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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쉬운 거

포기

by 깨리

어릴 때 제일 먼저 배운 게 포기였다. 형편이 좋지 않았던 우리 집은 막내인 나에게는 너그럽지 못했다. 무엇이든 나는 포기해야 마음이 편했다. 뭣도 모르고 용기 있게 내 욕구를 말해본들 거절이 답이었다.

"태권도 학원 가고 싶어요?"

"여자애가 그건 배워서 뭐 하게!"

"그림 배우고 싶어요?"

"여유 없다."

많이 거절당하다 보면 말하기보다 안 되는 이유를 먼저 찾게 된다. 내가 막내라서 그럴까?

언니, 오빠는 그래도 혜택이 조금 있었지만 나는 그 둘에 경험치에 밀려 안 해도 된다는 결말 때문에 늘 거절이란 답밖에 없었다. 언니, 오빠는 공부도 잘하고 그림도 잘 그렸다. 근데 난 둘 다 소질이 없었다. 잘하는 걸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 말 잘 듣는 아이 그것밖에 없어서 열심히 살았지만, 학년이 넘어갈수록 그것도 내 능력 밖이 돼버렸다.


공부 머리가 없어서 성적이 하락세를 타고 뭘 해야 할지 몰랐다. 그때부터였을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걸 찾아 닥치는 대로 했다. 남들을 쫓아갈 수가 없어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매달리듯 겨우겨우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배우고 발전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도움을 요청할 사람이 없어서 뭐든지 혼자 해결해야 했다. 방학 때 아르바이트해서 그 돈으로 학원에 다니고 고등학교 졸업하고 남들 신나게 놀 때도 나는 알바 삼매경에 빠져 돈을 벌어야 했다. 부모님이 어렵게 등록금을 마련해 주셨기 때문에 나머지는 내가 해결해야 죄송한 마음이 작아지기 때문이다.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알바 가는 길에 쓰러져 응급실에 갔다.

맹장염으로 수술하고 알바는 할 수 없게 됐다.

나에게 방학은 용돈과 학교 재료비를 모을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거기서 얻는 사회 경험도 나이가 들면서 유용한 교과서 역할을 해줬다.


포기는 일찍 배웠지만 그걸 통해 내 시간을 단축하고 새로운 것을 시작할 발판을 만들어 줘서 감사할 따름이다. 포기라는 단어는 서글픔과 외로움으로 다가와 시작 전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고 결정을 신중하게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줘서 상처를 덜 받고 시간을 줄여 주는 고마운 단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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