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묵혀두었던 글을 찾았다. 2013년 원주 귀래 사랑의 집 피해자였던 고 장성아 님의 49재에 다녀와서 쓴 글이다. 다시 읽다 보니, 내 곁을 스쳐간 수많은 죽음들이 있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된다.
당시 인권팀에 속해 있었는데, 인권단체의 메일로 원주 귀래 사랑의 집 사건 소식을 들었다. 인권팀에서 인권강사님들과 4개월 넘게 함께 교육받고 막 인권교육 활동을 시작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강사님들과 논의 끝에 함께 49재에 방문하기로 결정했다.
원주 귀래 사랑의 집 사건은 병원에서 10년 동안 방치된 2분의 장애당사자와, 강제로 감금되었던 장애당사자들이 발견된 사건이었다. 처음엔 장애인복지법에 따라 인권적이라고 하는 장애인복지 서비스들이 생기고 있는 시대에 장목사(장애인을 목숨 바쳐 사랑한다는 의미로 스스로를 지칭함)라는 사람이 저지른 충격적인 만행들이 놀라웠다.
고 장성아 님의 49재를 인권단체에서 지낸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히 몰랐다. 그저 안타까운 사건으로 돌아가신 장애당사자를 생각하며 연대하는 마음으로 참여했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49재는 길 한복판에서, 책임자는커녕 생각보다 적은 사람들이 현수막과 국화 한 송이를 들고 참여하고 있었다. 장애당사자의 충격적인 죽음에 비해 너무나 간소한 제사였다.
장애인복지관에서 근무하면서도 이런 죽음을 기리는 49재는 처음이었던 지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반면에 함께 오셨던 인권강사님들은 누가 안내하지 않아도 현수막 뒤로 함께 서고, 영정사진 앞에 작은 국화를 건넸다. 언제까지 짐승 같은 장애당사자의 죽음을 지켜봐야 하느냐며 글썽이던 활동가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이러한 현실을 알면서도 자식을 시설에 맡길 수밖에 없다시던 부모님들의 마음이 슬펐다.
돌이켜보니 그때는 ‘시설’이라는 인권침해 구조가 보이지 않았다. 그저 가해자와 사건에 대한 분노, 사회복지사로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나만 보였던 것 같다. 이런 사건이 발생해도 움직이지 않는 법, 정치, 정책, 행정들 사이에서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는 작은 몸부림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 정도만 했다.
‘사회복지사인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의 역할이 아니라고 방관하고 있을 것인가? 하는 고민에 휩싸였다. 복지관으로 돌아와 직원들과 귀래 사랑의 집 사건에 대한 충격적인 현실을 공유했다. 회의 시간에 간단한 설명도 하고, 진정서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을 안내했다. 직원들 중에는 처음 듣는 사람도 많았다. 혹은 알고는 있었지만, 모르는 것과 별반 차이 없는 사람도 있었다. 게다가 장애당사자들의 경우는 거의 모르고 있었다. 왜 그럴까?’
그런 고민을 하던 끝에 ‘우리가 하나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라고 생각을 했나 보다. 인권팀에서 인권과 인문학을 공부하면서 ‘원주 귀래 사랑의 집 사건으로 숨긴 장애당사자, 그로 인해 가슴 아픈 장애당사자와 가족, 우리들은 모두 소중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실천해갈 때 장애인복지뿐 아니라, 사회가 발전해 왔다는 것을 배웠다. 배우고 나니 인권은 그동안 내가 생각하고 말해왔던 것과 달리, 대한민국이 앞서 만들어온 것도 아니고 장애인복지관이 희생하여 만들어온 것도 아니었다. 장애당사자와 인권단체들이 차별받는 개인을 귀한 사람으로 인식하고 모두 하나라는 생각으로 투쟁해 온 결과였다. 고 장성아 님의 49재는 그런 투쟁의 자리였다.
지금도 ’ 원주 귀래 사랑의 집 사건‘은 영정사진 속 고 장성아 님의 미소와 철문을 열고 들어가던 사람들의 분노한 모습, 추운 49재 현장에서 울먹이던 사람들의 얼굴로 남아있다. 그리고 49재 같은 그 한자리가 얼마나 소중한 현장인지 알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고 장성아 님의 49재 관련 기사 : https://blog.naver.com/newsbeminor/110163136227