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에서 주재원으로 근무할 때의 일이다. 회사 근처에는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널찍한 인조잔디 운동장이 하나 있었다. 점심 시간이 되면 근처 여러 회사에서 축구를 하려는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 들었다. 인종도 국적도 제각각이었다. 정해진 팀도, 미리 약속된 멤버도 없었다.
그런데도 잠시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양 팀으로 진영이 나뉜다. 사람들은 각자 입은 옷을 내려다본 뒤 주변을 힐끗힐끗 살피고는 자신이 어울릴만한 진영으로 이동한다. 이처럼 흰색 옷을 입은 쪽과 유색 옷을 입은 쪽으로 나뉘는 게 암묵적 룰이었다. 이후에도 같은 편임을 표시하기 위한 조끼나 표식은 없다. 입고 온 옷을 그대로 입고 게임을 한다.
경기가 시작되면 더 흥미로운 장면이 펼쳐진다. 각자 알아서 포지션을 찾아가는거다. 원래 익숙한 자리가 있을 텐데도, 팀에 비어 있는 포지션을 찾아서 메운다. 공격수가 수비수가 되기도 하고, 왼발잡이가 오른쪽 사이드로 이동하기도 한다. 누군가는 말없이 골문 앞에 선다. 경기가 끝나면 양 팀이 모여 가볍게 인사만 나눈 뒤, 다시 각자의 회사로 흩어진다. 누가 이겼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내일이면 또 다른 팀으로 만날 테니까.
개미나 벌처럼 사회성이 높은 동물들도 비슷한 행동을 한다고 한다. 겉으로 보면 역할이 분명히 나뉘어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상황에 따라 먹이를 나르던 개체가 경계를 서고, 경계를 서던 개체가 다시 이동한다. 내 역할이라는 게 고정되어 있지 않고, 그 순간 가장 필요한 일이 내 역할이 된다.
회사나 스포츠 팀의 조직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잘 굴러가는 조직에서는 자기 역할을 주장하는 사람은 적은 반면, 부족한 자리를 먼저 찾아 메우는 사람은 많다. 반대로 갈등이 잦은 팀을 보면, 역할이 없어서가 아니라 역할에 고착돼 유연성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앞에서 말한 축구의 풍경은, 그 지역이 스타트업이 밀집한 곳이었기 때문에 더 자연스러웠을지도 모른다. 상황을 읽고, 팀의 균형을 먼저 생각하는 감각. 오늘은 내가 조금 내려오고, 내일은 누군가가 나를 받쳐주는 흐름. 그런 감각이 있는 조직은 정해진 역할이 없어도, 서로가 알아서 움직일 줄 알기 때문에 잘 굴러가고 오래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