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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록 Nov 17. 2024

식물

씨앗부터 죽음까지 자연


 씨앗이 움틀 때, 싹이 먼저 나온다. 전에 한번 아보카도의 씨앗을 싹 틔울 때, 그 떡잎만을 보며 언제쯤 나오나 했다. 근데 뿌리가 먼저 나왔다. 그래, 뿌리가 먼저다.

 그러니까 난 표면만을 보며 사는 거구나. 그 아래의 세상을 보지 못한 채로. 투명한 물속에 있는, 뻗어 나오는 뿌리도 보지 못하는구나. 살려면, 자리를 잡으려면 뿌리가 먼저인데 말이다.


 싹을 틔울 곳을 정할 수 있는 씨앗이 있을까? 스스로 길을 떠나 여행을 하다 이곳이 내가 시작할 곳이야 하며 삶을 시작할 수 있는 씨앗. 마치 사람들이 원하는 환상 속의 어떤 삶처럼 말이다.


 없을 것이다. 식물도 사람도 스스로 원해서 시작되는 삶은 없을 것이다. 맨 처음, 씨앗에게는 그저 싹을 틔울 환경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는 선택권만이 주어진다. 싹을 틔운 후에는 그 자리에서, 주어진 자신의 자리에서 삶을 살아간다. 중간에 식물의 살아가는 곳이 달라지는 건 강한 바람, 비, 홍수, 산사태, 동물, 인간 등등 외부적인 이유다. 식물은 주어진 자리에서 살아간다.


 그럼 가끔씩 어떤 사람들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기도 하는 것처럼, 식물도 자살을 할까? 그들도 자신의 삶이 너무 싫어서, 자신으로 사는 게 너무 싫어서, 세상이 너무 힘들게 해서, 사랑받지 못해서, 외로워서, 고통스러워서, 남은 건 죽음밖에 없어서… 그렇게 죽음의 이유를 만들며 자살을 할까?


작은 화분 속에서 계속해서 꽃을 피워대는 다육이.

커다란 화분 속에서 사계절을 살아가는 가로수, 그리고 공원의 식물들.

그 거짓된 자리에서도 자연으로 살아가는 식물들.

그 자리는 그들이 살아가기 때문에 비로소 자연이 되는 것이다.

살아가야 자연이 되는 것이라면, 자살하는 식물들은 없겠다.


 주어진 자리에서 충실히 어떻게든 살아가는 것이 자연이라면, 나도 자연이 되게 하겠다.

그들이 주어진 자리를 꼭 붙잡으려 뿌리를 내리는 노력을 상상하는 것처럼, 나도 뿌리를 내리려 하겠다.

그들이 주어진 환경을 버텨내며 양껏 햇빛과 양분을 흡수하는 것처럼, 나도 양껏 흡수하려 하겠다. 그렇게 자연으로 살아가면, 그들처럼 충실히 끝까지 갈 수 있을 것이다.



질문들

1. 나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자연은?

2. 나의 주어진 자리를 표현한다면?

3. 나를 식물로 표현한다면?

4. 나의 뿌리는 어느 정도로 안정적인가요?

5. 나에게 식물과도 같은 초록의 힘이 있다면, 그 힘은 어디로 뻗어나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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