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의 몰락으로 게이샤가 된 15세의 일본 소녀가 가정과 주변의 결사적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주둔 중인 바람둥이 미국 해군 중령 핑커톤을 사랑하여 결혼식을 올리고 아기까지 낳았으나 미국으로 떠난 남편을 3년 동안 오매불망 기다린 보람도 없이 버림받고 결국 자결하고 만다는 오페라 《나비부인(Madama Butterfly)》의 줄거리는 얼핏 보면 흔한 삼류 소설의 한 장면처럼 진부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푸치니는 이런 신파조의 스토리에다 비할 바 없는 아름다운 노래를 입혀 그의 《토스카(Tosca)》, 《라보엠(La bohème)》과 어깨를 견주는 아름다운 또 하나의 명작 오페라를 빚어내었습니다.
일본의 나가사키를 배경으로 하는 오페라의 분위기를 제대로 재현하기 위해 일본에서 유행했던 속요들을 연구하여 신비로운 동양의 분위기를 연출하는가 하면(극중에 미국과 관련된 노래에는 미국국가(the Star-spangled Banner)의 선율을 차용하는 등 곡의 현실감을 살리기 위하여 푸치니가 음악에 기울인 노력은 오페라 나비부인 작품 곳곳에 역력합니다.
그뿐인가요? 오페라의 첫 부분에 나비부인이 등장하며 부르는 아리아 〈나는 일본에서 제일 행복한 여인(Ancora un passo or via)〉, 나비부인과 핑커톤이 첫날밤에 같이 부르는 사랑의 이중창 〈밤이 가까워 졌소(Viene la sera)〉와 〈달콤한 밤이여 수많은 별들이여(Dolce notte quante stelle)〉, 2막 1장에서 나비부인이 미국에서 돌아오는 남편이 타고 있는 아브라함 링컨호가 입항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며 하녀 스즈키와 함께 방을 꾸미기 위해 아름다운 꽃을 뿌리며 부르는 노래인 꽃의 이중창(Flower Duet) 〈벚꽃나무 가지를 흔들어(Scuoti quella fronda di ciliegio)〉, 핑커톤의 죄책감에 가득한 아리아 〈안녕, 꽃으로 장식된 그리운 집이여(Addio, fiorito asil)〉, 나비부인이 자결하면서 부르는 〈명예롭게 살지 못할 땐 차라리 죽음을(Con onor muore)〉 등 변화무쌍한 필치로 수놓은 아름답고 치열한 노래들은 참으로 주옥과 같습니다(이들 아리아를 다 듣고 싶은 분은 맨 아래 유튜브 동영상들을 참조하시길. . .).
그러나 <나비부인>의 수많은 선율 가운데 마법처럼 단번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는 노래는 아무래도 바로 나비부인의 대명사와도 같은 아리아 〈어느 맑게 갠 날(Un bel di vedremo)〉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웨버가 〈메모리〉를 통해 담으려 했던 그리움도 전혀 호소력이 없지는 않지만 푸치니의 노래에 비하면 아무래도 아류로 느껴집니다. 많은 가수들은 예쁜 목소리로 나비부인의 확신에 찬 희망과 기대를 노래하려고 하지만 이 아리아에 담긴 정서의 진폭은 이를 훨씬 뛰어 넘는 미묘한 것이며 거대한 스케일이 아닌가 합니다. 이미 "멀리 잃어지고 있는" 사랑을 감지하고 부르는 이 뜨거운 그리움의 노래! 그 노래 이면에 깊게 드리워진 잔인한 절망의 그림자를 제대로 읽어낸 프리마돈나를 아쉽게도 아직 만나보지 못하였습니다.
오페라 나비부인을 관통하는 애절한 그리움은 그 유명한 〈허밍코러스(Coro a bocca chiusa)〉의 선율에도 아스라이 물들어 있습니다.
현악기의 피치카토 반주를 타고 벚꽃처럼 피고 지는 유려하고도 아름다운 선율! 세상의 모든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의 한과 안타까움을 이렇게 단순한 멜로디로 그릴 수 있었던 작곡가가 다시 또 있을까요? 푸치니는 유명한 편지의 이중창 장면에서 핑커톤의 친구 샤플리스가 나비부인에게 핑커톤의 편지를 읽어줄 때, 흥분하며 반응하는 나비부인의 순진무구한 기대감과 그리움을 이 〈허밍코러스〉와 동일한 선율로 채색하였습니다.
차마 그 잔인한 핑커톤의 편지를 나비부인에게 읽어주지 못하고 샤플리스가 에둘러 나비부인에게 재혼을 권유하자 나비부인은 절박하게 핑커톤에게 아이가 있음을 호소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핑커톤이 부랴부랴 새 부인과 함께 자신의 아이를 찾으러 오는 것도 모르고 나비부인은 항구에 입항한 핑커톤의 배를 보며 그리움과 기대에 한껏 부푼 채 밤을 지새웁니다. 그때 적막의 밤을 뚫고 흐르는 해군병사들의 허밍코러스! “울어서 멍든 눈흘김으로 미워서 미워지도록 사랑한” 자신의 연인에 대한 나비부인의 마지막 기대와 불안, 희망과 좌절, 그리움과 한, 사랑과 미움, 그 모든 것이 스며들어 녹아있는 이 코러스의 선율에 전율하지 않을 무딘 가슴이 있을까 싶습니다.
그토록 ‘나비부인’보다는 ‘핑커톤부인’이 되고 싶었던 여인! “다섯 손가락 끝을 잘라 핏물 오선을 그려 쏟아 부은 노래”를 뒤로 한 채 나비부인은 꽃다운 나이에 초라한 자신을 위해 남은 마지막 잔을 받아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