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관을 나오면서 변하지 않는 벽을 부술 무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말하기 어려웠던 것들을 글로 쓰고, 보여주지 못했던 것을 증명하고 싶어 대학원에 다녔다. 대학원에서 당사자가 연구를 설계하고 예산을 사용하는 연구방법이나 자립생활에 관한 주제를 배우면서 치유되는 걸 느꼈다. 이러한 연구를 실행하고 싶어 오랫동안 부모단체에서 활동해 오신 고령의 부모님들을 만났었다. 부모님과 변화가 필요한 것들을 연구 계획에 담고 실행해 나가면서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를 깨부스는 무기가 아니라, 함께 타오를 사람들을 모으는 것임을 알게 됐다.
처음 고령의 부모님은 만났을 때는 자신과 함께 나이 들어가는 발달장애인 자녀를 돌보느라 힘든 삶을 살고 계신 분들이라 어렴풋이 생각했다. 하지만 부모님들의 지난 세월을 자세히 들어보면 달랐다. 장애인이 갈 수 있는 학교가 없을 때부터 학교, 복지관, 직업시설 등을 요구하고 실제로 만들어 온 힘 있는 경험을 가진 분들이었다. 그럼에도 막상 어떤 기관이 만들어지고 나면, 정작 그 기관을 염원해 온 장애당사자나 부모님들은 운영에 참여하지 못했다. 단순한 이용인에 머물거나, 여러 조건을 충족하지 못해 이용조차 하지 못하고 계셨다. 어떤 장애당사자는 직업활동을 하러 갔던 첫날 뺨을 맞고 난 이후부터 어떤 기관도 이용하지 못하기도 하고, 어떤 부모는 이동 지원을 하지 않기로 담합한 기관들의 결정에 따라 고령이 된 지금까지도 장애당사자를 픽업해주는 일로 아침저녁이 분주하셨다. 그러면서도 부모님들은 장애당사자가 서로 만날 수 있도록 함께 식사도 하고, 취미활동도 하면서 서로를 버티게 해주는 삶을 살아오신 것 같았다.
본격적으로 부모님들과 모이게 된 계기는 한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그 장례를 다른 부모님들이 챙기시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어머니 한 분이 돌아가시고 나면 부모님들은 친구의 장례식을 함께 치르며 ‘이 장례가 나의 장례식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집단적인 우울을 겪고 있다고 하셨다. 어머니들은 남아계신 아버지들이 장애자녀를 지원하기 어려워하고 이내 갈 수 있는 시설을 알아보기 시작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적어도 ‘이것 밖에 방법이 없는가’하는 고민을 하기 시작하셨다.
돌아가신 어머니는 복지관에서 일하는 동안 매일 같이 이야기하고 여행도 다녔던 분이었다. 그분의 자녀는 또래의 나이였는데, 유독 애정의 시간을 많이 나누었었다. 우리는 장애당사자가 언어로는 소통이 어렵지만 다양한 표현방식을 통해서 지역사회에서 함께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살았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만나면서 낙담하는 순간마저도 웃으며 지내왔는데, 그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니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는 것을 체감했다.
아버님은 자녀가 살던 집에서 함께 살기를 누구보다 바라셨다. 하지만 장애당사자는 이용기간이 종료된 후 다른 기관에 갈 수 없었다. 일을 하셔야 하는 아버님은 처음에는 살던 지역에 있는 시설에 자녀를 보냈지만 그마저도 힘들어지면서 멀리 있는 시설을 알아보셔야 하는 상황이었다. 아버님은 어떤 시설은 돈을 요구하기도 하고, 장애당사자의 자궁적출 수술을 요구하기도 하는 걸 직면하면서 ‘그건 아니지 않으냐’며 좌절하셨다. 그 이야기를 듣고 볼 수밖에 없는 우리의 현실이 또다시 거대한 벽으로 다가왔다.
‘35년간 열심히 쌓아 올린 35층(35세) 건물 같은 장애당사자의 삶을 무너뜨리지 마라’
어머님들은 그동안 애쓰며 지역사회에서 살아온 삶이 무너지는 것 같다고, 기관에서 ‘장애당사자를 위한 상상을 안 한다’고 하셨다. 어쩌다 자립생활 교육을 통해서 장애당사자가 머리도 감고 떨어져서 잠을 잘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게 좋았다면서 자립생활 연습을 원한다고 하셨다. 그래서 고령기 어머니 자조모임을 하면서 나이가 든 중년기, 노년기의 발달장애인이 갈 수 있는 주간보호센터를 방문해 보았다. 중증의 장애를 가졌다고 여겨지거나 고령이라 퇴직을 강요당한 발달장애인은 노동을 통한 별도의 수입이 없었다. 부모도 노년기가 되면서 추가적인 비용을 부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수익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 운영구조도 필요했다. 부모가 지원하지 않아도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주택과 지원자가 있어야 했고, 나이가 들어가는 발달장애인이 바라는 활동들이 있어야 했다.
어머님들은 탈시설활동가들에게 강의를 듣고 ‘이분은 정말 유명한 분이야’라며 존경을 표하시기도 하고, 집에만 있을 수밖에 없었던 자녀의 끼니를 걱정하며 식당 일을 하는 동안 쌓아온 삶의 지혜들을 담담히 말씀하셨다. 자신만 알고 있던 자녀의 특성과 지원방법을 다양한 사람들과 공유하길 바라셨다. 그래서 자신이 없을 때도 장애당사자가 자신의 모습 그대로, 부모가 소중하게 지원했던 방식 그대로 살 수 있길 바라셨다. 그래서 자조모임에서는 지역사회 공간을 찾아다니며 장애당사가에게 필요한 근력운동모임을 만들었다. AAC를 활용할 수 있도록 지원자를 매칭하고 의사소통할 수 있는 상점을 찾았다. 종교기관이라는 공간을 활용해서 비장애청년들과 만나고 자립생활 경험을 쌓을 수 있는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어떤 공공이나 민간 기관에서도 노년기 부모가 가진 정보를 맡지 않았다. 정치인이나 민관협치라는 구조를 찾아다니며 제안했지만 당사자가 제안한 현장 정책이나 연구결과를 적용할 곳이 없었다. 결국 부모님들은 그 이야기를 가장 익숙하게 잘할 수 있는 종교기관을 거점으로 ‘토론회’를 시작했다. 어머니모임뿐 아니라 아버지모임이 생겼고, 필요한 자립생활활동을 지원할 예산이 마련되었다. 하지만 그 끝에 행정은 ‘유사한 또 다른 기관’을 만들어 종교기관에 위탁해 버렸다. 분명한 것은 그 기관의 운영방식과는 상관없이, ‘이용 기관’을 새로 만드는 것만으로는 부모님들이 그토록 원하던 ‘자신이 없어도 무너지지 않는 장애당사자의 지역사회에서의 삶’을 만들진 못한다는 것이다.
고령의 발달장애인 부모님들을 만나면서 부모님들이 장애당사자와 함께 만들어 온 삶의 지혜는 그 어느 전문가의 지식보다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삶의 지혜를 담아낸 보고서나 기획안을 도구로, 당사자가 참여할 수 있는 공식적인 회의체가 필요했다. 특히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재료들을 가지고 사람들이 함께 모여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불을 지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 동시에 이러한 좋은 재료들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를 모아내고 운영하는 자리에 당사자가 주체자로 참여할 수 있는지, 어떻게 소통구조를 지켜가는지는 결과를 뒤엎을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변수라는 것도 뼈저리게 배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