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았던 우리의 무관심.
지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화려하지만, 정작 생(生)의 승부는 어둡고 축축한 땅속에서 결정되곤 한다.
나란히 서 있는 두 그루의 나무가 있었다.
한 그루는 제 몸집을 키우는 일보다 땅 밑으로 제 영토를 확장하는 일에 집착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뿌리는 식탐 어린 짐승처럼 흙을 파헤치고 암석을 휘감으며 깊숙이 박혔다.
반면, 옆의 나무는 지상의 풍경에만 몰두했다. 잎은 무성하고 가지는 유려했지만,
정작 그것들을 지탱해야 할 뿌리는 흙탕물에도 쉽게 씻겨 내려갈 만큼 얕고 부실했다.
겉보기엔 그저 평화로운 숲의 일부분일 뿐이었다.
어느 날, 예고 없이 태풍이 도착했다. 매서운 바람은 차가운 냄새를 풍기며 숲을 찢어 놓았다.
단단한 나무는 비명을 지르면서도 제 발밑의 암석을 꽉 붙들고 견뎠다. 하지만 화려했던 옆 나무는 바람이 몸을 스치자마자 허망하게 고꾸라졌다. 거대한 동사가 한순간에 명사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다음 날, 사람들은 쓰러진 나무 주위에 모여들어 혀를 찼다. "태풍이 무시무시하긴 했네, 멀쩡한 나무를 이렇게 고꾸라뜨리다니." 사람들은 늘 눈에 보이는 가해자에게만 죄를 묻는다.
하늘에서 쏟아진 비바람만을 탓하며 나무의 불운을 동정한다. 하지만 나무를 쓰러뜨린 건 태풍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무가 생을 대했던 방식, 즉 깊게 뻗지 못한 채 안일하게 흙을 움켜쥐고 있던 그 얕은 뿌리의 태만이었다.
우리 삶의 기상청도 이와 닮아 있다. 우리는 늘 외부에서 불어오는 빚더미, 관계의 파탄, 갑작스러운 실패라는 비바람 때문에 내가 무너졌다고 믿고 싶어 한다. 그래야 내 마음이 조금은 덜 비루해지니까. 하지만 사실 우리는 그 문제들 때문에 쓰러지는 게 아닌것을 안다.
거센 비바람이 지나간 자리는 처참하지만, 동시에 투명하다. 쓰러진 나무의 밑동이 드러나고 나서야 우리는 비로소 제 안의 부실함을 직시하게 된다.
환경을 탓하는 일은 쉽고 명쾌하지만, 우리를 구원하는 건 언제나 뒤늦게 발견한 자신의 초라함을 되돌아보는 일이다.
결국 문제는 문제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내 안의 뿌리가 어느 깊이까지 닿아 있는지 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았던 우리의 무관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