.
잠들기 전, 눈을 감고 뮤지컬 장면을 하나둘 돌려보는 게 일상이 된 어느 날 밤.
문득 나의 10대, 20대를 가득 채웠던 뮤지컬 배우라는 꿈을 떠올렸다.
'지금 도전하기에는 너무 늦었을까?'
'전공자도 아니고, 경력자도 아니지만 오디션은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무모한 생각의 출발로 나는 어느새 한 극단 뮤지컬 오디션장에 도착해 있었다.
어떤 노래를 불렀는지, 어떻게 입장하고 퇴장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오디션 당일 저녁, 개별 연락을 통해 합격자를 발표한다는 것.
이렇게 중요한 날, 남편이 옆에 있으면 좋았을 텐데 하필 해외 출장으로 그는 지금 비행기 안이다.
합격자 발표가 예정된 저녁 시간, 나는 낯선 공간에서 핸드폰만 바라보고 있다.
그 순간, 전화가 울렸다. 심장이 쿵 내려앉은 것 같았다.
숨을 참고 폰 액정을 확인한 순간, 짜증이 몰려왔다.
몇 년 간 연락을 끊었던 아버지 전화였다.
'살면서 날 그렇게 괴롭히더니, 이 중요한 타이밍에...'
사실 요 며칠, 아빠와 엄마에게 계속 연락이 왔다.
전화를 받지 않자, 엄마의 애절한 메시지가 와있었다.
상대는 내가 메시지를 읽었다는 것을 알 수 없게 알림메세지 창을 통해 확인해 본다.
'왜 전화를 안 받니. 아빠가 걱정하시잖니. 언제까지 그럴 거니. 우리는 너를 사랑한단다.'
엄마 아빠는 참 여전하구나.
그들 편에서 나는 왜 불효의 가해자가 되어있을까.
그 순간, 다시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02로 시작하는 번호다.
나는 서둘러 전화할 장소를 찾으며 이 방, 저 방을 기웃거렸고 지나가던 사람이
나의 다급한 표정을 읽었는지 비어있는 저 방에 들어가라고 손가락짓을 했다.
고개를 숙여 감사 표시를 하고 그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들어가자마자 닫은 문쪽을 바라보고 크게 한번 호흡한 뒤,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결과는 합격이었다.
이 무모한 도전과 시작이 이렇게 순조롭다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네,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반복하며 전화를 끊은 뒤 잠시 동안 그 자리에 서있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소식을 누구보다 기뻐해주고, 축하해 줄 남편이 옆에 없다는 사실이 가장 아쉽기만 했다.
그 순간,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그게 진짜일 것 같니?"
이게 무슨 일일까? 아빠의 목소리인데?
고개를 돌려 그제야 살펴보니 그 방은 2층 침대 두 개가 놓여있었고, 왼쪽 1층 침대에 아빠와 엄마가 있었다.
아빠는 반쯤 기대 누운 상태였고, 엄마는 옆에 앉아있었다.
'야, 너 거기 좀 앉아봐. 너는 아직도 그렇게 세상을 몰라서 어떡하니? 여보, 쟨 아직도 저렇게 뭘 모르는 애야.'
엄마는 한 손으로는 아빠의 손을 지그시 잡고, 다른 손으로는 무릎을 치며 깔깔 웃었다.
아빠는 언제나처럼 나의 표정은 살피지 않고, 자기 할 말을 이어갔다.
"넌 아직도 네가 세상을 잘 안다고 생각하지? 네가 알면 얼마나 안다고 생각하냐?
너 어릴 때 꿈이 뮤지컬 배우였던 거 내가 모르는 줄 알았지? 너 뮤지컬 배우하고 싶다고 얘기했던 거 너네 엄마한테 다 들었어. 넌 네가 나이 삼십이 넘었는데, 이제 뮤지컬을 시작하면 뭐라도 될 것 같지? 어림도 없지. 너는 늘 그게 문제야. 아직도 애야, 애. 아빠가 항상 말했지, 아빠는 세상을 다 안다고. 너보다 몇십 년을 더 많이 산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고. 남들은 다 아빠보고 똑똑하다, 대단하다 하는데 너만 아빠를 무시하잖아. 네가 그래서 안 되는 거야. 너 그렇게 잘난 체하고 너 스스로 뭘 하려고 해 봤자, 너는 내 손바닥 안에 있어."
이어서 엄마가 말했다.
"전화는 왜 안 받니? 전화 좀 받아라. 아빠 걱정하신다."
주체 없이 뜨거운 눈물이 쏟아졌다.
그 모습조차 보이기 싫은데, 눈치 없이 눈물이 나온다.
그들과 대화는 더 이상 의미가 없음을 알기에 그 방을 빠져나가야 했다.
내가 일어서려 하자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둘째 이모가 다가와 패딩 단추를 잠가주며 말했다.
"얘, 이모 다 들었어. 엄마 아빠한테 잘 좀 해라."
다시 한번 왈칵 쏟아지려는 눈물을 참고, 방문으로 향한다. 아빠는 쩌렁쩌렁 울리도록 큰 목소리로 말한다.
"너 다시 한번 말하는데, 너는 네 힘으로 아무것도 못 해. 지금 이거 다 우리가 한 거야. 무슨 말인지 알아?
지금 이게 다 우리가 만들어낸 일이라고. 다 거짓말이고, 넌 다 속은 거라고. 알았냐?
그니까, 정신 차리고 앞으로 시키는 대로만 해. 그럼, 성공하는 거야. 네가 아빠가 하라는 대로 복종하지 않으면 너는 계속 그 꼴 나는 거야. 그리고 너 그 잘난 남편은 지금 어딨냐? 네가 이렇게 될 줄 몰랐대?
네가 결혼하고 남편이 있으면 뭐 해? 결국 엄마랑 아빠한테 잘해야 네가 더 잘 되는 거야. 네가 엄마, 아빠가 있어야 남편한테도 무시 안 당하는 거야."
더 이상은 들을 필요가 없다. 힘껏 문을 쾅 닫고 방을 나왔다.
여기가 어딘지 모르지만 어떻게든 그곳을 벗어나야 했다.
백열등 몇 개만 희미하게 켜진 복도.
까칠까칠한 표면의 회색 벽돌을 짚으며
기어가듯 그곳을 빠져나왔다.
'어떡하지? 남편에게 전화할까? 남편은 지금 비행기 안인데, 전화를 못 받을 텐데.'
이 혼란스러운 순간, 혼자 있다는 사실이 서러워 다시 눈물이 흘렀다.
그 순간, 뱃속에서 힘찬 태동과 함께 아랫배가 저릿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갑자기 눈이 떠졌다.
한동안 그대로 누워있었다.
'아, 꿈이었구나...'
얼마나 인상을 쓰며, 온몸에 힘을 주었으면 뱃속 아기가 힘찬 발길질로 나를 깨웠을까?
고개를 돌리니 오른쪽엔 남편이 잠들어있었고, 뱃속 아가는 아직 힘찬 태동 중이었다.
꿈이었어...
임신 중에는 새벽에도 몇 차례 화장실을 가는데, 거실로 나가기가 무서웠다.
엄마, 아빠가 있을 것 같았다.
나에게 무섭고, 버거운 존재인 그들이 거실을 지키고 있을 것 같았다. 생가만 해도 소름이 돋는 듯했다.
침실에 있는 화장실에 다녀와서 다시 자리에 누우려는데,
켄넬 안에서 자고 있었던 반려견 포포가 어느새 나와 내 베개를 차지하고 누워있었다.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너는 나의 불안을 웃음으로 바꾸어주네.'
포포를 안은 채로, 잠든 남편을 마주 보고 누웠다.
뱃속 아가는 여전히 쉬지 않고 발차기를 하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배를 쓰다듬으며, 태동을 느끼니 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 나의 진짜 가족은 남편과 아기와 포포구나. 괜찮아.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괜찮아.'
다시 눈을 감았다. 포포를 더 꼭 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