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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후딱 가버린다.

빨간 날

by 깨리

느닷없이 눈이 일찍 떠졌다. 지금은 새벽 5시이다. 이상하게 할 일이 많은 날은 저절로 눈이 떠진다. 일의 무게에 미리 짓눌러서 겁을 먹는 모양이다. 배는 고프지만, 꼼짝도 하기 싫다.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그래도 내 손가락은 글을 쓰기 위해 움직인다. 지금 쓰지 않으면 이 시간 이후로는 쓸 수 없을 거 같아 조금이라도 움직여야 한다. 하루 종일 음식과 씨름을 하고 나면 녹다운이 돼서 눕고만 싶다. 하지만 시댁 명절 음식을 끝냈다고 끝이 아니다. 우리 집에 오면 또 저녁을 만들고 설거지 청소 빨래 도미노처럼 일들이 줄지어 나만 바라본다. 어쩌다 이렇게 됐지? 왜 쉬는 날이 요렇게 많은데 단 하루를 내 맘대로 쉴 수가 없는 걸까?


빨간 날이 많아서 계획을 철저히 짰는데도 불구하고 시간이 촉박하다. 휴일 첫날 헤어샆에서 미뤄 뒀던 흰머리 염색을 아침 일찍 하고 시장을 봤다. 겨울옷 정리를 하고 삼시 세끼를 차리고 나니 하루가 갔다. 둘째 날 6개월 만에 아픈 친구를 만나러 수유리에 갔다. 오랜만에 보는 거라 남편찬스로 이거저거 챙겨주고 싶은 마음에 옷이랑 음식을 챙기다 보니 보따리가 세 개가 돼서 혼자서는 지하철을 타고 갈 수 없어 남편에게 부탁했다. 덕분에 친구 집 앞에 편히 갈 수 있었다. 남편을 먼저 보내고 친구랑 그동안의 근황과 서로의 애환들을 털어놓으며 4시간의 짧은 만남을 마치고 집으로 왔다. 혼자서 음악을 들으며 지하철을 2시간 타고 오니 몸이 지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지만 다들 배고프다며 저녁은 뭐냐며 묻는다.

"아, 나도 남이 차려주는 밥을 먹고 싶다."

저녁을 먹고 설거지하고 정리하니까 오후 9시다. 시간을 왜 이리 빨리 가는 걸까?

셋째 날 시댁 가서 음식 할 재료들을 사러 마트 두 곳과 시장에 갔다 오니 하루의 반이 사라졌다. 늦은 점심을 마트에서 사 온 초밥과 시장에서 사 온 수제비로 해결하고 잠시 집안일을 하고 나니 다시 저녁이다.

"밥때는 왜 이리 빨리 오는지 알 수가 없다."

나와 큰딸은 스파게티를 남편과 작은딸은 비빔면을 먹었다. 입맛도 달라서 메뉴가 통일이 안 돼서 저녁 차리기는 두 배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오늘은 넷째 날 이제는 아침을 먹고 요리하러 시댁에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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